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한국에서 직업 군인으로 살아가는 건 한때는 엄청난 각광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단순하게 군사 정권 시절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리 멀지 않은 시기, 그러니까 나라가 여러모로 어려워서 국가 부도에 이른 시기에 안정적인 직장 중 하나인 군인은 제법 인기 있는 직종이었다.
97년도부터 00년도까지 사관학교는 그 전에 비해서 높은 커트라인을 유지했고 그 후로도 장교는 제법 인기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것도 끝났지.’
하지만 그것도 옛말이 되었다. 세상은 점점 발전했고, 한국은 징병제가 아니라 모병제가 되었다. 그 뒤로도 군대의 규모는 축소되고 정예화되었다.
정예화.
이 단어가 문제였다. 정예화가 된다는 건 그동안 너무나 쉽게 진행하던 부조리가 사라진다는 뜻이었다. 즉, 해 먹으려면 머리가 엄청 좋아야 한다는 거다.
더욱이 정예화는 인력 감축의 다른 말이기도 하니, 진급이 어려워지고 어중간하게 전역하는 이들이 많이 생긴다.
기 대위 역시 그렇게 전역할 팔자였다. 육사 출신임에도 소령도 달지 못하고.
“그런데 기회가 왔지.”
누군가는 세상이 멸망한다고 한탄하고 불과 열흘 전의 세상을 그리워했지만, 기명환 대위는 그렇지 않았다. 지금 세상이 그에게는 천국이었다.
대위라는 직위도 이제는 의미가 없다. 고양과 파주를 아우르는 5천의 각성자. 본래 고양과 파주의 군인은 그 숫자의 몇 배는 되었지만, 초기에 많이 죽기도 했고 각성하지 못한 일반인은 처리되었다.
왜 처리했냐고?
기 대위를 비롯한 군벌이 이요한을 우습게 보는 건 사실이지만, 그가 가진 정보력까지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의문이지만, 이요한이 올린 다섯 개의 영상에 나온 내용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린스킨을 사냥하면 각성한다.
각성자는 클래스를 얻고, 클래스는 초능력자와 같은 능력을 선물한다.
클래스 랭크와 육체 랭크를 얻기 위해서는 카르마 포인트를 얻어야 한다.
악업과 선업에 대한 설명.
“그리고 마지막이…….”
[선악의 기준은 환경이나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변하기 마련이다. 다들 알겠지만.]
[과거에는 사람을 작은 뒤주에 가둬 죽이는 게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현대에서 그런 일을 벌이면 온갖 난리가 났을 거다.]
[또 어떤 시대에는 사람을 잘 죽이는 인간이 영웅으로 대우를 받고, 전쟁터에서 긴장하지 않고 충실히 사람을 멱을 따는 인간 믹서기를 훌륭한 인간으로 판단하던 시대도 있었다.]
[그래. 인간의 가치 판단은 이렇게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 시대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흔들린다.]
[하지만 카르마 시스템은 절대 그렇지 않다. 그들의 기준은 명확하고, 명징하며, 합리적이다.]
[그렇기에 카르마 시스템이 인정한 ‘악인’은 이런 시대에 변명할 가치가 없는 악인이 맞다.]
[그러니 당신이 만든 쉘터에서 그린스킨의 목을 직접 베었음에도 각성하지 못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둘 중 하나를 해라.]
[추방하거나. 아니면 죽이거나.]
기 대위는 머릿속에 각인된 것처럼 기억나는 가이아 게시판의 영상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이번에 각성하지 못한 소수의 군인은 자신이 각성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못하고 타고 있던 트럭을 타고 그대로 도주하려고 시도하는 놈들이 종종 있었다.
그렇기에 각성하지 못한 놈들은 특별히 개조된 군용 트럭이 배치된 곳에 모아놓고 관리 중이었다.
“아마 지금쯤 다 죽었겠지.”
기 대위는 문밖에 대기하면서 라이더의 대장인 조배달과 정 대령의 대화를 들었기에 확신할 수 있다.
거기서 얻는 카르마 포인트는 얼마 되지 않는다. 아깝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외부로 나가면 어디서 기어 나왔는지 끊임없이 달려드는 그린스킨이 널리고 널렸다.
