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에 나만+장르가 이상하다-47화 (47/183)

47화

<엘리아나는 창피하다>

“주인님!!!”

갑자기 그 말을 남기고 씻은 듯이 사라진 엘리아나.

자신을 노예라고 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영지 속한 가신이기 때문일까? 엘리아나가 이대로 사라진 게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겠다.

더 명확히는 그녀가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가 느껴졌다.

“무슨 일이야? 이게?”

다만 그 순간에 나는 걱정에 걱정이 더해져서 바로 그 뒤를 따르지 못했다.

우선은 엘라에 대한 걱정이 먼저였다. 엘라가 저렇게 놀랄 정도의 강적인가? 하는 그런 종류의 걱정 말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쫄보 같지만, 엘라마저 당할 수 없는 적이라면 내 안위는 어떻게 되는 건가? 하는 걱정이 뒤를 따른다.

더욱이 이제 영지는 망하는 건가? 여기 모인 십만이 넘는 생존자는 어떻게 되는 거지? 같은 생각이 들었다가,

“뭐하냐. 진짜.”

밀려오는 한심함에 낯이 뜨거워졌다. 이게 뭔 병신 같은 짓인지.

그런데 이상하지? 성벽 너머를 나갈 생각, 딱 생각만 했는데도 손가락 끝이 파르르 떨린다.

“와 돌겠네. 진짜.”

“오빠.”

유다연이 조용히 다가와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면 손가락이 아니라, 팔까지 떨렸을 거다.

“트라우마? X까라 그래.”

작게 읊조리듯이 씹어 뱉은 그 말과 함께 숨을 크게 내쉬면서 상황을 정리했다.

“사제들 전부 모이라고 해. 레드 랭크 이상인 영지민도 모두.”

“네. 오빠!”

유다연이 걱정스럽게 그리고 조심히 잡고 있던 내 팔을 놓고 바로 달려 나갔다.

“파수꾼, 레인저 전원. 파이크병, 석궁병 절반. 북문으로 집합.”

다행이다.

병영을 미리 업그레이드 해놔서.

창병이 파이크병으로, 궁병이 석궁병으로 진화하면서 전투력이 상승했으니까.

북문.

두 번의 업그레이드를 거쳐 오랜지 랭크가 된 북쪽 성문이 활짝 열려있다. 성문 너머의 풍경을 가만히, 여러 감정이 뒤섞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기를 얼마,

“오빠!”

“보스!”

소란스럽게 등장한 지구의 의지의 사제들의 뒤로 병영에서 소환된 병력이 열을 맞춰 집합해 있다.

“출발.”

그렇게 노려보던 북문의 경계를 넘어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전투에 참여한 영지민 1,024명에 따라 영주의 모든 스탯이 일시적으로 10.24% 증가합니다.』

마치 내 용기를 응원이라도 하려는 것인 양 메시지가 나타난다.

“어라?! 이게 뭐야?”

“스탯이 50% 상승? 특수 스탯도 25%나?”

“어? 너도?”

영주 클래스 세부 카테고리가 열리면서 개화한 고유 능력 [만능]의 효과는 나뿐만 아니라, 함께 영지 밖으로 나온 영지민에도 적용됐다.

“오빠?”

“가자. 서둘러!”

영지 밖으로 나온 순간 거짓말처럼 떨림이 멈췄다. 마치 지금까지 트라우마는 착각이었다는 듯이.

그걸 체감할수록 내딛는 걸음은 더 빨라지고, 멀어진 엘리아나와 거리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그리고 우리는 곧 마주할 수 있었다.

세상의 종말로 달려가는 순간까지 세계수를 지켰던 하이 엘프 엘리아나의 진면목 중 하나를 볼 수 있었다. 그녀의 기분에 따라 엘리아나와 그 주변이 아지랑이처럼 일그러지는 풍경만으로도.

“허어? 저 언니 무서운 언니였네.”

평소 맨날 투덕대도 엘리아나가 걱정돼 열심히 달리던 유다연이 중얼거린 농담에 다들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엘리아나가 화가 난 게 보였다.

“그런데 엘리아나는 왜 저렇게 화가 난 거예요? 보니까 다 엘리아나보다 약해 보이는데?”

그러게.

“누가 알겠어. 저 언니 속을.”

일이 정리되면 좀 물어봐야겠다. 왜 저렇게 화가 난 건지.

알아서 조심해야지.

엄청 무섭네.

뭐? 왜?

* * *

본래 하이 엘프는 ‘분노’라는 감정이 진하지 않다.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났다. 인간의 상식에서 크게 화를 낼 일도 엘프는 작게 짜증을 내는 수준에서 그치고, 하이 엘프는 눈살을 찌푸리는 정도다.

