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김칫국 드링킁>
낙뢰처럼 보였던 그것은 사실 번개 같은 게 아니었다. 신기에 이른 궁술과 정령왕의 친우라는 정령 친화력이 만나 탄생한 기예였다.
“와……. 킹직히 우리 필요 없는 거 아님?”
어리게 들리는 목소리가 적막을 깨트렸다. 혼잣말을 중얼거린 아이도 자신의 목소리에 놀라 반사적으로 입을 막았다.
“그렇지 않다.”
그러나 난 그걸 단언하듯 부인했다.
“엘라가 나서면 충분히 막을 수 있겠지. 그러나 그 다음은? 엘라의 존재를 적이 알아차리고 그에 대한 대비를 해서 더 강력한 적을 이끌고 온다면? 엘라가 그 적을 상대하느라 너희를 보호해 주지 못한다면?”
“그때가 돼서 부랴부랴 살려고 해봐야 소용없다. 지금부터라도 강해져라. 악착 같이 그린스킨을 잡고 카르마 포인트를 얻어서 조금이라도 더 강해져.”
“알았나?”
“예!!”
“네!!”
…
“그럼 적들이 엘라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게 더 맹렬히 그린스킨을 죽여.”
“와아아아!!”
“뒈져!!”
“죽어! 죽어!!”
…
엘라는 화살을 날리자마자 처음으로 내 옆이 아니라, 성벽 아래로 모습을 감췄다. 붉은 낙뢰가 주술사와 그 주변을 초토화시키고 영지민이 다시 악을 쓰며 그린스킨을 주살할 때가 돼서야,
“주인님.”
내 옆으로 은밀히 다가왔다.
“고생했어.”
“어렵지 않은 일이었어요.”
전장의 모두가 넋을 잃게 만든 공격을 해낸 엘리아나였으나, 그 신색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더 차분하게 가라앉은 모습이었다. 혐오하는 주술사를 치워 버려서 그런가?
“방금과 같은 공격으로는 저거 못 죽이는 거야?”
겁에 질린 돼지처럼 빼액빼액 소리를 지르며 물러나는 김종은을 가리키며 묻자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방금 공격으로는 목숨 두 개 정도……. 사라지게 할 수 있어요. 다만 그러면.”
“대비하겠지? 대비하면 더 알아차리게 될 거고? 누군가 침식자의 눈을 통해서 엿보는 것 같다고 했지?”
“네. 짐작이지만요.”
“흠.”
어차피 방금 말한 것처럼 엘리아나에게 일방적으로 맡겨둘 수는 없었다. 영지 각성자들도 강해져야 하니, 전투는 반드시 필요하다.
“아. 동기화가 멈췄어요. 주인님.”
주술사가 생명을 불사르기 전에 주술진을 파사의 힘이 담긴 뇌전과 화염으로 태워버려서일까? 주술이 멈추면서 차원 동기화가 멈췄다. 성벽 위에서도 느껴지던 한기가 사라졌다.
“그러네. 고생했어. 정령으로 위험한 것 같은 곳만 지원해줘. 네이선이 내려갈 거야.”
“아. 그거 쓰는 건가요? 뭐라고 했지? 물리 귀환 시스템?”
“응. 그것도 쓰고. 다른 것도. 간보지 않고 쓸어버려고.”
“그것도 좋은 것 같아요.”
그러는 사이 네이선을 비롯한 전사 계열 각성자들이 허리와 상의를 연결하는 벨트를 착용하고 성벽의 난간에 섰다. 액션 영화에서 와이어 액션을 위해서 바지에 착용하는 것 같은 장비와 닮았다. 차이점이라면 그건 사타구니가 아프게 아래로 입지만, 이건 상의에 착용하는 조끼처럼 생겼다는 것 정도?
“하강!!”
“하가앙!”
“유후!”
“와아아아!”
…
그런 와이어를 줄줄이 타고서 성벽 아래로 몸을 던진 각성자들과 그들을 따라 같이 내려가는 검방병과 파수꾼의 모습은 영화의 클라이막스에 등장하는 명장면을 연상케 했다.
그렇게 성벽 아래 떨어진 이들은 서로 겹치지 않게 점점 거리를 벌려가며 부채꼴 진형으로 퍼지면서 그린스킨을 덮쳤다.
위에서 쏟아지는 원거리 공격과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스치고 지나가는 놈들도 신경이 거슬리는데, 인간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굵은 줄이 움직임을 방해하는 것을 넘어 닿는 것만으로 그린스킨의 살을 태운다.
태운다. 화상을 입힌다는 게 중요하다.
