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놉. 그냥 호구 아니고 개호구야.>
아득하게 멀어지던 의식이 빠르게 되감기를 한 것처럼 확대된다. 다시 눈을 뜬 순간 나는 하늘 위에서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인간의 역사는 정복의 기록이다.]
조금 전에 만났던 그 꼬짱꼬짱하다 못해 독선적이기까지 한 목소리가 전장을 내달리는 북소리처럼 낮게 울려 퍼진다. 그리고 그 순간,
[우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
…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지상에는 점처럼 보이는 작은 인간들이 나타났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간이 나타나 서로를 향해 달려들어 무기를 휘두른다.
그것만 보면 ‘정복’보다는 ‘전쟁’이나 ‘전투’ 같은 같은 광경이 떠오른다. 하지만 마치 서로 다른 색 물감으로 물들이는 것처럼 목이 잘리고 무기에 몸이 꿰뚫린 사람이 등을 돌려 조금 전까지 같은 편이었던 동료를 향해 무기를 휘두른다.
죽이면 아군이 된다.
죽으면 죽인 진영에 속한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그 광경은 부정형 생명체가 서로를 삼키고 뱉어내는 기이한 모습이었다. 어딘가 역겨우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가슴이 뛰게 하는.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찰나였던 것도 같고, 오랜 시간이 흐른 것도 같다.
이제는 두 진영이 아니라, 수십 개의 인간 그룹이 서로를 향해 이를 드러내고 탐하고 ‘점유’하는 장면이 빠르게 확대된다. 마치 하늘에서 추락하는 것처럼.
그렇게 전장의 한가운데 선 순간,
[정복하라!]
의식 속에서 들었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터져 나오며 모든 것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대신에 안개처럼 주변에 퍼져 있던 기운이 빠르게 내게 몰려든다.
[정복하라!]
아무것도 안 했는데, 심장이 뛴다. 그건 전력 질주 후, 몸에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서 억지로 뛰는 그런 움직임이 아니다. 기대와 흥분으로 뛰는 심장. 그것은 내게 흡수된 안개 같은 ‘기운’을 심장으로 끌어모으기 충분했다.
[정복하라!]
마치 엔진에 흡수된 연료처럼,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폭발하듯이 혈관을 따라 몇 번 휘돈 기운이 손가락으로, 정확하게는 반지로 모여들었다.
[정복하라. 이요한.]
환상은 나타났던 것처럼 사라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가 뜬 것도 아니다. 눈을 조금도 깜빡이지 않았음에도 찰나에 풍경과 시야가 변했다. 조금 전 봤던 그 환상이 마치 꿈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라지고, 그린스킨의 몸이 불타면서 남긴 지독한 악취가 느껴지는 성벽 아래의 풍경이 나타났다.
[「정복(征服)」의 이야기는 어떠셨나요? 마스터?]
“모르겠군. 뭔가 달라졌는데. 뭐가 달라진 건지.”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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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 군주의 인장 [Rank: Genesis]]
태고(太古)라고 명명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근원’들의 이야기와 힘을 담은 반지입니다.
1. 「정복(征服)」의 힘이 담겨 있습니다.
① 영지의 경계를 벗어난 모든 전투 부대의 행군 속도, 행군 지속력, 체력과 마력 회복 속도가 상승합니다.
② 영주(領主)의 친정(親征) 시, 점령지를 속령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속령의 수는 영주의 랭크에 따라 증가합니다.
2. 「번영(繁榮)」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3. 「통치(統治)」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4. 「군주(君主)」의 이야기와 힘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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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반지의 아이템 설명이 반짝이면서 떠올랐다. 마치 자신의 변화를 주인인 내게 자랑하려는 것처럼.
[이어서 「번영(繁榮)의 이야기입니다.」
‘잠……!’
미처 변한 장비의 효과를 확인할 새도 없이 다시 시야가 변한다.
허허벌판이다. 마치 조금 전 봤던 「정복(征服)」을 연상케 할 정도로 누런 황무지 위에 작은 밀알이 나풀거리며 떨어진다.
그리고 황무지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아니, 없는 것처럼 보였다. 변화는 소리가 없이 서서히 일어났다. 밀알이 떨어진 그 자리에서부터 작은 싹이 텄다. 착각인 것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졌는데, 어느새 올라온 싹의 숫자가 늘어가더니, 순식간에 누런 황무지가 황금물결의 밀밭으로 변했다.
같은 노란색 계열이었지만, ‘누런’ 황무지와 ‘황금빛’ 밀밭은 완벽하게 상반되는 느낌을 준다.
[뒤섞여.]
그렇게 늘어난 밀밭 주변으로 비가 내리고, 나무가 자라고, 물이 흐른다. 황무지가 초지(草地)와 농지로 변하면서 작은 곤충과 벌레들이 나타났다.
[꽃을 피운다.]
그리고 그 작은 곤충과 벌레를 먹이로 삼는 작은 동물과 새가 나타났고, 결국에는 황무지는 거대한 생태계를 이루는 넓은 땅이 되었다. 누가 보더라도 탐을 낼 것처럼 풍요로운 땅이.
[이것이 번영이랍니다.]
그 풍요로운 땅에 자리를 잡은 인간은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먹을 것이 풍족하고 환경이 안온하니, 저절로 태어나는 아이들이 굶주리지 않고 자라기 때문이다.
[번영을 이루세요.]
또 다시 추락하듯 풍요로운 땅이 확대되는 것처럼 가까워지더니 그 땅과 주변의 모든 것들이 환상처럼 황금 빛 입자로 변해 내게 흡수된다.