“그리고 김포로 향하는 길에는 더 많겠지.”
일산 시내는 추진을 나가면서 겸사겸사 정리했다. 아니, 더 솔직하게는 추진 팀은 그린스킨을 사냥하기 위해서 추진을 나간다고 보는 게 맞다.
혼자서 속도가 나지 않는 개조한 군용 트럭을 운전하기 때문일까? 기 대위는 혼잣말을 해가며 무료한 시간을 달랬다. 아주 드물게 그와 휘하 라이더 부대 행렬의 차로 달려드는 그린스킨들이 있었지만,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숫자였다.
그러나 일산을 벗어나 김포 쪽으로 접어드는 순간,
“헛?!”
기명환 대위는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돋아 브레이크를 밟아버렸다. 자연스럽게 뒤따라오던 차들도 급정거할 수밖에 없었다.
― 대위님. 무슨 일입니까?
차에 설치된 무전기를 통해서 들려오는 부하의 목소리에 비로소 정신을 조금이나마 차린 그는,
“저, 저게 안 느껴져?”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고 자신이 느낀 것을 주어와 목적어도 없이 되물었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느끼지 못한 것이다.
“미, 미친!”
기 대위는 이대로 차를 돌리려고 했다. 어쩌면 그를 따르는 부하의 클래스가 일반적인 ‘라이더’이고, 그의 클래스는 ‘비스트 라이더’이기 때문에 느껴지는 차이일 수도 있다.
김포 중심가로 들어서지 않았음에도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성벽 주변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이고 농밀한 악의. 그가 만나고 죽였던 그린스킨은 어린아이로 보일 정도로 커다란 악의를 기 대위는 미약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다.
“도, 돌아간다!”
그는 후퇴를 결정했다. 여자를 밝히고, 권력 지향적인 인물이지만 기명환 대위의 타고난 생존 본능이 비스트 라이더라는 클래스를 얻으면서 기이할 정도로 발전했다.
그는 여기, 그러니까 그가 속한 군벌이 파악한 ‘허약한’ 이요한은 착각이라는 걸 이 순간 깨달았다.
다만,
― 대, 대위님!! 적입니다!
그 판단이 조금 늦어버려서 문제였다.
* * *
그린스킨이라는 종족에는 여러 ‘용도’의 종족들이 태어나곤 한다. 그것은 그린스킨의 차원을 다스리는 황제의 필요에 의해 태어나기도 하지만, 침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태어나기도 한다.
움부라리는 후자에 가깝게 탄생한 그린스킨이다. 주변 환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본능적으로 마기를 숨긴다. 그에 따라 그린스킨 중, 고블린을 연상케 할 정도로 작은 개체로 태어나지만, 그린스킨 중 누구도 움부라리를 무시하지 않는다.
움부라리의 부족 중 세 번째로 큰 부족의 족장 카케루는 이번 침공에 차출되었다. 총사령관인 하이퍼 고블린 주술사의 명령이라 따르긴 하지만 탐탁지 않았다.
인간은 식량이다. 식량을 사냥하는 것에 자신의 부족이 아니라, 자신까지 나서는 건 과했다. 그건 소를 잡는데 전차를 몰고 가는 거니까.
‘허?! 귀쟁이가? 여기에?!’
하지만 그의 생각은 지구라는 아름다운 행성에 도착하고부터 틀려먹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건 몸에 밴 습관이었다. 자연스러운. 태어나면서부터 본능적으로 새겨진.
분명히 자신이 얕보던 세상임에도 새로운 곳에 도착했을 때, 습관적으로 몸을 숨긴 것은.
그래서 그는 살아남았다. 제드가 보낸 다른 부족 출신의 움부라리를 비롯한 특별한 능력을 가진 그린스킨이 죽어 나갈 때, 도주할 수 있었다.
‘여기도 귀쟁이가 사는 곳인가?’
귀쟁이는 움부라리의 천적이라고 해도 좋았다. 태생이 강한 종족으로 태어나는 엘프는 은신과 기습을 하는 움부라리에게 완벽하게 상성을 이룬다. 자연의 사랑을 받은 그들이 부리는 정령 때문이다.
