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일어났니?>
올리비아는 영지를 침범한 침식자와 그린스킨의 머리 위에 뇌전과 화염의 마법을 때려부었다. 그녀의 손속은 조금의 자비나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플루비아 이그니스.”
하늘에서 쏟아지는 불의 비를 유지하면서,
“익투스 풀미니스.”
왼손을 휘저어 불의 비 사이로 떨어진 낙뢰가 꽃이 된다.
그녀는 조금 전에 말한 ‘올리비아 괜찮지 않아!’라는 그녀의 심리상태를 마녀의 마법에 담았다. 분노와 원망, 그리고 불길함과 초조함 같은 감정을 담아서.
무슨 소리냐고? 쉽게 설명하라고?
올리비아의 마법이 지독했다는 거다.
불의 비? 낙뢰의 꽃?
그린스킨을 빠르게 죽일 목적이라면 저런 논타겟팅 랜덤 범위 마법이 아니라, 익스플로전 열 발이나, 조금 무리해서 파이어스톰 같은 걸 날렸으면 지우개로 그림을 지우듯이 일정 범위의 그린스킨이 절명했을 거다.
불의 비와 낙뢰의 꽃은 대규모 전쟁에서 일종의 견제 마법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올리비아는 그걸 알면서도 불의 비를 내리고, 낙뢰의 꽃을 피워냈다.
왜?
“왜긴 뭐가 왜야! 그게 더 고통스러우니까아!!”
“뭐야? 올리비아 저거 또 왜저래? 하여튼, 요한님 주변에 정상인 여자들이 없다니까. 우리 요한님만 불쌍하지. 어휴.”
올리비아가 미쳐버렸든, 돌아버렸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호기롭게 덤빈 침식자들, 그리고 그들을 이끌 고 있는 차대두가 미쳐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으아아악! 뜨거워! 으악! 불! 불을 꺼줘!”
“으갸갸갸갸갹!!!!”
“컥! 사, 살려…….”
평소 왕처럼 군림하던 차대두는 무리의 가장 뒤쪽에서 그린스킨의 보호를 받고 있다가 불이 쏟아지자 그린스킨을 희생시키고 황급히 물러나서 이 난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그―래. 이―정도. 인―가?”
그나마 차대두에게 하이퍼 고블린 대주술사인 제스터가 바란 최소한의 조건을 달성한 셈이었다.
“알―았다.”
차대두의 몸에 빙의해 눈으로 확인한 영지의 정보와 분투하는 각성자의 강함을 가늠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크윽!”
무려 그린스킨의 총사령관을 몸에 빙의하는 일은 차대두의 예상보다 강한 반동을 주고, 그의 정신을 앗아갔다.
그리고 그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일어났니?”
그를 빤히 내려다보며 웃는 섬뜩한 여인이 있었다. 분명히 미인인데 어딘가 가까이 가면 위험할 것만 같은 여인이.
* * *
올리비아가 막 침식자와 전투로 카르마 포인트 파티를 연 그 시각.
이요한 어차피 이렇게 이동한 김에 처리하자는 생각으로 쉘터에 있던 생존자를 모두 모았다. 대략 300명은 넘는 인원이 모였다.
“모두. 카르마 포인트를 공개한다고 생각하도록.”
두려움에 섞인 눈으로 올려다 보는 눈빛들. 이제는 익숙하다. 하지만 그런 건 이제 이요한에겐 별 감흥도 주지 못했다. 애초에 이들을 모두 영지민으로 받을 것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각성자라면 모를까, 비각성자는 카르마 포인트를 확인하는 것만으로 선악을 구분할 수 있다.
악은 몰라도 이들 중에 ‘선’한 사람이 있는 게 이상한 거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거다. 이미 선업이 높은, 그러니까 착하고 선한 사람들은 한 달 전, 대규모 이동 때 지구의 의지의 힘으로 모두 옮겨 온 거 아니냐고.
‘전부는 아닐걸?’
이요한의 짐작대로 모든 선한 사람이 옮겨 온 건 아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당신이 선한 사람이라고 치자. 시스템도 인정할 정도로. 그렇다면 평소 성격이나 성품이 선한 사람이겠지? 그런데 당신과 동행한 연인이나 가족이 나쁜 사람은 아닌데, 그렇다고 시스템의 인정을 받을 만큼 선하지 않다면?
