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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에 나만+장르가 이상하다-32화 (32/183)

32화

“미친 것들. 각성 전에는 멀쩡했는데, 각성한 후에 다들 미친 건가? 아니면 저게 원래 성격인가? 아아―! 몰라! 일단 나도 좀 쉬자.”

영주의 특권인 공간 이동으로 4층에서 가장 넓은 방으로 이동하겠다는 의지를 떠올리자 시야가 변했다. 교실 두 개? 아니, 네 개는 될 법한 넓은 공간이 방이다. 깔끔하면서도 기품이 느껴지는 침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침대 맞아?”

그 이유는 단순히 고급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크기 때문이다. 과학적으로 가능한 것인지는 차치하고,

“열 명은 눕겠는데?”

열 명이 누워도 남을 정도로 큰 침대라니. 이딴 걸 어디에 쓰나?

“일단은……. 좀 씻자. 빌어먹을 그린스킨놈들.”

온몸에 그린스킨의 피와 땀, 그리고 먼지가 혼합되어 난리도 아니다. 피부에 ‘으적으적’이라는 글자가 수도 없이 새겨진 기분이다. 씻어야만 한다.

[지주]보다 [영주]가 좋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생활과 편의라는 측면에서 멸망하기 전보다 더 안락하다는 점이다. 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고, 어두워지면 빛을 밝힐 수 있으며, 추우면 난방을, 더우면 냉방을 할 수 있다.

아마 반년만 지나도 [영주] 클래스가 다스리는 [영지]는 다른 것보다 이런 이유로 모든 각성자들이 원하는 곳이 될 거다.

따뜻한 물이 가득 채워진 욕조에 입욕제를 넣고 즐기는 망중한이라니. 아포칼립스에 이딴 걸 할 수 있다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멸망이 가속화되면 ‘깨끗한 물’은 가장 중요한 자원이고 아끼고 보호해야 할 자원이며, 동시에 화폐로서 가치도 가진다. 그런 물을 이따위로 쓴다?

회귀 전 들었다면 헛소리로 치부했을 일을 우리에게는 앞으로 ‘일상’이 될 거다.

[그게 바로 마스터가 특별한 이유이고, 지구의 의지가 모여 희망이라 될 거라고 확신한 이유이기도 하죠. 인간은 그런 존재니까요.]

“그런데 나 말고도 회귀 전 뛰어났던 이들이 있지 않나? 영국의 다이애나라던가, 미국의 조쉬 같은?”

[그들도 각자 특성이 있고, 그들 나름대로 준비를 했겠죠.]

“맞아. 특히 조쉬 그놈을 유다연이 씹덕이라고 놀렸지만, 걔네 집이 엄청 부자 아닌가? 아마 오늘도 프라이빗 비치, 그러니까 개인이 소유한 해변 별장에서 가족 모임하다가 살아남았다고 그랬는데?”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결국 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마스터를 찾아와 자비를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구나…….”

그때가 되면 그들을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거절해야 할까?

회귀 전, 영상으로 남았던 다이애나의 힘은 엄청났다. 그 거대한 힘을 가진 존재를 내 영지 안으로 들여도 될까?

‘쓸데없는 생각이네.’

중구난방 떠오른 망상에 민망해졌다. 당장 그들이 찾아오는 것도 아닌데.

“뭘 간단히 먹어야 하는데. 다들 어떻게 하고 있으려나? 이거 전화가 안 되니까 엄청 불편하네.”

그렇게 투덜대다가 떠올렸다. 무전기를 사 놓았다는 것을. 내가 PMC를 세웠다고 말했지? 그러니까 민간 군사 기업 말이다. 그러면서 멸망이 시작된 이후, 여전히 작동하게 될 것들을 분류해서 구비했는데, 무전기도 거기에 들어간다.

정신이 없고 경황이 없어서 까먹고 있었다.

“출고(出庫), 무전기 50개.”

