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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에 나만+장르가 이상하다-21화 (21/183)

21화

<이 석궁은 두 번 이상 쏴줍니다.>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인데, 창고 같은 걸 건설하는 것보다 병영부터 건설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

누군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너무나도 뜬금없이, 이 시기에는 나타난 적 없던 그린스킨 정예 부대를 본다면 말이다.

“성벽 업그레이드부터.”

적어도 지긋지긋하게 그린스킨을 경험한 내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내 목소리가 태연한 것이 그 증거다.

『플러스 카르마 포인트 1,000 포인트를 소비하여 「성벽」을 업그레이드하시겠습니까?』

병영에서 나오는 부대가 없어도, 저들은 쉽게 처리할 수 있다. 엘리아나를 믿는 거냐고? 당연히 그녀도 내가 믿는 구석 중 하나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현재 랭킹 50위 안에 모두 이름을 올리고 있을 지구의 사제들이자, 내 동료가 된 이들을 믿는다.

『영지 건물 「성벽[Rank: White]」를 「성벽[Rank: Red]」로 업그레이드하기까지 5시간 41분 59초가 남았습니다.』

『카르마 포인트 950 포인트를 소비하여 건설 대기 시간을 무시하고 즉시 건설 완료할 수 있습니다.』

“응. 마이너스 카르마 포인트로.”

『마이너스 카르마 포인트 950포인트를 소비하여 성벽을 업그레이드를 즉시 완료합니다.』

지상으로 추락하는 검은 운석. 그린스킨을 탑재한 운석이 떨어지는 타이밍에 맞춰 나무로 된 목책에 갑옷을 입히는 것처럼, 거무튀튀한 돌이 날아와 목책을 감싼다.

꽈르르르릉―!!

굉음과 함께 더 두껍고 높게 변화된 레드 랭크의 성벽이 순식간에 건설됐다.

“제시! 충성 스탯이 90 이상인 사람 모두 올라오라고 해!”

나처럼 영주 같은 특별 클래스가 아니라, 전투에 적합한 클래스로 개화한 이들이자, 지구의 의지가 선별해서 자신의 사제로 삼은 반짝이는 재능을 지닌 이들을.

각성 전이었다면 몰라도 각성한 이후에는 그들은 한 명이 일당백의 전사이자, 숙련된 마법사였으며, 능숙한 치료사였다.

“쟤, 쟤들 또 왔네요? 원래 이랬어요?”

유다연이 빠르게 성벽 위로 올라왔다. 영지의 북서쪽, 기존의 강화도와 김포시 그리고 북한의 개성을 가르는 한강의 세 지류가 모이는 곳, 최초 그린스킨이 등장했던 그곳에 새로운 그린스킨이 진형을 갖추고 있었다.

이전 그린스킨이 맨몸에 몽둥이 같은 거 하나 들고 왔던 것에 비해, 이번에는 가죽으로 된 갑옷과 시퍼런 날이 살아 있는 무기를 들고 왔다는 차이점이 있다.

“모르지. 종말 첫날에 영지는커녕 쉘터조차 세운 적이 없어. 그래도 확실한 건 우리가 상대했던 멍청이들은 선발대고, 저것들은 정예 부대라는 거야. 어쩌면 저 뒤에 철제 갑옷을 입은 오크 놈은 ‘이름’이 있을지도 몰라.”

“네임드(Named)요?!”

“그래. 그거.”

“그래도 괜찮은 거예요? 우리?”

항상 여유롭던 유다연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런 모습에 난 더 여유롭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꾸했다.

“얘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어? 너희는 지금 지구에서 이레귤러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높은 스탯을 가지고 있어. 정예 부대 정도에 쫄 게 아니라고. 그리고 저기 대장 놈이 네임드면? 그게 뭔 상관? 우리는 엘리아나가 있다고. 무려 옐로 랭크 스탯을 꽉 채운.”

“아……. 그러네요.”

“그래. 오히려 전투 계열 각성자들은 이번 기회에 마이너스 카르마를 잔뜩 먹을 수 있는 기회라고 봐야지. 일반 개체가 아닌 정예 개체는 마이너스 카르마는 더 많이 주잖아? 스탯 올려야 할 거 아냐.”

“네에!!”

유다연이 신이 나서 각성자들에게 달려가는 사이, 넓은 성벽 위를 아이들을 비롯한 성인들이 빼곡히 채우기 시작했다. 충성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일까? 역시나 어린아이들의 비중이 월등하게 높았다.

“내가 말했을 거야. 세상이 변했다고. 보이지? 저런 괴물들이 너희가 살던 곳에도 있었어. 내가 너희를 이곳으로 부르지 않았다면? 다 죽었을 거야. 시설마다 많아야 둘 이상 살지 못했을 거고.”

“…….”