그런 상태에서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승낙만 하면 안전한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시스템이 인정할 만큼 선한 사람이 여기서 가족과 연인을 버리고 갈까?
그런 거다. 당신이 예상한 그 답처럼. 지구에 선한 사람이, 75억 인구 중, 시스템이 인정할 정도로 선한 사람이 고작 12만 밖에 안 될까? 아무리 내가 인간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건 너무 적다.
“너. 너. 너. 그리고 이쪽으로 네 명. 저쪽에 세 명. 저쪽에……. 다 오른쪽으로 열외.”
이요한이 하나둘 지적하면서 열외된 사람들은 모두 마이너스 카르마 포인트가 넘치는 사람들이다. 탁한 검은빛이 눈썹까지 내려온 사람들. 300명 남짓한 인원 중, 89명이나 된다.
“헌터. 루크.”
둘은 익숙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는 죽는다. 왜? 너희가 죽을만 하니까. 각성하지 않은 비각성자의 마이너스 카르마 포인트가 플러스 카르마 포인트의 몇 배가 넘으면 너희처럼 탁하고 보기 싫은 검은색으로 변하지.”
“……!!”
이요한의 선언에 지적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경악과 공포가 들불처럼 일어난다.
“그나저나 저렇게 많은 마이너스 카르마 포인트를 얻을 정도로 살인을 했을 리는 없는데. 그럼 김포는 연쇄살인범의 도시가 됐을 테니까. 그럼 뭐지? 이거?”
기이할 정도로 진한 마이너스 카르마에 이요한이 의아해하자,
“…강간.”
누군가 작게 읊조리듯이 대답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듣지 못했을 작은 목소리였지만, 옐로 랭크에 도달한 이요한의 귀는 그 작은 목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개쓰레기 새끼들. 망한 세상에서 꼭 그러고 싶냐?”
“영주 님?”
“일단 둬봐. 조금 있다가 죽이게. 도망가는 놈은 방금 너네 대장이 당했던 거 고스란히 돌려준다. 사지(四肢: 두 팔과 두 다리)가 무지(無肢: 팔다리 없음)가 되게 해줄 테니까.”
반발하려던 이들의 기세가 한없이 쪼그라든다. 그럴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이요한이 내뿜은 살기는 진짜였다.
“빌어먹을!”
이 망하가는 세상은 여자가 살기 참 힘든 세상이다.
“주인님.”
슬그머니 다가와 자신의 손을 잡는 엘라 덕분에 이요한은 화를 조금은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너. 너. 그쪽 모녀. 너. 너너너. 너. 그리고 거기 가족? 그래. 너희. 그리고…….”
이요한이 다시 인원을 추리기 시작했다. 도합 31명의 인원들. 어딘가 피폐하고 지친 이들이었고, 플러스 카르마가 마이너스 카르마보다 최소 2배가 되는 이들.
“당신들 중 원하는 사람은 나와 같이 안전한 내 영지로 간다. 사소한 테스트를 만족하면 각성할 수 있게 도움도 주지. 괴물에게 안전하고, 밤에 따뜻하고, 새벽에 이슬을 맞지 않고,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해.”
“…….”
기준이 너무 높았던 걸까? 이요한은 자신이 선택한 기준에 부합되는 사람이 고작 31명 뿐이라는 것에 조금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짧은 고민 끝에,
“당신, 그리고 그쪽 다섯, 또…….”
최소 플러스 카르마가 마이너스 카르마보다 1.5배 이상인 사람으로 기준을 낮췄다. 그 기준에도 통과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마이너스 카르마가 압도적으로 높지는 않아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당신들은 알아서 생존해. 관심 없으니까.”
그렇게 선언하고 영지로 데려갈 이들이 모인 곳으로 향했다.
“들어본 적 있는 사람도 있을 거야. 시스템이 ‘유토피아’라고 했던 곳이 바로 내 영지다. 영지민은 대략 12만 넘게 있고, 지금까지 괴물의 습격은 무수히 막아냈어. 여기까지가 제 영지이자 쉘터에 대한 소개야. 가고 싶은 분은 따라나서면 된다. 원치 않은 분은 남아서 저들과 엉켜 생존해도 좋아. 강권하진 않으니까.”