‘미친 고블린 새끼! 뭐?! 간단히 정찰만 하고 오라고?’
저딴 게 있는데 어떻게 ‘간단히’라는 말을 한단 말인가! 다시 만나면 반드시 고블린 놈의 귀를 잘라버릴 거다.
조심히 움직였다. 조심히. 순식간에 움부라리가 죽어 나간다. 귀쟁이가 부리는 정령 보고 놀라 숨는 건 의미가 없다. 정령이란 그런 존재니까.
‘나처럼 처음부터 숨어서 주변과 동화되어 있지 않았다면!’
정령들이 멀어진다. 그리고 그제야 카케루가 움직였다. 움부라리가 아닌 다른 특수 개체가 남아 있는 지금이 도망칠 수 있는 최적의 순간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괴물과 멀어진다. 그럴수록 본능이 안도하고 날카롭게 섰던 감각이 가라앉는 걸 느낀다.
그렇게 얼마나 멀어졌을까? 카케루의 눈에 특이한 것이 들어왔다.
‘저건 분명히 인간이 아니던가? 그런데 어떻게 동족의 힘을 품고 있는 거지?’
열둘의 인간. 식량에 불과한 것들이 기이할 정도로 농밀한 동족의 힘을 품고 있었다.
‘더군다나 저놈은 그 말 대가리 새끼의 힘을 품고 있잖은가? 그것도 꽤 농밀하게. 이것 봐라?’
마침 저 신기한 생명체들도 귀쟁이의 영지에서 멀어지는 중이었다. 그들의 뒤를 쫓아가다가 어느 정도 됐다 싶을 때, 모습을 드러냈다.
“흡?!”
“헛?!”
붙여넣기를 한 것처럼 뜬금없이 등장한 그린스킨의 모습에 놀란 인간들. 하지만 그것은 지금껏 먹이에 불과했던 인간들의 놀람과는 다른 쪽의 놀람이었다.
이 먹이들의 눈빛에는 공포가 없다. 마치 친근한 아군을 대하는 태도도 카케루의 흥미를 끌었다.
[너희는 뭐지? 인간인가?]
“고블린? 잘 됐네. 너라도 우릴 따라와라. 최악의 상황이 닥치면 도망칠 때 시간이라도 벌 수 있겠지.”
웃긴 건 먹이 주제에 명령을 한다는 거다. 그리고 고블린이라니? 카케루는 가뜩이나 자신을 이 지옥으로 보낸 하이퍼 고블린의 얼굴이 떠올랐다.
[먹잇감 주제에 명령?]
그게 앞에 나섰던 침식자의 최후였다. 침식자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난 그린스킨은 그대로인 것처럼 보였는데, ‘깡치’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침식자가 되기 전부터 제법 유명했던 칼잡이의 목이 잘려 나뒹굴었다.
“…!!!”
2초 정도 침묵 이후, 비로소 상황 파악이 됐다. 이런 상황은 이들에게 익숙했다. 왜냐하면, 그들을 이끌고 있는 ‘어르신’ 차대두가 가끔 전력을 발휘하면 저런 모습을 보이곤 했으니까.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특이하게 생긴 작은 그린스킨은 그들이 ‘고블린’이라고 부르는 허접한 개체가 아니라는 것 역시도 깨달았다.
“죄, 죄송합니……! 큭!”
카케루의 손이 날치의 목을 움켜쥔다.
[먼저 입을 열지 마라. 고깃덩어리야.]
그리고 움직여 잘린 목 때문에 바닥에 쓰러지는 깡치의 시체를 먹어치웠다. 그리고 이 기이한 먹이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알 수 있었다. 피와 살 그리고 뇌에 새겨진 기억을 거슬러가면서.
‘호오? 푸른 피께서 직접? 아니구나. 이건?! 통로를 열었구나. 아아! 주술! 그 빌어먹을 놈이?’
자신을 이 지옥으로 보내면서 ‘간단히’라는 얼토당토 않은 말을 꺼낸 하이퍼 고블린이 주술사라는 걸 떠올렸다.