“생색내는 거냐고? 아니야. 난 그런 거 안 좋아해. 현실을 직시하라는 거야. 같은 또래가 우글우글하고, 서로 인종도 달라서 신기한 것도 많고, 막 캠핑 온 것 같고 그렇지? 과거라면 그래도 돼.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잘 봐.”

난 손가락으로 멀리서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는 그린스킨 무리를 가리키고,

“지켜보다가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싶으면 석궁을 들고.”

연발 석궁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여기 레이저 포인터에서 나오는 레이저로 정확히 조준하고.”

나 역시 석궁을 들어 조준하고 마력을 주입했다.

“쏴.”

그리고 화살보다 길고 두꺼운 볼트가 전체적으로 붉은색 마력으로 빛나는 순간 방아쇠를 당겼다.

투쾅!

마치 총소리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굉음과 함께 붉은색 볼트가 선명한 궤적을 그리고 가장 앞서서 달려오는 근육질 그린스킨의 머리를 관통하고, 그 뒤에 오던 놈의 목줄기를 꿰뚫는다.

“어때? 쉽지?”

털복숭이 밥 아저씨가 떠오를 법한 대사를 날렸음에도,

“우와아!!”

“저도 해볼래요! 저요!”

아이들은 신이 났다. 옆에서 유다연으로 짐작되는 한심하다는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은데, 무시하기로 했다. 이건 명절에 조카들 앞에서 비비탄총을 자랑하는 철없는 삼촌처럼 보이지만, 필요한 과정이라고.

‘무턱대고 피가 난무하고, 살점이 뜯겨나가고, 전장의 살기에 휩쓸리면 PTSD가 올지도 모른다고.’

“그래? 할 수 있겠어?”

“네에!!”

“저 할 수 있어요! 총도 쏴봤어요!”

빌어먹을 초등학생 정도 되는 작은 키의 아이에게 총을 쥐여준 새끼는 어떤 새끼야? 잡히면 죽인다. 진심으로.

“그래? 그럼 잠깐만. 출고(出庫), 소형 연발 석궁 전부.”

소형이라고 해도 권총보다 훨씬 긴 석궁이 하나둘 성벽 위에 쌓인다.

내가 준비한 석궁은 소형 자동 석궁은 5천 정, 중형 자동 석궁 2천 정, 대형 석궁 오백 정이다. 각각의 석궁은 모두 주문 제작으로 만들어졌으며, 크기별로 전용 볼트 사이즈가 다 다르다. 오죽하면 이 석궁들 때문에 PMC를 설립했을까.

5천 정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괜찮다. 저 중에 각성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테니까. 애초에 그린스킨 놈들이 5천 마리가 안 된다. 고작해야 2천 정도 되는 것 같은데? 그리고 이미 각성한 지구의 의지의 사제들이 참여하는 전투다.

게임으로 치면 몹에 비해서 유저가 더 많은 셈이다. 그런데 고렙들도 끼어있는 거고.

'100명이나 각성하면 다행이게?'

아무나 각성시켜주는 거 아니냐고? 배신은 걱정하지 않냐고?

“충성 스탯 오픈.”

당연히 걱정한다. 어쩌면 난 이 부분은 평생 트라우마로 자리 잡고 있을 거라고 본다. 어리면 초등학교 1학년, 한국 나이라 8살인 아이들도 각성자라면 쉬이 믿지 못하니까.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르게 실제로 괴물을 눈앞에서 봐서 그런 건지 충성 스탯이 전체적으로 5 정도는 올랐다. 죄다 90을 넘어 95에 도달한 사람도 많다. 특히 나이가 어릴수록 충성 스탯은 압도적으로 높았다.

충성 스탯이 높은 순서대로 석궁을 나눠준다. 받지 못한 사람은 이미 받은 사람 뒤에 가서 섰다가 석궁을 든 사람이 기절하면 그 석궁을 쓰라고 하면서.

어느새 성벽에 넓게 퍼진 영지민들. 석궁을 이제는 단단한 돌로 이뤄진 성벽에 걸치듯이 걸고 눈만 빼꼼히 내밀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넣은 채였다.

“사격 준비.”

침을 질질 흘리는 그린스킨은 이제 성벽과 100m도 남지 않은 거리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그 거리가 다시 그것의 절반 이하로 줄었을 때,

“발사!”

5천 정의 석궁에서 발사된 볼트가 빼곡하게 하늘을 채운다. 무엇보다 이 석궁은 두 번 이상 쏴준다. 연발 석궁이거든.

아래쪽의 손잡이만 쉽게 당기고 나면 저절로 장전된다. 볼트는 다시 날아가고, 곳곳에서 생각보다 많은 수의 흰색 빛줄기가 터져 나온다. 영지민이 ‘각성’의 여파로 화이트 랭크 마력이 폭발하는 거다.