남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요한이 커트라인을 낮췄으니, 가족 중 한 명이 기준에 미치지 못해 생이별 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오, 오빠!”
남게 되는 이들 중, 어떤 여자가 영지민이 되는 남자를 애타게 부르는 일이 생기긴 했다.
“가족? 연인?”
“…모르는 사람입니다.”
남자는 뭔가 할 말은 많지만, 더러워서 입에 담기도 싫다는 얼굴로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망해가는 세상에도 아이들은 언제나 순진무구하며,
“저 언니가 이 오빠 차고, 각성자 아저씨랑 사귀었어요~.”
아이들의 순수함은 종종 잔인하기도 하다. 옛 연인을 부르던 여자는 떨리는 동공만큼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후회는 없고?”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법한 이요한이 그렇게 물었다. 자신의 입을 막고 떨고 있는 제법 미색이 보이는 여자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은 채로.
“네. 없습니다. 전혀.”
그런 이요한의 냉정하면서 어떻게 보면 대수롭지 않은 반응에 남자 역시 조금의 망설임이나 미련도 주지 않았다.
“그래. 하긴 우리 영지에도 여자는 많아. 남자보다 여자가 많다니까? 잘 생각했네. 가자.”
“네.”
뒤에서 애절하게 ‘오빠!’라고 부르는 소리를 이요한과 일행은 모두 무시했다. 쉘터를 벗어나기 무섭게 또 살가죽이 갈라지는 소리와 비명이 튀어나왔지만, 그것 역시 무시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흠. 걸어서 영지까지 갈 수 있는 멀쩡한 사람이 몇 안 되네?”
생각해보니 이들은 각성자가 아니다. 걸어서 부천과 김포 경계에 해당하는 곳에서 김포 북쪽 지역까지 거리는 걸어가 간다고 말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망하기 전의 세상이라고 해도 8시간은 쉬지 않고 걸어야 할 거리다.
정상적인 몸이었어도 힘든 일인데, 이들은 태반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여러 학대에 시달린 상태다.
“엘라. 가능해?”
“그럼요. 주인님. 어렵지 않아요.”
“설기는 가능하겠어? 80명이 넘는 사람을 태워도 되겠어?”
“먀아~!”
엘리아나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설기가 호기롭게 귀여운 울음을 내뱉는다.
“그럼 헌터하고 루크가 파수꾼을 데리고 다니다가 나중에 복귀해. 그럼 크게 늘어나지 않아서 엘리아나도 덜 힘들 거야.”
“네. 영주님.”
“네. 마스터.”
그린스킨이 아니라 사람의 피가 튄 상태 그대로 나타난 루크와 헌터가 파수꾼을 데리고 다시 파밍을 위해 이동한다.
그 사이 다시 덩치를 키운 설기 위로 생존자들이 하나둘 조심스럽게 올라타기 시작했다. 설기의 넓은 등 위에는,
“노에스. 실라이론.”
땅의 상급 정령이 제작한 커다란 안장 같은 게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위를 덮은 투명한 공기의 덮게는 바람의 상급 정령의 힘이다.
마치 투명하고 거대한 마차처럼 변한 설기는 그대로 몸을 일으켜 영지가 있는 곳을 향해 날아갔다.
각성자라고 해도 손가락 하나로 찍어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호랑이가 조금 전까지 이요한의 품에 안겨 식빵을 굽던 고양이었다는 것에서 시작해서, 하늘을 날아 이동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생존자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놀랄 일 투성이라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렇게 긴장할 것 없어. 편하게 앉아. 피곤하면 누워도 되고.”
그렇다고 진짜 눕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비각성자이면서 생존자인 이들의 눈에는 희망이 담겨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오는 불안의 틈 사이로 최소한 자신이 있던 곳보다는 나을 거라는 희망이.
그렇게 원정 파밍을 떠난 지 이틀째 되는 날, 폭군 권정현 아래서 죽을 때까지 고통받았을 생존자 72명이 새로운 영지민으로 합류했다.
『아포칼립스에 나만 장르가 이상하다?』
심행 퓨전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