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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에 나만+장르가 이상하다-79화 (79/183)

79화

<심장을 찔렀다.>

굳이 열심히 활을 쏠 것도 아니면서 내가 북문 바로 위의 성벽에서 가만히 서서 전장을 내려다보는 건 한눈에 전장을 담기 위해서다.

또 보면서 느는 부분도 있다. 일종의 안목 같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성벽은 엄청 높았고, 이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영화에서 전투 씬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촬영한 것 같은 장면처럼 보이니까. 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내가 뭐 전쟁이 익숙하고 뭔가를 알아서 전장을 한눈에 담겠다는 게 아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을 때,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가장 확실하게 대응할 수 있는 엘라가 바로 옆에 있기 때문이다.

“엘라.”

지금처럼 말이다.

“네. 주인님. 전장의 분위기가 변했네요.”

일방적으로 용맹돌진하던 그린스킨의 움직임이 변한 게 이 높은 곳에서 전장을 한 눈에 담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왜지?”

“저기. 침식자들이 움직였어요. 우선은…….”

엘라는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김종은 주변을 가리키며 하나하나 설명했다. 김종은 주변에 있던 최소한의 호위 병력을 제외하고 침식자들 전원이 모두 그린스킨 틈으로 스며들었다는 것과 북한군 장교 복장을 한 이들이 그런 침식자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모습에 대해서.

“분위기가 좀 위험해 보이는데?”

“…그렇네요. 조심해야 해요. 주인님.”

엘라는 거기까지 말하고 언제든지 화살을 쏠 수 있도록 시위에 화살을 걸어놨다.

“음. 아니. 엘라는 최대한 숨겨보자. 돕더라도 중급 정령으로 지원해줘. 화살은 아까처럼 위험할 때만.”

“네. 주인님.”

하지만 난 이말을 하면서도 어쩌면 엘라를 감추는 게 오늘이 마지막이 될 거라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일단……. 그럼. 어디 나도. [어궁구(御弓具)], 출고.”

안전과 편의를 위해 창고에 보관한 무기 아이템을 처음 꺼냈다. 엘라의 활이 훨씬 좋은 활이다. 그리고 엘라는 나를 위해 기꺼이 그 활을 양보한다고도 했고.

하지만 저 활을 엘라의 손에 들려 있을 때 전력의 200%를 발휘한다. 나 같은 초짜에게는 지금 들고 있는 [어궁구]조차도 엄청 과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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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궁구(御弓具) [Rank: History]]

환조가 태조의 화살을 뽑아보고 이르길, 이는 범상한 사람이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 옐로 랭크 이상의 근력 필요.

1. 화살의 사거리와 공격력이 2배 상승합니다.

2. 25%의 명중률 보정이 상시 적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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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가 사용했다고 알려진 이성계의 활, 어궁구는 엘리아나에게 활을 배울 시기에 생성된 무기 아이템이었다. 등급은 역사(History) 등급이고.

이 활의 장점은 마력을 주입하지 않아도 긴 사거리와 파괴력이고, 단점은 활의 시위를 당기기 위해서 최소 옐로 랭크의 근력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뭐 난 이미 옐로 랭크 11이니까.’

근력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명중률 보정도 붙어 있으니, 더할나위 없이 내게 잘 어울리는 활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활을 꺼낸 이유?

그거야 당연히,

“잘하고 계세요. 주인님. 마력을 모은다고 생각하시면서 동시에 뜨거운 화염을 화살 안에 꼭꼭 눌러 담는다고 상상하세요.”

엘라에게 기예를 배우기 위함이다. 실전만큼 훌륭한 연습이 어디 있겠나? 그것도 이렇게 안전하게 연습할 수 있는 기회를 어떻게 놓쳐?

무엇보다,

[마스터께서는 마력이 남아도니까요. 본래는 영주도 전투에 적극 참여하기 때문에 마력을 올려둬야 하는 게 맞는데. 그동안은 마스터께서 나설 필요도 없었으니. 기이할 정도로 영지 방어를 쉽게 했어요? 그쵸?]

난 영지 소속 ‘각성자’ 중에서 가장 많은 마력을 지니고 있다. 옐로 랭크 17의 마력을.

콰앙!!

엘리아나의 말에 따라 발사한 화살은 화염 속성력이 불안하게 담겼는지 날아가다가 중간에 터져버렸다.

“잘 하셨어요.”