침대 위로 쏟아지는 손에 폭 들어오는 크기의 무전기들. 가장 넓은 범위를 커버하는 무전기를 준비하긴 했는데, 내성이 워낙 넓어서 과연 이게 가능할까 싶기도 하다.

[당연히 내성은 넓어서 불가능하죠. 하지만 내성에 적용된 생활 이능은 그런 기본적인 통신 장치인 무전기는 필요 없습니다.]

“응?”

[내성 안에서는 「기초 통신」 마법이 가능합니다. 물론 아직 ‘기초’이기 때문에 쌍방 통신이 아니라 내성의 주인이신 마스터께서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만 가능하지만요.]

그제야 내성 설명에 나왔던 생활 마법이라는 게 떠올랐다. 그 수가 적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맞습니다. 마스터. 하지만 그걸 다 알아서 의식하면서 사용하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결국 다 알아서 사용하게 되실 거고, 무엇보다 제가 때에 맞춰 첨언하겠습니다.]

“흠. 좋아. 그럼 통신 마법?”

[사용법을 물어보시는 거죠? 자동으로 적용되는 이능을 제외한 모든 이능은 사용 법이 같습니다. ‘통신 온, [전달 대상] [전할 말], 오프.’ 이런 식입니다.]

“통신 온, 유다연, 올리비아, 네이선, 사제들 다 모아서 내 방으로. 오프. 이렇게?”

[네. 맞습니다.]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엘리아나를 빼먹었다는 걸 떠올렸다. 그녀는 각성자라는 범주에 속한 존재가 아니니까.

“통신 온, 엘리아나, 내 방으로 와. 오프.”

[…어. 그렇게 보내신 건가요? 그 엘프에게?]

“응? 어. 왜?”

[아닙니다.]

에고(Ego) 녀석이 이상하게 굴거나 말거나 엘리아나에게 통신을 날리고 5분도 지나지 않아 내 방문이 열렸다. 노크는커녕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열린 문.

“주인님.”

촉촉한 물기와 상쾌한 바람, 마치 막 샤워를 마치고 나와 시원한 선풍기 앞에 섰을 때나 느껴질 법한 싱그러움이 느껴지는 목소리의 주인은 엘리아나다.

문제는,

“…너 왜 그런?”

속이 비치는, 오히려 보일 듯 말 듯 가려서 더 야릇하게 느껴지는 란제리 같은 옷차림이라는 게 문제다.

“네?”

“응?”

우리 둘은 서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그렇게 반문했다. 뭔가 이 상황이 서로의 이해력이나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문제인 것처럼.

그리고 언제나 문제는 연이어 오는 것처럼, 그 순간에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선임 각성자들이 들어온다.

“어?”

가장 앞에 서서 오던 올리비아의 당황한 목소리의 뒤를,

“뭐야?! 내가 1번인데!”

유다연이 이상한 소리가 빽하고 들려오면서 어색하고 난감했던 분위기가 깨져나간다.

“오해를 할 법한 상황이라는 건 인정하는데. 그런 거 아니다.”

최대한 담담하게,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오해를 사전에 종식시켰다. 그렇지 않으면 저기서 눈을 빛내는 유다연을 비롯한 장난꾸러기들이 무슨 소리를 해댈지 짐작할 수도 없으니까.

“엘리아나는 옷을 일단 갈아입고 다시 와.”

“아! 네. 주인님.”

그리고 방을 나서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 서서 허공으로 손을 쑥 집어넣는다. 그러자 그녀의 팔이 사라진다. 마치 보이지 않는 자루 같은 것에 손을 넣은 것처럼. 그리고 턱 하고 초록색 가운 같은 아니, 로브 같은 걸 꺼내서 그대로 위에 입는다.

엘리아나의 행동 하나하나에 여성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엘리아나를 빤히 보다가 나를 보다가 다시 엘리아나가 움직이면 그녀에게 시선을 두는 식으로.

“아니, 잠깐만. 이건 나도 억울하다고. 엘리. 왜 그런 복장으로 온 거야?”

“주인님과 함께 밤을 보내기 위해서요.”