엄밀히 따지면 태우는 게 아니라, 와이어를 빙자한 아이템 때문이다. [광산]에서 채집한 광물이 [대장간]을 거치면서 탄생한 아이템.
마기를 사용하는 적에게 지속적인 화상 피해와 기이할 정도의 장력과 강도를 가진 와이어. 저걸 와이어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과학을 접한 아티팩트를 제작할 수 있는 실력 있는 마도 장인 라쿤 대장장이는 괴랄한 물건을 만들어 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여러 그린스킨의 허벅지에 엉킨 와이어를 끌고 자유롭게 움직이거나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아무리 각성자라고 해도.
그러나 이과 출신 생존자들과 ‘인첸트’라는 이능을 다루는 라쿤이 반나절을 쑥덕거리더니 저런 걸 떡하니 만들어냈다.
‘뭐라더라? 당기는 힘을 모았다가 일시에 터트린다고 했나? 무슨 장력 축적?’
그래서 저렇게 그린스킨의 밀집 진형을 어그러트리면서도 너무 편하고 쉽게 적진으로 파고들어 마음껏 활개를 치고 다닐 수 있는 거다.
“으챠. 으챠.”
한참 전투가 진행 중일 때, 성벽 아래 계단에서 귀여운 기합이 들려온다.
“라쿤?”
“영하! 영주님 하이라는 뜻이라쿤!”
누가 그런 걸 알려준 거냐? 꼬맹이들이겠지. 보나마나.
“왜 여기까지 올라왔어? 전투가 한창인데?”
“내 첫 번째 제품이 시연 중이라는데 당연히 와보야 하는 거 아니겠냐쿤!”
“아니겠냐쿤은 반말 아니야?”
“아, 아니라쿤!”
“그러고보니까 그것도 반말인 것 같은데? 너 이자식.”
“오, 오……! 저것이 바로!”
말을 돌리며 짧은 다리로 와이어를 풀고 조일 수 있는 기계 앞으로 도도도 달려간다. 중간에 한 번 넘어질 뻔했지만, 라쿤에게 신경을 쓰고 있던 각성자들이 손을 뻗어 잡아줬다.
“이제는 어느 정도 즐기는 거 같지 않아?”
“어느 정도요? 저 라쿤은 처음부터 즐겼습니다. 귀여운 외모를 이용해서 주인님의 영지민을 부려먹다니……!”
엘라는 라쿤을 처음부터 탐탁하게 여기지 않긴 했다.
“그정도야?”
“조만간 제가 따로 시간을 내서 특.별.히 교육을 시키겠습니다. 주인님.”
“어. 그, 그래.”
특별히라는 단어에 유독 힘을 주는 엘라의 무시무시한 말에 얼른 시선을 전장으로 돌렸다.
“흠.”
전사 계열 각성자들이 모두 투입됐음에도 전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분명히 와이어는 좋은 물건이었지만, 차원 겹침으로 성벽 아래가 혹한의 대지가 된 것이 화상 효과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일까?
“그럼 이대로 버티는 수밖에 없나?”
어쩔 수 없다. 무엇보다 적을 적절하게 끊는 용도로 사용했던 고압 전류 필드가 사라진 게 전황을 유리하게 가져가지 못하는 이유였다.
“라쿤! 일단 전사 계열에게 무리하지 말고 돌아오라고 해!”
“오오! 내게 맡겨라쿤! 영주님!”
자신이 만든 기계를 써볼 기회를 줘서일까? 유독 신난 얼굴로 방방 뛰면서 옆에 있는 사람과 손과 몸짓을 해가며 말을 하더니,
“귀환이라쿤!!”
귀여운 목소리로 그렇게 외치고는 딱 봐도 뭔가 불길해 보이는 커다랗고 동그란 버튼을 힘껏 눌렀다.
“야하아호오오오!!”
“끼이이야아하아!”
…
누가 보면 여기가 에X랜드나 롯X월든 줄 알겠다. 각성자들은 성격에 따라서 클래스가 결정되는 건 아지만, 적성이나 성향이 어느 정도 반영된다. 그래서일까? 전사 계열 각성자들은 하나 같이 위험한 스릴을 즐긴다.
지금도 마치 저장된 장력과 탄성력이 발현되며 성벽 위로 대각선으로 쏘아지는 중인데도 하나 같이 환호하거나 즐기는 비명이다.
타탁. 탁. 타탁.
하나둘 성벽 중간을 밟으면서 능숙하게 성벽 위로 착지한다. 한바탕 신나게 칼을 해서인지 다들 붉게 상기된 볼과 거칠게 내쉬는 숨소리에 따라 어깨가 들썩였지만, 힘들다기보다 오히려 개운해 보였다.
