18화
<엘리아나>
엘리아나는 세계수가 자라나는 것을 보고 감격한 듯이 두 손을 모으고 하염없이 그 생기 넘치는 푸른 잎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러우면서 떨리는 손으로 세계수의 줄기에 손을 대고 눈을 감았다.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으로 세계수를 맞이하려는 것처럼.
그렇게 한참을 서 있던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방울져 떨어지는 순간 눈을 뜬 엘리아나는,
“감사합니다. 영주 님.”
마치 못 볼 꼴을 보였다는 듯이 허둥대며 눈물을 닦아내고 내 쪽으로 몸을 돌려 정중하고 허리를 숙인다. 다만 이 감사는 내가 받기 민망한 감사다.
“내게 감사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묘목은 너의 차원의 세계수가 준 거고, 심은 건 넌데?”
“아니요. 절대 아닙니다.”
응? 이게 절대라는 수식어를 붙일 정도야?
“어머니의 나무가 마련한 차원의 틈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무(無)의 세상. 어쩔 수 없죠. 차원의 틈이니까. 하지만 엘프인 우리에게는 그건 고통이었습니다. 싱그러운 생명력과 따듯한 햇살, 자연이 주는 안온함을 그리워했습니다.”
금방이라도 쏟아버릴 것처럼 글썽이는 두 눈으로 나를 직시하는 엘리아나의 눈에는 어떤 확심? 결심? 같은 것이 맺혀 있었다.
“그런 저를 주인님께서 선택해주셨어요. 그것만으로도 감히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는데……. 어머니의 나무까지…….”
다시 한번 더 자신의 옆에 선 거대한 나무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던 엘리아나가 다시 몸을 돌려 나를 직시한다. 그리고 그 순간 엘리아나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가 돌변했다. 마치 살랑바람이 돌풍으로 변한 것처럼, 기세가 변하고 그녀의 기운이 변했다.
“세계수의 첫 번째 딸이며, 하이 엘프 신관, 숲을 지키는 엘븐나이츠 전대장임과 동시에 정령왕의 친우인 엘리아나가 저의 주인이신 이요한 님께 몸과 영혼을 받치는 충성을 맹세합니다.”
제사장의 주술처럼, 대법관의 명징한 선포처럼, 크게 외치지 않았으나 또렷하게 귀에 박히는 엘리니아의 목소리는,
『영지에 최초로 가신(家臣)을 등용했습니다. 영지 내정력이 상승합니다. 영지 건물의 건축 시간이 5% 단축됩니다.』
『충성 스탯 100을 달성한 가신이 등장했습니다!』
그 진지함과 엄중함만큼이나, 100% 진심임을 [영지 관리]가 증명해줬다.
“그래. 나도 잘 부탁할게. 앞으로 많이 도와줘.”
“Yes, my Lord.”
『관계 스탯 「충성」이 MAX에 도달한 가신(家臣)이 존재합니다.』
『이제부터 해당 가신이 보유한 ‘능력’을 사사(師事)할 수 있습니다.』
흐음. 사사(師事)라.
성소의 시스템이 말했던 그것인가?
저 단어는 스승으로 삼고 가르침을 받는다는 뜻일 건데?
그럼 내가 무려 엘프의 궁술을 배울 수 있다는 건가? 정령술도?
‘어?!’
당장 뭔가를 알려달라고 하고 싶지만, 맹세를 마친 엘리아나는 그대로 쓰러지듯이 세계수에 기대에 잠이 들었다. 미뤄둔 피로가 몰려오기라도 한 것처럼.
“흠. 날이 따뜻하긴 하지만, 좀 씻고 자는 게 나을 텐데? 아! 비누! 샴푸! 잠깐 그전에 컨테이너 다 어디 갔어?”
“그거 영지 밖으로 이동? 아니지 밀려난 것 같던데요? 완전히 밖으로요. 저 성벽? 목책? 아무튼 거기 너머로?”
지금까지 일련의 상황을 무슨 드라마 보는 것처럼 두 눈을 반짝이며 서너 걸음 떨어져서 지켜보던 유다연이 기다렸다는 듯이 설명한다.
“아오 빌어먹을. 신경 썼어야 했는데. 거기 생필품이랑 식료품이 들어 있는데.”
“어차피 정리해야 하는데. 지금부터 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나저나 이제는 말해줄 때도 되지 않았어? 왜 온갖 것들을 종류 별로 최소 하나는 준비하라고 한 거래? 재신 님은?”
“아이~ 참! 오빠! 저도 모른다니까요~. 재신 님이 알려주지 않으셨어요~. 제가 알면 어떻게 하겠어요? 저만 알겠어요? 오빠한테 말해주겠죠? 그러니까 오빠한테 알려주나, 저한테 알려주나 같은 건데, 그걸 왜 저한테만 알려주시겠느냐고요.”
맞는 말이긴 한데. 이상하게 얄밉다.