너무나 당당한 말에 나는 물론이고 흥미롭거나, 경계 가득한 눈으로 보던 이들이 얼굴에 경악이라는 감정이 샘솟는다.

물론 종말의 시간이 지나고 지구에 남은 인구가 10억보다 낮아져 천만 단위가 된 뒤에는 정조라는 관념이 희미해진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남자에 비해서 여자의 수가 많아져서 일부다처는 물론이고 다부다처 역시 은근히 보인다.

하지만 지금은 고작해야 멸망의 첫날.

아직은 지구인으로서 의식이 충만한 이들에게 엘리아나의 태연한 선언은 충격이었을 거다.

‘여자가 저렇게 말하는 게 같은 여자로서 받아들이기 힘들겠지. 내가 나서서…….’

[저기 마스터, 지금 완전히 핀트가 어긋났거든요. 그거 아니에요.]

뭐가?

[그쪽이 아닙니다.]

응?

“무슨 소리예요! 내가 첫 번째에요! 내가 정실이라고요!”

유다연이 내 의식을 아득하게 멀어지게 할 법한 소리를 당당하게 내뱉는다. 가슴을 불쑥 내밀면서 하는 말이지만, 아쉽게도 엘라에 비해서 내세울 게 없는 아담한 가슴이라 그 행색이 안쓰러울 지경이다.

특히나,

“우웅?”

엘리아나가 ‘난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얼굴로 팔을 이용해 가슴을 모으며 살포시 드러나게 내미는 행동 이후로는.

‘그만해라. 상대는 이미 그로기 상태라고.’

엘리아나는 태연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여자 하나하나와 눈을 맞췄다.

‘아니, 이게 무슨 분위기야!’

[그것 보세요. 제가 그쪽 아니라고 했죠?]

혼란하다. 혼란해. 저녁 어떻게 할 건지 정하려는 자리에서 뜬금없이 정실 전쟁(?)이 발발하다니.

짝짝!

손뼉을 쳐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제야 나를 보는 이들을 보면서 한숨을 시작으로 원래의 주제로 돌아왔다.

“다들 밥 먹어야지. 배고프지 않아? 다 잘 먹고 잘살자고 이러고 있는 건데?”

“아!”

‘배고프다.’라는 단어가 방아쇠를 당긴 것 같았다. 마치 잊고 있다가 떠오른 기억처럼 다들 무의식적으로 손이 배로 향한다.

“준비한 식자재는 모두 창고에 안전하게 보관 중이야. 문제는 사람이 많다는 거야. 우리가 요리를 해서 어떻게 해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고.”

1만 8천이다. 무려. 라면을 끓인다고 해도 1만 8천 개를 끓여야 한다. 라면이 그 정도나 준비되어 있는가를 떠나서, 이걸 여기 있는 사람들만으로 하려면 한도 끝도 없다.

“어떡할래?”

“요한님. 그게 왜 고민이에요?”

“응?”

“영지민으로 소속된 이들 중에 그 분야에 베테랑인 분들이 있잖아요.”

올리비아의 반문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라는 반발이 떠올랐다가 곧 깨달았다. 그녀가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

“보육 교사들이랑 자원 봉사자들 있잖아요.”

“네. 이미 아이들을 관리하고, 먹이고, 재우는 전문가들이요.”

“그러네. 참나. 바로 불러와. 밥부터 먹자.”

다행히도 정실 쟁탈전은 무사히 넘어간 것 같았다.

[글쎄요.]

“그리고 저도 선언하겠어요. 첫 번째는 제가 될 겁니다.”

평소 공과 사가 분명한 올리비아의 말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폭탄을 던져놓고 방을 나갔다.

“도른자. 도른자.”

쟤는 평소엔 멀쩡한데 가끔 저렇게 도른짓을 한 번씩 한다니까.

“이익!”

“흐음…….”

유다연과 엘리아나도 덩달아 불타올랐다.

미치겠네. 진짜.

『아포칼립스에 나만 장르가 이상하다?』

심행 퓨전판타지 소설

(주)조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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