“어……? 다들 생각보다 잘 쏘는 건가? 뚝배기를?”

다들 헤드샷을 날린 거라고 생각했는데. 각성한 숫자보다 덜 죽은 그린스킨을 보면 그게 아닌 것 같다.

본래 각성 조건인 그린스킨 절명이 아니라, 치명상 정도를 입힌 상태에서 그린스킨이 뒈지면 죽인 사람과 치명상을 입힌 사람 모두 각성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조건이 완화된 건가? 왜?”

“지구의 의지께서 말씀하셨죠. 적이 누군지, 피아식별을 명확하게 했다고.”

“그래?”

“네.”

유다연의 부연 설명에 회귀 전보다 각성 조건이 더 쉽게 변했다는 걸 인지한 순간이고, 언젠가 재신이 말했던 ‘지구 의지가 노선을 분명히 했다.’는 말이 체감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각성 조건이 터무니없이 낮아진 건 아니었다. 일례로 인간이라면 충분히 치명상이 될 수 있는 부위, 예를 들어 배라던가 어깨 아래 같은 곳을 맞춘 이들은 각성하지 못한 것만 봐도 그렇다. 최소한 목이라던가, 눈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훨씬 완화된 각성 조건으로 성벽 위에서는 각성의 여파로 마력이 곳곳에서 일어나며 폭발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많아야 전투 내내 200명이나 각성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기세대로면 2천 명은 족히 각성하겠는데?

“좋아. 좋은데. 이거 이래도 되나? 첫날에 각성자가 천 명을 넘는다고?”

“몰라요. 저한테 물으셔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신탁을 받은 신녀처럼 명징하게 선언하다시피 말하던 유다연이 아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모른다고 딱 잡아뗀다.

저건 아무리 봐도 뭔가를 알고 있는 얼굴인데 말이지. 다시 캐물으려는데, 눈치는 빨라 가지고 이미 저만치 멀어져서 사방으로 버프를 날리고 있다.

“저걸 죽일 수도 없고. 아오.”

“죽일까요? 주인님?”

활을 만지작거리는 엘리아나는 누가 봐도 진심이었다.

“…농담이야. 농담. 배신이 아니면, 동료를 죽이진 않아.”

“그렇군요. 배신이군요. 배신. 기억하겠습니다.”

아니, 배신하면 그때 죽이라고. 어째 배신을 하게 만들어서 죽일 것 같잖니?

“슬슬 끝나가는 건가?”

멀리, 아직도 물속에서 나오지 않은 채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근육질의 오크만 남아 있고, 성벽으로 돌진한 이들은 태반이 죽어서 이제는 100마리도 남지 않았다.

애초에 성벽이 있는데, 방패도 없이 무작정 돌진하는 건 무슨 깡이야? 뇌마저 근육이 된 건가. 하긴 그게 그린스킨이라는 종족의 아이덴티티이긴 하지만.

“주인님.”

“음?”

그린스킨을 다 사냥했다고 안심하고 성벽을 내려가려는 찰나, 하늘에서 세 개의 검은색 운석 같은 것이 떨어진다.

세 덩어리, 그것도 이전보다 진한 어두운 색의 운석은 선발대 같은 게 아니라 본대라는 뜻일 거다. 지금은 앞서 등장한 정예 부대와 같은 수준일 거고. 과거 경험에 따르면. 자그만 조약돌처럼 보이니까 도착하고 정렬하기까지 약 2분 정도 남았다는 뜻인데.

“정예 부대가 세 개나?”

“어떻게 할까요? 제가 나설까요?”

엘리아나가 나서면 아무런 문제도 없이 손쉽게 해결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여러 이유에서 말이다.

그린스킨에게 이쪽에 지금 시점에서 존재할 수 없는 강자, 옐로 랭크의 강자가 있다는 걸 알려줄 수 있다. 전쟁에서 이런 고급 정보는 숨기는 게 좋다.

또한, 세 부대면 거의 1만에 육박할 텐데, 그 정도 숫자의 그린스킨을 처리하면서 얻을 수 있는 마이너스 카르마 포인트를 모두 내가 독식할 순 없다.

마지막으로 지금도 벌써 500명 가까이 각성했는데, 1만에 가까운 숫자를 상대하다 보면 농담처럼 말한 2천 명의 각성자가 농담이 아니라 팩트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것도 충성 스탯이 최소 90이 넘는 각성자가 말이지.’

위험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앞으로 세상에서 이 정도는 평화롭던 세상에서 차를 운전하면서 교통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수준이나 마찬가지다.

“그래도 만약을 대비해서 도움이 필요할 테니까.”

‘[영지 관리]. 병영 건설.’

『아포칼립스에 나만 장르가 이상하다?』

심행 퓨전판타지 소설

(주)조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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