쿵―.
전과 다름없이 심장에 흡수된 기운이 혈액을 타고 맹렬히 휘돌며 온몸 구석구석을 내달리다가 손가락, 그러니까 창세 등급의 반지로 모였다.
[바로 이어서 「통치(統治)」의 이야깁니다.]
풍경이 사라지고 바글바글한 인간들의 모습이 보인다. 마치 무질서라는 것은 이런 것이라는 걸 보여주는 것처럼, 여러 인간이 제각각으로 행동하는 수만의 인간 무리가.
그러한 무질서 속에서도 분명한 것은 혼자서 무질서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통치의 시작은 거느리는 것에 있소.]
최소 셋 이상의 무리가 같은 행동을 하며 다른 무리와 충돌하고 반목하고 화합하는 과정이 보인다. 대화를 따로 들은 것이 아님에도.
[거느린다는 것은 무리를 이룬다는 것이고, 시작과 끝, 그러니까 지시하는 자와 따르는 자가 있다는 것이오.]
그렇다고 화합만 하는 것은 또 아니다. 반목의 결과가 살육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주변에 있던 인간 무리가 살육을 일으킨 무리와 격렬하게 반목하고 충돌한다.
마치 그것만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결국 살육으로 점철된 투쟁을 일으킨 무리도 살해당한다. 문제는 그 이후에 일어났다.
[그리고 기준을 세우는 것이 그 다음이오.]
조금 전, 인간을 살해한 이들과 반목하며 기어이 살해한 이들을 마치 처음에 인간을 살해한 무리처럼 다른 무리가 격렬하게 저항하고 반목한다.
그렇게 엉망진창의 혼란이 찾아올 무렵 무리에서 대표가 한 명씩 나와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다.
[거느린 이들을 기준에 맞게 다스리는 것.]
마치 서로 규칙을 정하려는 것처럼 한참을 토론하던 대표들이 합의에 도달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무리로 돌아간다. 그 뒤로 무질서 속에서 서서히 일정한 질서가 들어선다.
분명히 마음대로 움직이고 반목하고 서로 충돌하는 것 같은데 전과 달리 그 안에 질서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질서는 점차 자신의 범위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마치 숲에 난 길이 많은 사람이 이용하면서 점점 확연하게 드러나고 넓어지는 것처럼.
[그것이 통치라오.]
그리고 그 규칙과 질서는 쓸데없는 반목을 줄이고 인간이 사회를 이루게 했으며, 사회를 이룬 인간 무리는 더 강해졌다.
[통치를 잊지 마시오. 요한 공.]
그렇게 짧으면서도 길게 느껴진 번영과 통치의 이야기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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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 군주의 인장 [Rank: Genesis]]
태고(太古)라고 명명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근원’들의 이야기와 힘을 담은 반지입니다.
1. 「정복(征服)」의 힘이 담겨 있습니다.
① 영지의 경계를 벗어난 모든 전투 부대의 행군 속도, 행군 지속력, 체력과 마력 회복 속도가 상승합니다.
② 영주(領主)의 친정(親征) 시, 점령지를 속령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속령의 수는 영주의 랭크에 따라 증가합니다.
2. 「번영(繁榮)」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① 영주가 다스리는 영지의 모든 생산력이 상승합니다. 영지 랭크에 따라 상승폭이 결정됩니다.
3. 「통치(統治)」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① 영주가 다스리는 영지의 치안이 최상을 유지합니다.
② 영지 랭크 이하의 영지 권역 안으로 침범하는 모든 적대적인 상대를 영지 건물과 연계해 자동으로 색적합니다.
4. 「군주(君主)」의 이야기와 힘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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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이제 끝이 났다는 듯이 반지가 다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나는 영지 성벽 위에 아래 풍경을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뭐야? 군주 이야기는 안 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군주(君主)」는 이야기와 함께 힘을 담았습니다. 단순히 이야기만 담긴 이들과는 다르게 적용됩니다. 마스터께서 이 반지를 손가락에 낀 그 순간부터 군주의 힘은 적용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항상 마스터께 이롭게. 군주는 영주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보실 효과는 전투가 끝난 뒤 정산이 시작되면 드러나게 됩니다.]
“음. 음.”
[전혀 이해하지 못하셨군요. 마스터.]
“이해하면 더 이상한 거야. 애초에 아이템을 손에 쥐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바로 나라고.”
[자랑스럽게 하실 말씀이…….]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나도 어디 가서 꿀리지 않을…….”
[네. 호구라고 하셨죠.]
“놉. 그냥 호구 아니고 개호구야.”
[마스터. 제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자랑스럽게 하실 내용은…….]
“아, 됐고. 일단 영지 건물부터 올려야겠다. 영지 건물 전부 건설해.”
『건설 대기열이 부족합니다. 건설 대기열을 추가하시겠습니까? 최초 추가에 10만 카르마 포인트가 필요합니다.』
“……응? 대기열?”
무슨 대기열? 게임처럼 대기열도 있어? 아니, 그것보다 왜 부족해?
[마스터의 특수 스탯 「위엄」의 랭크가 상승함에 따라, 고유 능력의 [영지]의 랭크 역시 상승했기 때문입니다.]
아, 그렇구나. 영지가……? 잠깐만. 영지 랭크가 상승했다고? 그렇다는 건?
‘상태창!’
전과 마찬가지로 각성자 정보가 출력되고 나는,
“미친!!”
비명과 같은 고함을 지르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포칼립스에 나만 장르가 이상하다?』
심행 퓨전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