“일단 아래로 내려가서 잠깐 쉬다가 와. 마력은 차치하더라도 체력은 보충해야지.”
“네!!”
이대로 하면 문제가 없겠는데? 저 이상한 와이어도 생각보다 잘 작동하고. 중간중간 내려가서 휘젓고 들어오면 원거리 계열 각성자들도 숨은 조금 돌릴 수 있을 것 같고.
음음.
괜찮을 듯.
그래.
* * *
김종은은 전장의 상황을 보면서도 믿기 힘들었다. 차라리 남한 정부와 싸워서 이렇게 밀렸다면 어느 정도 이해를 했을 거다. 하지만 고작 해야 하나의 지역 아닌가? 남한 전체가 아니라.
무엇보다 불과 몇백 미터 앞에 떨어진 붉은 낙뢰.
주술사의 생명력과 마기를 태워 진행중인 주술진은 주술사를 죽인다고 멈출 수 있는 게 아니다. 주술은 마법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붉은 낙뢰는 70% 정도 진행된 주술진에 있는 주술사를 죽이고 주술도 파괴해버렸다.
중국에서 내려온 침식자를 모두 규합하고 그린스킨을 통합하자마자 자신을 침식자로 만든 존재가 특별히 주술사 부대를 보내줬다. 차원 동기화 주술도 그때 알게 된 거고.
김종은이 괜히 자신의 압도적인 승리를 확신한 게 아니다. 자신보다 상위로 보이는 주술사들이 250명이나 나타났으니까.
“어쩐다. 어쩐다. 어쩐다.”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안절부절못하는 김종은을 지켜보는 시선들이 있었다. 성벽 위의 이요한이나 김종은 주변에 물러나 있던 침식자들도 그 시선 중 하나였지만,
“그 뇌전은 뭐였지? 설핏 정령의 향기가 나는 것도 같았는데?”
김종은과 전장, 그리고 이요한의 영지를 관찰하기 위해서 침식자의 눈을 빌린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제스터도 시선들의 주인 중 하나였다.
“이상하군. 이상하게 강해. 저 성벽이라는 것도 그냥 돌이 아닌 것 같고.”
마치 모니터를 통해서 음식을 보면 음식 냄새를 맡을 수 없는 것처럼, 침식자의 눈을 통해 보기 때문에 마력이나 정령력을 감지하지 못했지만, 오랜 세월을 대주술사로 살아오면서 가진 일종의 짬바로 파악중이었다.
“석재처럼 보이지만, 성재가 아니군. 저거. 마력철인가? 베리어가 없는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것 참.”
제스터는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영지를 보면서 억울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저 성이 탐났다.
“음. 마력철이라면. 성벽에 망자의 원혼을 새기면 더 방어하기 쉬우려나? 영지 중앙에는 끊없는 고통과 절망의 탐식을 동시에 새기고.”
제스터는 아직 점령은커녕 성벽 위의 인간 중 한 명도 사살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영지를 차지하기로 한 것처럼 어떻게 영지를 꾸밀지 상상하며 행복해했다. 이요한이 이걸 들었으면 ‘김칫국을 양재기로 처먹고 앉았네. 병신 새끼.’라고 했을 법한 모습이었다.
“흠.”
그러다가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린 제스터는 하이퍼 고블린 특유의 창백한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전장을 바라보다가 못마땅한 기색을 비쳤다.
“반푼이 놈들이 몸을 사리는구나! 감히 위대한 그린스킨의 세례를 받고도!”
그의 분노에 앉아 있던 의자와 테이블이 산산조각으로 흩어진다. 그리고 그 분노는 곧장 침식자에게 전해졌다.
“끄아아아악!!”
“아아아악!”
“컥! 컥!”
…
제스터가 분노의 감정을 내비치는 것과 동시에 400만에 가까운 침식자들이 하나 같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리고 고통으로 비명을 내지르며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침식자들의 머릿속에,
“인간을 죽이고, 영지를 내게 바쳐라.”
제스터의 의지가 각인된다.
피의 주인이 내린 명령이다. 그 피를 이식 받은 침식자가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당연히 해야만 하는 것처럼, 그 명령이 침식자의 피에, 뇌에 새겨졌다.
고통이 사라진 직후, 침식자들은 하나 같이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성벽을 향해 달려나갔다.
“끌끌끌. 그래야지. 이제 좀 볼만해지겠군.”
이요한이 이제는 괜찮겠다고 판단했던 전황이 급격히 기울어진 순간이다.
『아포칼립스에 나만 장르가 이상하다?』
심행 퓨전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