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경고>
이후 파밍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헌터와 루크가 다시 함류한 이후 특별한 문제가 생기지 않고 파밍을 이어갔다. 생존자를 만나는 경우도 있었고, 각성자를 만나는 경우도 있었지만, 권정현처럼 시비를 털어오는 일은 없었다.
왜냐고?
애초에 200명이나 되는 각성자가 몰려다니는데, 거기다가 시비를 터는 것 자체가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이 말은 곧, 권정현이 그만큼 미친놈이라는 뜻이다.
습격 자체가 없는 건 아니었다. 종종 약탈자로 보이는 각성자 무리가 달려들 때도 있긴 했다. 그러니까 200명이 우르르 몰려 다닐 때가 아니라, 흩어져서 파밍에 열중할 때.
다만 그 허접한 습격자들에게는 불행하게도 그 주변에 다른 동료가 무지 많다는 거다. 왜 그런 코미디 영화 있잖은가. 술집에서 시비가 붙어서 한 놈을 패줬더니, 갑자기 “기계학과 다 모여!!”라는 소리에 근처 술집에서 같은 학과 점퍼를 입은 애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는.
영지민을 습격한 각성자와 영지민의 전투는 그것과 같았다. 멋도 모르고 공격을 감행한 것들은 결국 영지민의 마이너스 카르마 덩어리가 되었을 뿐이다.
그런 소소한 일이 벌어지면서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난 먼저 영지에 합류해도 좋은, 기준을 통과한 생존자들을 성벽 근처에 내려주고 막 북문으로 접근 중인 차량 행렬의 상공으로 이동해 중간 차량에 타고 있던 릴리 로즈를 비롯한 지구의 의지의 사제들을 설기의 등에 태웠다.
“그런데요~. 오라버니~. 좆배달? 그 멍청이는 왜 데려가는 거예요? 바로 죽이지 않고?”
“…발음에 주의하자. 릴리야. 그리고 조배달은 쓸데가 있어.”
“어디에요?”
“경고?”
“엥?”
자세한 건 설명하지 않았다. 이제 곧 영지가 코앞이니까.
“보스!!”
“마스터!”
“영주님!!”
…
지구의 의지의 사제과 남아 있던 각성자들이 영지로 들어서는 반기는 모습은 마치 며칠은 떨어져 있었던 사람들 같다. 반나절도 안 지났는데.
“좋은 사람들이네요. 그렇죠? 주인님?”
“그렇지. 뭐.”
딱히 싫은 건 아니지만, 좀 겸연쩍달까?
우리를 환영하는 이들을 뒤로 하고 권정현과 조배달 그리고 행정청의 전문 직원을 통한 범죄 이력 조회에서 탈락한 각성자와 비각성자를 영지 중앙으로 데리고 이동했다.
영지 중앙.
내성을 감싸고 있는 성벽 바깥. 내성으로 진입하는 웅장한 저택의 문 앞에 무릎이 꿇려진 빌런들.
“보스! 보스! 지금입니까? 지금할깝쇼?”
이곳까지 오면서 빌런들이 한 행동에 대해서 전해 들은 지구의 의지의 사제들은 한 명도 예외 없이 화를 냈다.
그리고 올리비아와 함께 마녀라는 클래스를 가진 것으로 알고 있는 캐롤라인 후드.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은 로빈후드랑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부터 한 조금 특이한 이 여성은 내가 빌런을 특별히 처리한다고 했을 때부터 자신이 돕겠다고 자원했다.
서양인치고는 작은 키에 귀염상인 캐롤라인이 한 손을 들고 팔짝팔짝 뛰면서 애원하듯 자원하는 행동에 고개를 끄덕였더니 아까부터 저걸 계속 묻는다.
“지금할깝쇼?!”
“어. 그래.”
“좋아요~. 자아~. 발버둥쳐보렴~. 너희를 닮은 십팔색깔 저주란다~.”
‘그건 도대체 무슨 저주냐?’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결과는 전혀 장난스럽지 않았다. 빌런으로 구분된, 진짜 그 누구라도 저절로 쌍욕을 박을 정도로 쓰레기인 놈들은 침을 질질 흘리고 충혈된 눈으로 비명을 지르며 몸을 버둥거렸다.