그렇기에 하이 엘프의 삶에서 분노는 그리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그건 엘리아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진심으로 화를 낸 일은 그녀의 삶에서 단 한 번뿐이었다. 종말자, 공허라고 불리는 존재가 세계수를 노리고 자신의 숲에 쳐들어왔을 때였다.

오히려 멸망 직전에 그녀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런 걸 보면 하이 엘프의 삶에 얼마나 분노라는 감정이 익숙하지 않은 건지 미뤄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런 엘리아나가 지금은 누가 보더라도 ‘와, 개빡쳤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화를 내고 있다.

왜?

‘차라리 그 말을 하지 말걸! 주인님께 호언장담을 해놓고 한 시간도 안 됐는데!’

성벽 위에서 왠지 모르게 불안해하시는 주인님을 보기 힘들었다. 어쩌면 자만한 걸지도 모른다. 자신이 있는데, 두려울 게 뭐가 있냐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고.

그래서 그런 말을 했다. 자신이 지켜줄 거라고. 그리고 호기롭게 불과 바람의 중급 정령을 대거 소환해 적을 쓸어버렸다.

그리고 전장이 정리되어갈 때쯤.

무언가 아주 약하게 꺼림칙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걸 무시했다. 주인님 곁을 지켜야 했으니까.

마침 갑자기 영지민이 늘어나고 그린스킨이 쳐들어왔기에 엘리아나의 그런 판단과 다짐은 적절했다. 그의 주인인 이요한 역시 그녀의 말에 힘을 얻는 것처럼 보였고.

‘그랬는데! 그랬는데!!’

그 말을 하고 한 시간 아니, 30분도 지나지 않아서 찜찜하던 기운이 멀리서 마기와 함께 폭발하듯이 터져 나온 걸 알아차렸다.

인간이었다면 자신의 실수를 감추기 위해서 무시했겠지만, 하이 엘프인 엘리아나는 그러지 못했다. 애초에 그렇게 태어난 생명체니까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상하게 계속 신경 쓰이게 했던 기운이 들불처럼 일어나는 걸 확인하고 그게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이요한에게 닿는 공격인 줄 알았다.

그래서 ‘주인님!!’이라고 외치며 경고를 날렸는데, 오히려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래. 맞다.

창피해서 자리를 피하고 이 사단을 만든 놈을 족치러 온 거다. 인터넷 용어로 일명 빤스런이다.

“감히 버러지 같은 놈들이! 감히!!”

본래 조용하고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이 화가 나면 무서운 법이다. 그린 랭크 최상위에 이른 엘리아나라면 손가락 하나로 찍어죽일 수 있는 침식자를 귀기 서린 눈으로 노려보며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들고 다니던 대형 쇠뇌 볼트를 반으로 뚝 분질렀다.

그리고 그걸 그대로,

푸욱―, 푸욱!

겁을 먹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그린스킨 놈의 허벅지에 꽂아버렸다.

“Kee―aaaaaa!!!”

인간은 들을 수도 없고, 듣고 싶지도 않은 괴성을 내지르며 괴로워 하는 작은 크기의 그린스킨. 엘리아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곳에 있는 이들 중, 주인님의 영지에 조금이나마 해가 될 수 있는 존재는 이 작은 그린스킨뿐이라는 것을.

그래서 일단 도망가지 못하게 허벅지에 말뚝을 박아 넣었다. 단순히 반으로 잘린 볼트가 꽂힌 게 아니라, 그녀의 마력인 그린 랭크 마력을 담아 꽂은 커다란 볼트는 저 그린스킨의 도주를 차단하기 충분했다.

“너희가 남았구나. 추악한 인간이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죄책감이 없으니 말이다.”

그녀가 살던 세상에도 인간은 있었다. 그리고 인간의 종족 특성인지 모르겠지만, 선량한 인간이 있다면, 아주 입에 담기도 더러운 인간들도 있었다. 그런 인간은 항상, 반드시, 무조건 엘프 노예를 노리고 숲으로 쳐들어오곤 했다.

그때마다 역으로 추적해 인간을 말살했던 게 바로 엘리아나였다.

엘리아나는 지구에 있는 그 누구보다 인간을 잘 죽일 수 있다고 확신한다.

반대로 그렇기에 어떻게 해야 인간이 쉽게 죽지 않고 더 괴로울 수 있는지 역시 잘 안다.

“엔다이론.”

상급 물의 정령.

정령사의 역량에 따라 홍수를 일으킬 수도 있는 존재가 처음으로 지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입니다. 엘리아나.]

