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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에 나만+장르가 이상하다-27화 (27/183)

27화

<내림 받는다>

지구의 의지의 사제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해 성벽 위에는 온통 아이템을 손에 쥔 사제들이 가득했다.

“주인님, 정말 괜찮으세요?”

새롭게 등장한 아이템과 그 효과에 고무된 이들과 달리 엘리아나의 시선은 내가 깨어난 후부터 내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래. 괜찮아. 그런데 저기 두 사람은 언제 다쳤어? 내가 잠깐 기절해 있는 동안 다친 건가? 왜? 가디언도 있었을 텐데?”

“저기. 저놈 때문입니다.”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보통의 그린스킨과 달리 뼈 장식이 주렁주렁 매달린 나무 지팡이를 흔들고 있는 오크가 있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다섯이나.

“주술사?”

“네. 그것도 제법 하는 수준의 주술사입니다.”

엘리아나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주술사 중 하나가 바위만 한 불덩어리를 성벽으로 날린다.

“허어?”

불덩어리의 크기는 차치하더라도 마법이나 주술은 거리가 멀수록 위력과 유지력이 떨어진다. 그런데 10여 미터가 넘는 성벽 위까지 불덩어리가 도달한다는 건 엘리아나의 말처럼 제법하는 주술사가 맞다.

“저게! 또 당할 줄 알고!”

올리비아가 붉은색이 아닌 연한 오렌지색 마력을 일으켜 팔찌가 채워진 팔을 휘젓자 그녀의 손짓에 따라 불덩어리의 경로가 바뀐다. 목표했던 성벽이 아니라, 성벽 아래, 그러니까 그린스킨이 아직도 모여 있는 곳에 떨어진다.

콰아아앙!!

“Kyraaaaa―!!!”

그린스킨의 비명을 들으며 영지민 중에 나온 최초의 부상자가 어떻게 생겨난 건지 추론이 된다.

“그럼 저것들의 최초 공격에 당한 건가? 있는 지도 몰랐을 때?”

“네. 보스. 그것도 갑자기 정면이 아니라 옆에서 들어온 공격에요.”

이상했다. 몰랐다고 하더라도, 당황스러운 공격이라고 해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엘리아나는 충분히 요격할 수 있었을 거다.

“주인님을 지키는 게 먼저예요.”

마치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엘리아나는 묻지도 않은 질문에 대답부터 꺼냈다. 그 의지가 어찌나 단호하던지, 길게 늘어진 비단을 단숨에 베어내는 날이 서린 칼날과 같았다.

“알았어. 하지만 앞으로는 최대한 도와줘. 그게 나를 위하는 일이기도 하니까.”

“네. 주인님.”

아마도 내가 지구의 의지를 만나고 있는 동안 기절한 것처럼 보였거나, 그것과 비슷한 심각한 상황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엘리아나의 단호한 말속에서 느껴지는 작은 불안과 걱정을 보면 말이다.

“슬슬 끝나가는 건가?”

4만이 넘던 그린스킨의 숫자는 이제 대충 세어도 세 자릿수가 넘지 않았다. 그런데도 성벽 밖은 여전히 흉물스러운 탁한 녹색 천지였다. 그린스킨의 시체로 말이다.

일반적인 전쟁이라면 시체를 치우는 것도 일이겠지만, 이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전투가 끝나면 언제나 그렇듯 사라질 테니까. 그리고 아직 아이템을 획득하지 못한 사제들이 추가로 아이템을 획득하겠지.

“아! 올리비아! 유다연! 도로시! 그린스킨 서너 마리만 남겨둬!”

“네!”

“왜요? 오빠?”

“네에~. 오라버니~.”

올리비아와 유다연 그리고 도로시는 각자의 성격에 맞게 서로 다른 대답이 들려왔지만, 벌써 그린스킨을 사로잡을 준비를 하면서 기존의 각성자들에게도 주의를 주고 있다.

그린스킨이 줄어드는 속도는 점차 가속화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제 남은 숫자가 천이 안 되는데, 각성에서 깨어난 각성자의 숫자는 점차 늘어가고 있으니까.

“그만!!”

눈에 보이는 그린스킨의 숫자가 딱 다섯이다. 온몸으로 허연 김을 내뿜을 정도로 투쟁적으로 싸운 그린스킨은 마력이 담긴 목소리에 움찔하더니 성벽 위에 선 나를 올려다보며 손에 쥔 무기를 만지작거렸다.

“네이선! 유다연! 화상 부상자 두 명. 데려와.”

각성을 하면 암도 낫는다. 그리고 각성하기 전에 갖고 있던 상처도 낫는다. 어쩌면 그건 각성하는 과정이 반드시 그린스킨을 죽여야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평범한 인간이 그린스킨을 죽인다는 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부상이 생길 테니까 말이다.

비록 사제 계열로 각성한 각성자들이 있지만, 각성자가 대상이라면 모를까, 일반인이 입은 화상은 확언할 수 없다. 차라리 관통상이면 몰라도 화상은 난감하다. 잘못 치료하면 근육이 이상해진 상태로 피부가 붙어버릴 수 있다.