“그래.”
“아……. 다른 것도 봐야 하는데, 일단 컨테이너부터 안으로 옮겨야겠지? 밖에도 슬슬 마무리될 텐데, 말해서 컨테이너 좀 안으로 옮기라고 해줘. 난 쟤 깨워서 안으로 보낼게.”
“응!”
유다연이 총총 뜀걸음으로 성벽 쪽으로 멀어지는 걸 마력으로 감지하면서 세계수 그늘 밑에 잠든 엘리니아 옆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엘리니아.”
허리를 낮춰 어깨를 톡톡 두드리면서 이름을 부르자 부스스하게 눈을 뜬 엘리니아의 금색 눈동자가 나를 보며 끔벅거리더니,
“주인님……?”
멍한 얼굴로 ‘왜 당신이 내 방에 있어?’ 같은 표정을 하고 나를 올려다본다. 그 모습이 조금 전에 그 당차고 경건함마저 느껴졌던 맹세를 보이던 모습과 같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큰 차이가 있었지만,
‘귀엽네?’
나도 모르게 웃을 정도로 귀여웠다. 이래서 사람들이 아이돌의 ‘갭모에’에 환장하는 거구나.
“아! 주, 주인님!”
2, 3초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엘리아나는 신기하기까지 한 동작으로 벌떡 일어났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많이 피곤했겠지. 이해해. 그러니까 편하게 씻고 쉬라고 말해주려고.”
“아니에요. 주인님. 충분히 쉬었습니다. 오랜만에 싱그러운 나무와 어머니 나무를 직접 만지다 보니 잠깐…….”
“오늘은 첫날이니까 쉬어도 되는데. 우리도 첫날이거든.”
“첫날…이요?”
“어. 그린스킨 놈이 쳐들어온 첫날. 오늘 아침부터 침공이 시작됐으니까.”
“…그렇다면 더욱 주인님 곁을 비울 수 없어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오히려 더 다부진 얼굴로 휴식을 거절하더니 웅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퐁―. 퐁퐁―! 퐁!
작고 귀여운 물방울들이 우후죽순 생겨난다.
“어라? 이거 설마?”
“안녕. 운디네. 오랜만이야.”
퐁퐁! 포포포퐁! 퐁퐁!
“미안해. 자주 불러줄게. 이제. 여기는 안전하거든.”
귀여운 물의 정령들이 엘리아나에게 매달려 칭얼댄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처럼.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진짜 정령이네?”
정령이라는 사실이다. 물의 하급 정령 운디네. 그것도 네 명? 네 개채?
정령 소환을 처음 보는 건 아니다. 각성자 중, 아주 드물게 정령사로 각성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종말의 세상에서 누구 보다 환영받는 존재였다. 사제 계열과 함께 1티어 직업이라고 할까?
내가 이전에 각성한 쉘터를 마련하는 [지주] 클래스 같은 경우는 0티어지만, 그것 못지않게 주목받던 클래스다.
왜냐고?
그린스킨과 그 뒤를 이어 지구를 침략하는 놈들이 나타날수록 지구는 인간이 다스릴 때와 다른 의미로 오염된다. 공기에도 해로운 성분이 섞여 들고, 물은 썩어버리기 일쑤다. 당연히 땅도 점점 아무것도 심을 수 없게 변한다.
지구의 의지들은 인간이 지구를 오염시킨다고 인간을 박멸한다고 했지만, 오히려 그린스킨을 필두로 이후 나타나는 괴물들이 지구를 더 빠르게 오염시킨다. 그러니까 미래를 알게 된 ‘지구의 의지’들이 사기 계약을 당했음을 깨닫고 전심전력으로 나를 지원하는 거다.
공기와 물 그리고 땅이 오염된 세상.
그곳에서 깨끗한 물과 공기, 식물을 키울 수 있는 땅을 제공하는 정령사.
환영받을 수밖에 없는 클래스다.
그런 정령을, 비록 하급 정령이라지만, 너무나 쉽게 네 명이나 소환했다. 각성자는 하급 정령을 둘 이상 소환하는 것도 버거워하는 것에 비하면 역시 ‘엘프’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장면이다.
어느새 물의 정령의 도움으로 멀끔해진 엘리아나가 내 옆으로 다가온다. 싱그러운 상록수와 들꽃의 향기를 풍기며 다가온 엘리아나.
“늦어서 죄송해요. 주인님.”
미안해하며 다가온 그녀의 손에는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하나의 예술품과 같은 거대한 리커브드보우 형태의 활을 들고 있었다.
활에 대해서 막 물어보려는 찰나,
“오빠! 우리는 준비 끝났어요! 어?! 엘프 언니도 일어났네요?”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 들어온 유다연의 쨍쨍한 목소리가 그걸 방해했다.
“그……. 그래. 일단 가자. 엘리아나 너도.”
“네. 주인님. 엘라라고 불러주세요.”