마치 소금이 왕창 닿은 미꾸라지들처럼.
그 모습을 바라보는 각성자들은 하나 같이 통쾌해했다. 성인들뿐만 아니라, 어린 나이에 각성한 이들조차도. 몇몇은 자리를 깔고 앉아 어디서 난 건지 과자 같은 걸 먹으면서 낄낄 댔다.
‘이게 이래도 되나? 단지 이 풍경만 보면 우리가 빌런 같은데?’
[마스터. 그거 기만이에요.]
‘알아. 그냥 해본 말이야. 지금부터 난 더 잔인한 놈이 될 건데 뭐.’
무려 18가지 저주를 동시에 받으면서 절대로 죽지 못하고 있는 73명의 빌런들.
그들의 모습을 그대로 난 가이아 게시판에 업로드했다.
아주 적나라하게 고통받는 모습을 온전하게 올렸다. 단순히 그것만 올린 게 아니라, 하나의 경고를 남겼다.
[자신을 희생해 남을 도우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명심하세요. 인간이 인간을 노예처럼 부리거나, 각성을 제한하는 것처럼 생존을 방해하면, 언젠가 우리가 찾아가서 저꼴을 만들어 놓을 겁니다. 제발 죽여달라는 말이 나오게.]
[불가능하다고요? 멀다? 내가 우리 영지에서 이놈이 머물던 곳까지 20km 거리를 얼마 만에 주파했을 것 같습니까? 정확하게 27초 걸렸습니다. 시속으로는 2,570km/h이며, 마하로는 2.1입니다. 그런 내가, 못 할 것 같습니까?]
[그러니.]
[착한 사마리아인은 바라지도 않으니, 악독한 세리(세금 징수관)가 되진 마세요. 언제 당신 앞에 내가, 우리가 나타날지 모르니.]
영상은 그렇게 간단하지만, 간단하지 않은 내용으로 끝났다. 댓글은 난장판이었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겠나. 어차피 이제 종말이 시작된 지 66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66일.
빌어먹을 이 날이 되면 앞서 본 그린스킨 특수병이 본격적으로 투입된다. 그리고 주술사와 함께 본격적으로 ‘군대’라고 할 수 있는 기승병이 나타난다.
그런데 왜 미리 알려주지 않았냐고?
언젠가도 말한 것 같은데. 난 예수나 부처처럼 성자가 아니다. 온 세상 사랑이 가득하길 바라지만, 그걸 내가 할 힘도 의지도 없다. 그저 내 주변에 있는 선한 사람들이 더 행복하게, 더 오래 살기를 바랄 뿐이다.
내가 미래를 안다는 걸 혹시라도 표현하는 순간 지금 내게 향하는 영지민을 제외한 이들이 보내는 플러스 카르마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악의와 질투가 자리할 거다.
왜 더 빨리 말해주지 읺았나.
왜 더 적극적으로 종말을 대비하지 않았나.
왜 나는 구해주지 않는가.
그럴 리가 없다고?
인간은 생각보다 더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이며, 훨씬 이기적인 존재다.
무엇보다,
“준비는 착실히 되고 있지?”
“네. 북한 쪽으로 향할 원정대는 준비 끝났어요.”
“그래. 플러스 카르마 포인트가 아니라, 마이너스 카르마 포인트를 주로 소비해야 하는 클래스 위주로 모았고?”
“네. 걱정 마세요. 오빠.”
“출발시켜.”
“네에~!”
그날이 되기 전에 최대한 대비해 놔야 한다. 우리 영지를 노리는 그 고블린 놈이 어떤 짓을 벌일지 짐작조차 못하겠으니.
“다른 클래스는 생산 계열 클래스 특별히 신경 썼지?”
“그럼요. 오빠가 특별히 챙기라고 했잖아요.”
각성자는 크게 전투 계열과 생산 계열로 나뉜다. 이게 게임이었단 생산 계열 각성자가 된 사람들은 뽑기 실패를 했다는 생각에 캐릭터를 지우도 다시 뽑기를 할 거다. 하지만 이건 게임과 닮았지만, 게임이 아니다.