“저 더러운 것들을 죽지 않게 해줘.”

[이런. 또 누군가 엘프를 노린 겁니까?]

“아니. 그것보다 더 한 것. 일단 부탁해.”

[저만 믿으세요. 저들은 쉬이 죽지도, 정신을 잃을 수도 없을 테니까요.]

“좋아. 그럼 어디 손가락부터 시작할까? 아니면 발가락부터? 실라페. 샐리스트.”

바람의 중급 정령 실라페와 불의 중급 정령 샐리스트가 엘라 앞에 나타났다. 정령은 숙련되다 못해 정령의 사랑을 받는 하이 엘프의 분노에 고스란히 감화됐다.

불의 정령이 기명환의 오른쪽 다섯 발가락을 동시에 태웠다.

“크읍―! 크아아아아아아!!!”

바람의 정령이 오동태 중사의 왼쪽 손가락 다섯 개의 첫 번째 마디를 잘라냈다.

“컥! 끄으으읍!!”

불의 정령이 침식자 날치의 왼손 손가락을 태우고, 바람의 정령이 다른 침식자 노루의 오른쪽 손가락을 잘라냈다.

비명과 비명.

그리고 눈물 섞인 신음이 가득하게 변한 도로 한복판에 어울리지 않게 엘리아나의 미모는 더욱 고고하게 보였다.

엘리아나의 침묵 아래 자행된 고문의 여파로 손가락과 발가락이 모두 사라지고 바닥을 뒹굴며 버둥거리는 움직임만이 여기 모인 침식자와 각성자가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할 때 쯤,

“엘라아~!”

저 멀리 엘리아나의 주인인 이요한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후에야 어딘가 살짝 미친 것처럼 보였던 엘리아나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그리고 서서히 주변을 인지하면서 정신을 차렸다.

“엘라.”

그 사이 엘리아나의 주인인 이요한이 그녀 곁에 도착했다.

“주, 주인님.”

엘리아나는 민망했다. 부끄럽고 어딘가 숨고 싶었다. 아마 오늘 일은 엘프의 뛰어난 기억력에 따라서 삼천오백 년이 흘러도 이불을 찰 만큼 창피한 일이리라!

“도망친 그린스킨을 용케도 찾았네? 이걸 잡으려고 뛰쳐나간 거야?”

“예? 예예!”

엘리아나는 난생 처음으로 진실을 전부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행위를 해봤다.

“그나저나 저 특수 병과 그린스킨은 죽여도 되는데, 저기 살이 푸르딩딩하게 변한 놈들은 잠깐 빌려줄래? 영상만 찍고 돌려줄게.”

이요한은 그걸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엘리아나는 이요한의 고유 능력으로 소환된 존재였다. 그렇기에 엘리아나가 진실을 전부 이야기 하지 않았다는 걸 짐작할 텐데도 그는 아무렇지 않게 수긍하고 넘어갔다.

“네! 주인님 다 드릴게요!!”

침식자를 마치 물건처럼 쓰고 돌려주겠다고 대화를 나누는 주인과 가신을 보며,

“헥헥. 가끔 보면 저 오빠도 은근히 또라이라니까.”

급하게 서두른다고 숨을 헐떡이던 유다연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 지구의 의지의 사제들과 영지 소속의 각성자들이 하나둘 도착했다.

기명환이 어느새 멈춘 고통에 눈을 뜨고 주변을 인지했을 때, 그 주변에는 도저히 틈이 없을 만큼 빼곡하게 들어선 사람들이 있었다. 마치 인의 장벽처럼.

“자, 침식자에 대한 설명은 여기까지 하고, 이제 이것들과 인간을 구분하는 방법을 설명하지.”

그리고 그 장벽 안쪽에서 익숙한 남자가 마치 영상 촬영을 하는 것처럼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침식자로 의심되는 존재가 보이면 마력을 뿌리면 된다. 그냥 마력을 안개처럼 뿜어낸다고 생각해. 이렇게 말이지. 어때? 쉽지?”

쉽겠냐?!!

“어때? 마력에 닿은 이놈들의 모습이? 딱 봐도 인간이 아닌 것 같지?”

그린스킨을 닮은 피부를 보면서 저것들이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었다는 걸 깨닫고 허탈해하던 기명환은,

“그런데 넌 뭐냐?”

바닥에 쓰러진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요한 회장의 차가운 시선에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

‘여기 연놈들은 왜 죄다 눈깔이 저러냐고!’

살짝 지린 것도 같았다. 아니, 백퍼 지렸다.

『아포칼립스에 나만 장르가 이상하다?』

심행 퓨전판타지 소설

(주)조아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