“그래. 엘라. 그런데 영주 님 말고 주인님으로 하기로 했어?”
“안……, 될까요?”
“아니, 뭐. 그래.”
사실 이렇게 아름다운 엘프에게 주인님 소리를 들으면 개쓰레기 같아 보일까 봐 그러는 거지, 주인님이나 영주 님이나 평생 들어보지 못한 호칭이라 별 차이가 없다.
영지 내부에서 영지에 속한 존재의 여러 행동에는 베네핏이라고 하는 이득이 붙는다. 게임처럼. 뭐, 어차피 세상이 게임이 된 거나 마찬가지니까. 아포칼립스 세계관의 게임 말이다.
‘내 장르는 조금 다른 것 같지만.’
김포에 설치한 [영지]는 열쇠처럼 생긴 김포시 안에 김포시보다 더 넓은 범위의 땅을 생성했다. 그 넓은 지역을 아이들의 발걸음으로 외곽에 가까운 곳에서 중앙인 내성까지 모이는데, 2시간은 족히 걸릴 거다.
그것도 영지에 소속된 영지민이라서 그 정도다. 신비한 권능으로 건설된 새로운 땅인 영지이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지구에서 가장 강한 존재로 줄을 세우면 모두 거기에 포함되는 나와 내 휘하 각성자들은 얼마나 거릴까? 영지 중앙의 공터에서 성벽까지?
“이예!! 1등! 1등! 내가 1등! 9분 41초!”
일본 만화에 등장할 법한 천진하고 그저 밝기만 한 히로인 같은 모습을 한 저 동양계 여자는 안타깝게도 일본인이 아니라, 영국인이다. 제시 모건. 중국계 영국인.
그녀는 심지어 지구의 의지 중 하나인 ‘풍요(豐饒)’의 사제가 되기 전에 예일 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던 공대생이었다. 지금 저렇게 에너지 넘치는 여인이 아니라, 연구에 찌들어 만성 허리통증을 안고 살던.
“봤음?! 봤음?!”
재미있는 건 제시 모건이 박사과정을 밟았던 건, 연구를 해보고 싶거나 공부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였다. 아시아계 여성으로 영국 내에서 보이지 않는 차별에 맞서기 위해서.
그래서 유다연과 재신의 중재 아래 풍요의 사제가 되었을 때,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평소 자신에게 추근대던 담당 교수에게 쌍욕과 함께 죽빵을 날린 일이었다.
‘한국이나 영국이나 대학원은 인세의 지옥인 건가?’
아무튼, 풍요의 사제가 된 후 제시 모건은 누구보다 건강한 미인이고, 생명력 넘치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각성도 무려 유틸리티 계열인 성투사로 했다. 버프와 근거리 전투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작은 키에 탐스러운 검은색 머리카락이 어깨를 지나 날개뼈까지 닿았으며, 각성의 여파로 탄력적이고 튼튼해진 허벅지와 골반 그리고 더 커진 바스트에 비해 잘록한 허리는 그녀가 정말 만화에서 튀어나온 캐릭터 같은 느낌을 선사했다.
내가 제시 모건에 대해서 언급하는 이유는 그녀가 내성에서부터 영지 외곽까지 달려서 가장 일찍 도착했기 때문이다. 고작 10분 남짓.
그녀가 버프도 가능하고 전투도 가능한 성투사라고 할지라도, 영지 내에서 영지 소속은 이동속도와 체력 감소 및 회복, 마력 소모와 마력 회복에 보정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증명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지의 반지름은 대략 10.4km다. 완벽한 원형에 가깝게 구현된 영지의 넓이는 약 339㎢. 기존 김포시의 면적이 276㎢인 것을 참고하면 김포시보다 넓다.
아무튼, 제시 모건은 1분에 약 1km 조금 넘게 이동한 셈이다. 시속으로 따지면 64km/h. 그것도 전력을 다한 것도 아니고, 장난치는 것처럼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면서.
“휘유~. 대단하네요.”
자신들이 해놓고도 놀랄 정도로 각성과 영지의 이로운 효과의 시너지가 엄청나다는 방증이다. 세계수까지 심어졌으니 영지 랭크가 상승하면 할수록 더 좋아질 거고.
“이 정도면……. 정말 해 볼만 하겠는데?”
누군가 섣부르게 벌써부터 희망을 입에 담았음에도 부정하지 않은 같은 이유 때문일 거다.
“일단 이것부터 옮기면 되는 거……죠? 어라?!”
제시 모건이 높은 성벽에서 겁도 없이 뛰어내려 주변에 모여 있는 컨테이너에 손을 가져대는 순간,
『영지민 제시 모건이 탐색 중, 잃어버린 소유물을 채집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창고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오류! 창고가 건설되지 않았습니다. 창고를 건설해주십시오.』
라는 메시지가 출력됐다.
『아포칼립스에 나만 장르가 이상하다?』
심행 퓨전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