엘라는 내가 하는 무엇이든 덮어놓고 칭찬만 하는 스타일이라서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잘 했다고는 못 해도 나쁘지 않다 정도로 평가할 수 있을 법하다.

다시 활을 들고 격렬하게 움직이는 침식자를 겨냥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마력을 담고 그 마력에 속성력을 덧씌운다.

『충성도 최대인 가신에게 사사(師事) 받는 중입니다.』

『충성도 최대인 가신에게 사사(師事) 받는 중입니다.』

아까부터 귀찮게 짧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메시지였지만, 어쩌면 그다지 많은 연습을 하지 않았음에도 속성력까지 담은 활을 다치지 않고 무사히 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저것 때문일 거다.

처음 성소에서 엘라를 소환할 때 나타났던 메시지에 나온 것처럼.

활을 다루는 것과 속성력을 다루는 것.

아직 정령을 소환하지 못하기에 정령의 힘을 다루는 것까지는 무리라고 해도.

“금방 느시네요! 역시 주인님!”

역시나 사사라는 이 영주와 가신 사이의 관계 지속형 버프의 효과는 엘라도 감탄할 정도로 대단했다.

더욱이 이번에 지구의 의지가 준비한 아이템 덕분에 생성된 [문일지십]과 [신법]도 열심히 일하고 있을 거고.

점점 화살이 쏘아지는 간격은 짧아졌다. 그 말은 마력과 속성력을 화살에 담는 시간이 짧아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럴수록,

『충성도 최대인 가신에게 사사(師事) 받는 중입니다.』

『충성도 최대인 가신에게 사사(師事) 받는 중입니다.』

메시지가 귀를 어지럽히고,

『일반 능력의 씨앗이 심어졌습니다.』

처음 보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스으읍―. 텅! 스으읍―. 텅! 스으읍―. 텅! 스읍―. 텅! 스읍―. 텅! 습―. 텅! 습―. 텅!

하지만 일단 시위를 당기고 놓는 것에만 집중했다. 점차 화살을 빨라지고, 한호흡 반에 쏘던 화살을 반호흡만에 쏠 수 있게 됐다. 그렇게 반 호흡 만에 화살을 몇 발 쏘았을 때,

『일반 능력 [궁술]이 성공적으로 개화되었습니다.』

『특수 능력의 씨앗이 심어졌습니다.』

라는 메시지가 출력됐다. 그리고 나는 시위를 당기던 팔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특수…? 능력? 무슨 특수 능력? 그딴 게 있었어? 일반 능력이나 고유 능력과는 뭐가 다른데? 왜 나는 처음 듣지?

불과 몇 초 정도 멈춘 팔이었다. 무의식적으로 화살에 속성력을 담아 날리는 것만 반복했는데, 전선 유지에 제법 비중을 차지했던 건지 어느새 성벽 위로 올라오는 그린스킨의 수가 폭증했다.

스읏. 스걱―. 스스슷.

다행이라면 이미 성벽 위에는 바람의 중급 정령 수백 개체가 소환된 상태였기에 주제도 모르고 성벽 위로 올라온 그린스킨의 목이 잘려 나뒹굴었지만,

“불안한데.”

그건 어떤 불길함의 전조와 같았다. 다시 멈췄던 팔을 움직이고, 마력 회로에서 마력을 뽑아내 화살을 날리면서도 등 뒤에 냉장고 문을 열어놓은 것처럼 서늘한 기분의 불안함을 느껴야 했다.

“음?”

엘라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린 것도 그때였다.

“주인님. 돼지가 사라졌습니다.”

엘라의 말에 하마터면 나는 시위에 건 화살을 잘못 발사해서 성벽에 처박을 뻔했다.

“뭐?!”

그리고 반문을 하면서도 기존의 김종은이 타고 있던 가마가 있던 곳을 훑었다. 역시나 나보다 더 뛰어난 감지 능력을 가진 엘라가 실수할 리가 없지.

“이 새끼? 이거 어디 간 거야? 쫄아서 튀었나?”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장 희망적인 말을 꺼내 본다. 침식자들은 자신의 주인이 내린 명령을 거부할 수 없다. 지금 이곳을 노리는 총사령관은 진심이다.

어떻게 아냐고?

진짜로 강 건너에서 이쪽을 불구경하는 것처럼 보던 침식자 놈들이 모두 그린스킨 사이로 스며들어 전장을 지휘하기 시작했고, 그전에는 성대 따위는 터져도 좋다는 듯이 비명을 내질렀으니까.