인챈터. 대장장이. 재봉사. 연금술사. 요리사.
이름만 들어도 전투에 도움이 될 법한 생산 계열 각성자다. 하지만 내가 중요하다고 말한 생산 계열은 이들뿐만이 아니다.
농부. 광부. 어부. 원예가. 무두장인. 목수. 건축가.
웬만한 게임이라면 보조직업으로 하나 혹은 둘 정도를 그냥 추가로 줄 것 같은 클래스이지만, 오히려 아포칼립스이기에 이런 1차 직종의 각성자가 중요하다.
더욱이 내 영지는 온갖 자원을 영지 속성으로 포함하고 있다. 여러 광물이 매장된 광산과 석유가 나는 땅도 있고, 커피 농장과 온갖 과학적인 방법으로 조사해서 결정한 농지와 과수원도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양식장을 포함한 수산 자원과 나무와 약초와 허브 자생지도 영지에 포함되어 있다. 시스템의 인정을 받은 채로.
“레벨은?”
“아! 그거 신기하던데요? 그분들은 따로 그린스킨을 사냥하지 않아도 카르마 포인트가 쌓이더라고요? 특히 저 나무. 저 나무 때문에 받는 버프가 엄청나대요.”
유다연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나무’는 엘라가 심은 세계수다. 확실히 생산 계열 각성자 입장에서 생산율 75%와 성장률 25% 버프만으로도 엄청난 버프다. 그뿐만 아니라, 천급 처치 보상으로 생산율 100% 추가 버프가 적용된다.
클래스에 맞는 일, 농부는 작물을 키우고, 광부는 광물을 캐고, 어부는 고기를 잡고, 원예가는 약초를 키우고 채집하는 것만으로 특수 스탯이 상승하고 카르마 포인트를 얻는 게 생산 계열 각성자다.
단순히 여기까지 설명만 들으면 생산 계열 각성자가 개꿀인 것 같지만.
“이제는 저들도 알아요. 밖이 어떤 상태인지요. 이번에 원정대에 우리가 아니라 각성자를 대거 포함시켰잖아요. 오빠가.”
시일이 지날수록 오염되는 지구의 땅에서 생산 계열 각성자는 성장하기 어렵다. 그나마 높은 수준의 쉘터에 있다면 모를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곳 영지만큼 넓은 수준의 농경지를 가진 쉘터는 없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하잖아요. 맞다! 해씨 아저씨! 오빠가 좀 말려봐요. 대장간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해요! 끼니도 거르고! 막 라쿤 장인을 스승님이라고 부르면서!”
그걸 깨달은 생산 계열 각성자의 충성 스탯이 90을 넘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그래. 안 그래도 들리려고 했어.”
“그리고 또……. 아, 맞다. 엘라가 하는 교육이 2시간 후에 있어요.”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나 역시도 노력하고 있다. 엘라의 충성 스탯이 100이고, 그녀는 차원의 방랑자 출신이었던 가신이다. 사사(師事)라는 시스템을 통해 그녀의 클래스인 [세계수의 가지]가 가진 여러 일반 능력을 체득할 수 있다.
물론 쉽지 않았다. 이십여 일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엘픈나이트의 궁술조차 개화하지 못했지만, 실망하지 않는다. 애초에 내가 몸 쓰는 일에 재능이 있었다면, 회귀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영주 같은 클래스가 아니라, 전투 클래스로 각성했을 테니까.
영지는 쉴 새 없이 돌아간다. 생산 계열 각성자는 한눈 팔지 않고 매 순간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하고, 전투 계열 각성자는 대규모 원정을 나간다. 원정을 나가는 전투 계열 각성자들 뒤로 컨테이너 서너 개가 자동 운행하는 자동차처럼 따른다. 엘라가 소환한 땅의 정령이 하는 일이다.
이제는 그런 장면을 보는 게 익숙해질 무렵.
드디어 그린스킨이 지구를 침공하고 66일째 날이 밝았다.
『아포칼립스에 나만 장르가 이상하다?』
심행 퓨전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