‘애매하군. 이러면 동족인가? 먹잇감인가? 흠. 아!’
[일단 여기서 멀어진다.]
그리고 자신이 도주 중이었단 걸 깨닫는다. 그렇게 이요한의 영지에서 멀어지던 카케루와 열한 명의 침식자는 일산에서 내려오던 차량 행렬을 만나게 된다.
“어?! 고, 고블린님!”
비록 군용 트럭이지만, 그 숫자가 많았고 무엇보다 컸다. 저런 군용 트럭이라면 도주하는 데 힘을 쓰지 않고 편하고 빠르게 도망갈 수 있다. 무엇보다 주변의 시선을 끌지도 않을 거다.
고블린이라고 부른 깡치가 어떻게 됐는지 깨달은 날치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빠르게 그런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저것이 탈 것이다?]
물론 카케루는 앞서 깡치를 섭식하면서 어느 정도 지식이 생기긴 했다. 이 세상에는 특이한 것이 많다는 것도. 그게 날치를 살렸다.
[날 다시 한 번 고블린이라고 부르면 그 혀를 뽑아주지.]
“죄, 죄송합니다! 그,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움부라리 님이라고 부르도록.]
“예! 움부라리님. 저건 어떻게 할까요?”
마침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겠지만 멈춰버린 차량의 행렬을 보며 묻는 말에 카케루는 승낙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자신이 나섰다가 잘못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았기에.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침식자들이 멈추 서 있는 2.5톤과 5톤 군용 트럭 뛰어들었다.
“으악?!!”
“대, 대위님!! 적입니다!”
“미친! 괴물이잖아!”
행렬 중간에 있는 차문이 인간의 손에 뜯겨 날아가는 걸 보면서 군인들은 경악했다. 전원 라이더로 각성했음에도 다른 탈 것이 아니라 거대한 트럭만 운용하는 이들의 약점이 여기서 드러났다.
말이나 짐승과 다르게 거대한 군용 트럭은 방향 전환이 어렵고 측면에서 강력한 존재가 다가오는 것에도 쥐약이었다.
“비, 빌어먹을! 뭘 멍청히 보고 있어! 반격해야 할 거 아냐!”
기명환의 명령으로 침식자와 군벌의 각성자 간의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통신병! 본부에 연락해! 그리고 3호 차! 이요한 회장에게 도움 요청해! 그리고 밀집 대형으로!”
기명환은 지금 공격을 전담하고 있는 인간이면서 그린스킨을 닮은 것들보다 더 무서운 것이 주변에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어떤 위협이 곧 다가올 것만 같았다.
그래서 3호차, 이 행렬에서 유일하게 작고 빠른 레토나 차량을 이요한의 영지쪽으로 보낸 거다. 짐승을 능가하는 그의 생존 본능이 자신과 부하들이 살아남을 방법이 그것뿐이라고 알려왔기 때문에.
그러나,
고오오―.
기명환의 3호차가 대열을 이탈해 마력에 휩싸여 달리기도 전에,
“감히이!!”
기명환은 물론이고 침식자와 카케루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만큼 녹색(Green) 마력을 흩날리며 장내에 내려선 존재가 있었다.
“주인님의 땅을 침범한 더러운 것들이 도망치려 하느냐!”
평범한 세상이었다면 수십 억 팔로워를 거느렸을 미의 여신. 뾰족한 귀와 왼손에 움켜쥔 예술품 같은 활.
그리고 무엇보다 여인의 주변을 애워싸고 들끓는 네 가지 원소력.
“주인님 앞에서 치욕을 주다니! 버러지 같은 것들이!!”
그렇기에 그 미인이 ‘주인님’이라고 하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분노를 내뿜는 것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온 힘을 다해야 했기에.
엘리아나.
멸망한 세상의 하이엘프였으며, 지구에 뿌리를 내린 유일한 세계수의 사제이며, 이요한의 노예와 호위를 자처한 존재의 등장으로 전투는 물론이고 숨을 쉬는 행위조차 멈춰 버렸다.
『아포칼립스에 나만 장르가 이상하다?』
심행 퓨전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