지금도 보라고.

내가 침식자 놈들만 노리고 저격하고 있는데도 물러날 기미가 전혀 없잖은가.

침식자를 노리고 쏘아진 화살이 침식자의 마기에 닿으면서 화살에 담긴 속성력과 마력이 수류탄처럼 폭발하면서 주변의 그린스킨을 집어삼키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도망? 꿈도 못 꿀 일이다.

무엇보다,

“못 봤지? 도망가는 거?”

“네. 주인님. 갑자기 존재감 자체가 사라졌어요.”

엘라의 눈을 피해 도망갈 수 있는 존재는 아직 지구에 없다. 난 확신한다. 어쩌면 총사령관이라는 놈도 그녀의 기감이 걸리는 곳에 등장하면 죽일 수 있을 거다. 블루 랭크는 그런 랭크다.

“불길한데.”

“음.”

다시 한번 불길함을 입에 담았는데, 엘라가 뜻밖에도 반박을 하지 않는다. 그건 그녀도 불길하다는 뜻이다.

“일단 눈앞에 있는 것부터 치우자.”

“네. 주인님. 운다인.”

엘라는 조금 더 힘을 드러내기로 했다. 그 순간 전장에 오백 개체의 바람의 중급 정령들이 강림했다.

그린스킨의 목 수백 개가 후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 * *

이요한과 엘리아나가 찾고 있는 김종은은 어느 순간 자신이 우주에 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건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 우주와 같은 공간에 서 있었다.

“너구나. 주술사로 세례를 받은 가축이.”

“어떤 아새……! 음.”

어떤 아새끼네? 라고 하려던 김종은의 입이 저절로 다물어진다. 그리고 아랫도리에 실금을 할 정도로 그는 겁에 질렸다.

왜?

자신의 앞에 그린스킨 중 하나인 고블린이 있어서?

아니면 고블린이 인간의 말을 해서?

아니다.

주술사로 침식자가 되었기에 본능적으로 제스터가 김종은 본인과 비교해도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강한 존재라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자신을 가축이라고 부르는 것에도 어떤 대꾸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끄아아아아악!!”

그 순간 실금으로 흘러나온 누런 액체가 기분 나쁘다는 듯이 손을 흔드는 하이퍼 고블린 제스터의 손짓에 의해 액체가 불에 타 증발됐다.

소변이 불에 증발됐다는 건 무슨 뜻이겠나? 그 소변이 흘러나온 곳까지 불이 번졌다는 거지. 그래. 남자라면 절대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끼면서 김종은은 비로소 공포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다.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는 가축이라니. 쯧.”

동물을 싫어하는 사람이 반려동물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는 것처럼 제스터는 못마땅하다는 기색을 여실히 드러냈고, 그에 따라 스며나오는 살기에 김종은은 억지로 비명을 삼키고 참아내야 했다.

“잘 들어라. 모자란 가축놈아.”

“예, 예예!”

김종은은 그저 고개를 조아리고 무슨 말이든 다 알겠다고 대답하면서 이 자리를 ‘살아서’ 벗어나겠다는 생각 밖에는 없는 것 같았다.

“넌 곧 전장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곳으로 부를 수 있었던 것도 가축 네가 내 피를 받은 가축이면서 동시에 주술사였기 때문이니까. 그 시간이 매우 짧지. 자, 받아라.”

제스터가 던진 것이 툭 하고 두툼한 김종은의 배를 맞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은 뼈로 만든 단검이었다.

“다시 지구로 넘어가거든, 그 단검으로, 찔러라.”

“네. 네네.”

“가축 너의 심장을.”

“네. 네?”

“그리하면 넌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거다. 아프지 않고 자유로운 존재로.”

“아……!!”

김종은은 그 순간 제스터를 통해서 무언가를 보았다. 한없이 자유롭고 가볍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하겠습니다.”

어느새 진정한 김종은이 그렇게 대답했을 때, 그는 다시 악다구니가 일어나는 전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방금 보았던 것이 꿈이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그의 오른손에 섬뜩한 뼈로 만든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단검의 존재를 시각과 촉감으로 확인한 김종은은,

푹―.

조금도, 한치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아포칼립스에 나만 장르가 이상하다?』

심행 퓨전판타지 소설

(주)조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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