충성 스탯 위주로 성벽 위로 불렀기 때문일까? 부상자 중 한 명은 중학생 남자고 다른 한 명은 그 아이를 보호하려다가 다친 20대 젊은 여성이다. 난 이들에게 각성의 기회를 주려 한다.

“미안해요. 내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나도 조금 문제가 생겨서 다치게 했네요.”

네이선과 유다연에게 안겨 다가온 두 명의 환자에게 먼저 그렇게 말을 꺼냈지만, 제법 심각한 화상에 고통스러울 텐데도 둘은 맹렬히 고개를 흔들어 부정했다. 아마도 미안해 할 일이 아니라는 뜻이겠지.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일단 낫는 게 먼저니까. 자, 이 석궁으로 저기 있는 놈들을 죽이면 다 나을 겁니다. 할 수 있겠어요?”

질문을 하고 상태를 보니 높은 성벽 위에서 화상의 고통으로 낫지 않은 몸으로는 이 석궁의 시위를 당기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그런데 그런 몸으로 10여m 아래 그린스킨을 명중한다?

“잠시만 기다려요.”

그대로 성벽에서 뛰어냈다. 높이 있어서 어쩌지 못하던 인간이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일까? 고작 다섯 남은 그린스킨이 입에 침을 질질 흘리며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달려든다.

“주인님!”

“기다려.”

가까운 거리이기 때문일까? 활이 아니라, 석궁용 화살을 양손에 단검처럼 쥐고 달려들려는 엘리아나를 말리고, 평소 습관적으로 메고 다닌 할버드를 쥐고 마력을 주입해 휘둘렀다.

스콰악!

다섯 마리의 다리가 잘려 나간다. 그린스킨의 종족 특징 중 하나인 괴물 같은 회복력은 저 다섯 마리가 다리가 잘렸음에도 과다출혈로 죽을 가능성이 제로에 수렴할 정도다.

그러니 바닥에 쓰려져 손으로 어떻게든 다가오려는 놈들이 당장 죽을 일은 없다는 뜻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스콱―!

무식하게 휘둘러진 할버드에 팔까지 잘라 안전을 확보하고서야,

“네이선! 유다연!”

“네!”

“내려가요!”

내가 각성자로 만들려고 했던 부상자를 성벽 아래로 불렀다.

석궁을 쥐고 부축을 받고 선 두 명의 남녀는 두어 번의 실패 끝에 그린스킨을 죽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역시나 계획대로 각성 의식에 들어갔다. 마력이 모이면서 얼굴과 팔 그리고 상체에 있던 벌겋게 달아오른 화상이 사라지는 것은 덤이다.

물론 나는 물론이고 저 둘도 각성만큼 ‘덤’도 필요했으니까 다행이다. 혹시 몰라 남겨둔 세 마리의 그린스킨.

문제는 성벽 위로 올라온 영지민은 이미 모두 각성을 마친 상태였다는 거다. 즉, 최초 85 스탯 이상이었던 영지민 중, 각성하지 못한 사람이 없이 모두 각성했다는 뜻이다.

결국, 아직 각성하지 못한 영지민 중, 충성 스탯이 가장 높고, 체구가 작고, 가장 어린 셋을 선택해서 각자 하나씩 그린스킨을 처리하게 했다. 초등학교에 입학도 하지 못한 아이 셋이 같은 시설에 있던 언니와 오빠의 설명을 들으면서 사지가 결박된 그린스킨을 처리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끝났네요…….”

생육(生育)의 사제이면서, 힐러 특화 계열로 각성한 사나스 샤인스가 특유의 그 폭력적이고 육감적인 몸매가 드러나는 스판 계열의 옷을 펄럭이면서 등 뒤로 다가와 힘없이 내게 기댄다.

평소라면 한 소리했겠지만, 지금 그녀의 이런 어리광 정도는 충분히 봐줄 만하다.

이번 전투로 발생한 사망자 0명. 부상자 2명이있었지만, 없어졌다.

이건 특히나 사나스가 정말 열심히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부족한 마력을 생명력으로 대신하며 부상자를 치료했다. 얼굴과 상반신에 마기가 섞인 화염 주술을 맞고도 두 명이 살아 있을 수 있었던 이유도 그녀의 노력 때문이다.

“고생했어.”

“헤헤……. 요한님도요.”

그 말을 끝으로 기절하듯이 잠이 들어버린 사나스를 제대로 앞으로 당겨 공주님 안기로 안았다.

마지막으로 각성한 세 명이 깨어난 것과 동시에 이번 전쟁으로 탄생한 각성자의 수는 3,700여 명. 정확하게는 3,705명이다.

3,705명의 각성자.

이 숫자는 멸망이 시작된 첫날, 3시간도 지나지 않은 이 시각을 기준으로 하면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각성자의 숫자보다 많은 숫자라고 확신하고 단언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과거 나도 이 시간 대에 어설프게 각성했음에도 살려고 도망치고 있었으니까. 아마 지금은 혼돈 그 자체일 거다.

그런 의미에서 내 영지는 지구 최강의 전력이다. 그리고 아시아를 담당한다는 그 머저리 같은 고블린 놈은 이제,

[뭐 된 거죠. 보나 마나 엄청 화내면서 다른 꿍꿍이를 꾸미고 있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까 이 녀석과도 끝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넌 도대체 정체가 뭐야? 정말 지구의 의지 중, 하나인 군주(君主)야…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마스터. 저는 ‘군주’라고 불렸던 지구의 의지의 일부이며, 지금은 오랜 동면에 들어간 그가 깨어나면 군주가 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게 뭔 소리야?’

[쉽고 직관적으로 설명하면, 저는 군주가 깨어나면 이 전쟁과 전장 그리고 영지의 삶을 1인칭 가상현실로 즐길 수 있게 해주는 저장매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게 뭔데 씹덕아!

이후 장황하게 풀어서 설명했는데, 그 긴 설명을 모두 듣고서야 나는 지구의 의지가 말한 ‘경쟁이 치열했던 자리’라는 뜻을 비로소 이해했다.

이 에고(Ego)의 원본인 군주는 힘과 이야기, 두 가지를 담은 대가로 오랜 잠이 든다. 대신 종말이 끝나고 난 뒤, 깨어난 군주는 나와 함께 이 종말을 헤쳐나가면서 경험한 것을 온전히 체감하게 된단다. 1인칭 시점으로.

인류가 아직 가상현실 게임을 구현하지 못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거라고 내게 추가로 설명하면서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엄청난 협상과 협박의 과정이 있었다고 한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잠깐만. 뭔가 이상한데? 경쟁이 치열했던 자리라고? 그건 모두 이 종말의 끝이 종말이 아니라, 승리해야 하는 거 아냐?”

[정확합니다. 우리는, 지구의 의지는 이 전쟁의 승리를 확신합니다. 우리는 그만큼 분노했고, 그에 걸맞게 준비했으며, 마스터는 그러고 남을 정도로 충분한 역량을 지녔습니다.]

‘…희소식이긴 하네. 뭐.’

돌고 돌아 여러 기이한 상황과 설명을 들었지만 결론은,

[즉, 저는 이 종말이 온전히 마스터의 승리로 끝나는 걸 확신합니다. 어쩌면 마스터보다 제가 더요. 그래야 이 경험을 온전히 제 원본에게 전달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저를 마구마구 부려주세요.]

이 창세 등급의 반지만큼이나 이 에고 역시도 내게 엄청난 도움이 될 거라는 거다.

파란만장하고 스펙타클한 하루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잠깐 반지의 에고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벌써 절반 이상의 그린스킨 시체가 지구로 스며들어 사라졌고, 그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성벽 위에 혹은 아래에 선, 이제는 각성자라고 부를 수 있게 된 이들은 모두 뭔가에 홀린 것처럼 그 모습을 그저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유다영 아니, 올리비아.”

“네. 요한님.”

“슬슬 정리하자.”

“네.”

올리비아는 숙련된 비서처럼 각성자를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누기 시작했다. 나뉜 그룹에는 어떤 공통점도 없었다. 지역, 인종, 나이, 클래스 같은 것들이 말이다. 마치 일부러 그런 것처럼.

[마스터. 그 전에 먼저 확인하셔야 할 것과 처리하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응? 확인? 처리? 뭘?”

[정복, 번영, 통치 그리고 군주의 힘을 확인하시고 익숙해지셔야 합니다.]

“음.”

하긴 이야기가 스며드는 장비는 게임의 장비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정확하게는 아이템 등급에 따라 차이가 일어난다.

역사 등급 이하의 아이템은 게임의 장비와 거의 같다. 장비 착용과 동시에 스탯이나 고유 능력, 일반 능력에 즉각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올리비아가 아이템 착용과 동시에 마력이 레드 랭크에서 오렌지 랭크로 상승한 것처럼 말이다.

반면 설화 등급부터는 아이템에 담긴 ‘서사’를 각성자에게 전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생각해보라. 설화에 등장하는 이야기. 그 동화 같은 이야기에 나는 성능이 담긴 아이템인데, 그게 게임처럼 단박에 적용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힘이 적용되는 과정에서 각성자 역시 자신의 늘어나거나 새롭게 생겨난 이능에 적응하게 된다.

이 과정을,

“내림 받아야 하는구나.”

신내림을 받는 것 같다고 해서 한국 각성자들은 ‘내림 받는다’라고 했다.

[준비 되셨나요?]

“어? 어. 그런데 준비까지 해야 하는 거……?”

준비까지 할 일이냐고 말하려고 했다. 아니, 말은 했던가? 아닌가? 한 마디도 못했던가? 귀에서 ‘삐―!’하는 이명이 울리다가 그 소리마저 아득하게 멀어졌다.

그 순간,

[먼저 「정복(征服)」의 이야기입니다.]

아득하게 몸으로부터 멀어지는 오감 속에서 선명하게 울려 퍼지는 에고(Ego)의 목소리마저도 아련하게 흩어진다. 안개 속으로 던져진 성냥불처럼 의식이 꺼진다.

『아포칼립스에 나만 장르가 이상하다?』

심행 퓨전판타지 소설

(주)조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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