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경고! 경고!>
제스터가 가축이라고 부르는 침식자를 굳이 자신 앞에 불러 아끼는 주술 예장인 [채워지지 않는 공허]를 손에 쥐어준 이유는 하나였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패배의 원인을 찾기 위해서였다.
모든 인간이 강했다면, 그래서 그린스킨이 일방적으로 밀리는 상황이었다면 이해했을 거다. 하지만 지구 전체로 놓고 보면 대부분 그린스킨이 이기고 있다.
아니다.
이기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가축을 도축하고 곡식을 수확하듯이 일방적이었다. 만약 번식을 위해 암컷을 생포하고, 또 적당한 카르마 포인트 수거를 위해서 포획 속도를 조절하지 않았다면 지구는 벌써 끝장 났을 거다.
그렇기에 저 기이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영지는 제스터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곳이었다.
다시 주술 예장을 들려준 이야기로 돌아오면, [채워지지 않는 공허]는 심장을 찔린 사람의 생명력과 마력, 마기 등을 흡수해 레이스로 태어나게 한다. 그것도 돌연변이 레이스로.
침식자보다 영체에 가까운 레이스는 대주술사인 제스터에게 더 많은 감각을 공유할 수 있는 제물이다.
그리고 결국 제스터는 그동안 이해할 수 없는 패배의 원인을 찾았다.기분이 좋지 않았다.
“호오~? 어쩐지! 귀쟁이가 있었구나! 그것도 제법 강한!”
다만 의문이 풀렸음에도 기분은 조금도 좋지 않았다. 오히려 화가 났다. 그래서였다. 그가 카르마 포인트를 소모해가면서까지 경고를 전한 것은.
“감히 이런 개수작을! 기대하라. 쓸모없는 가축아. 내 귀쟁이와 함께 내 너를 장식품으로 만들 예정이니.”
그것도 감정이 가득 담겼으며, 두서라고는 1도 없는 전형적인 멍청한 그린스킨의 화법으로.
쨍―그랑! 와자자창!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한참 동안 집무실로 사용하는 공간에 있는 것들을 잘근잘근 부쉈다. 엉망이된 집무실을 나온 제스터는 한쪽 벽이 투명한 창으로 돼 검은 우주가 그대로 보이는 연구실로 들어왔다.
우주가 보이는 투명한 창 맞은편 벽에는 빼곡하게 여러 종류의 ‘종이’가 들어차 있었다. 어떤 것은 일반적인 종이였지만, 어떤 것은 동물의 가죽 위에 피로 글이 써진 것도 있었다.
“이것도 아니고. 이건 안 되고. 이건……, 역시 안 되겠군. 이것.”
하나씩 꺼내서 빠르게 훑고 바닥으로 버리는 작업을 이어간다. 그러다가 드물게,
“이 방법은……. 시도해 볼만한 가치가 있어.”
그의 마음에 드는 것이 생기면 한쪽으로 조심히 놓고 다시 거대한 책장을 뒤지는 걸 반복한다. 마치 미친 사람처럼.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본업인 차원 침공도 뒤로 하고 책장을 뒤지고, 또 오래된 고서를 찾던 제스터의 눈에 형형한 살기가 맺힌 것은 그가 인간의 영지에 귀쟁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지구 시간으로 나흘이 지난 후였다.
“찾았다. 방법.”
음흉하게, 그리고 약간은 미친처럼 풀린 눈으로 소리 없는 웃던 제스터가 몸을 일으켰다.
“주술 예장. 주술 예장부터 만들어야겠구나. 어디가 좋을까. 그래. 여기. 인구가 많고, 침식자도 많은 여기가 적당하겠구나.”
그의 눈은 중국과 인도를 오가며 반짝이고 있었다.
* * *
― 호오~? 어쩐지! 귀쟁이가 있었구나! 그것도 제법 강한!
― 감히 이런 개수작을! 기대하라. 쓸모없는 가축아. 내 귀쟁이와 함께 내 너를 장식품으로 만들 예정이니.
목소리만 들어도 존나 화가 났는데, 자신은 화가 나지 않은 척 쿨하게 하는 찐따 냄새가 물씬 풍기는 목소리였다.
“이 개 같은 거. 이거 선거 문자 같은 새끼네. 이거. 나도 하고 싶은 말이 개 많은데. 자기 할말만 보내고 통신을 끊어?”
“주인님.”
엘라가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걸 본 건 그때였다.
“왜 그래? 네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이리 안절부절이야? 잘했어. 잘 죽였어. 다음에 이 선거문자 같은 새끼 내려오면 그때는 아주 불로 태워서 죽여버려.”
“…네!”
내 말이 위로를 하기 위해 꾸며낸 말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걸 하이 엘프이면서 동시에 내게 종속된 존재인 엘라는 선명하게 느끼고 있을 거다. 그녀의 대답에 힘이 실린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리라.
“그것보다 저것들은 왜 냅뒀어?”
아직도 고요해진 전장 위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멍청하게 떠 있는 레이스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건 다연이를 비롯한 사제들이 사냥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플러스 카르마 포인트 부족하다고 칭얼댔거든요. 제가 사냥할까요? 주인님?”
“아니. 잘했어. 그럼……. 다시 공격 시작하자. 쓸어버려. 이제 엘라가 적극적으로 지원해서 위험할 일이 없을 거니까 아주 막 질러!”
“예쓰!”
“오예!!”
“좋아!”
“가즈아아아아아아!!”
성직자 계열 각성자들은 다시 연발 석궁을 쥐고 아직도 멍을 때리고 있는 레이스를 노렸다. 그리고 이미 와이어를 차고 성벽 아래로 내려가 봤던 전사 계열 각성자들은 미친 놈처럼 ‘가즈아아아아아!!’를 외치면서 다시 와이어를 차고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으엥? 으엥?! 아닌데! 이번에는 그거 아니라쿤! 이번에는 마지막에 완성한 마시멜로를 실험할 차례라쿤!!”
라쿤 대장장이의 말에,
“마시멜로가 아니라 미사일이겠지. 야, 마시멜로랑 미사일은 도저히 혼동할 수가 없을 정도로 까마득한 차이가 나는데, 그걸 어떻게 같이 쓰냐? 너는?”
내가 구박을 좀 해줬다. 이 쓸데없이 머리가 꽃밭이고 귀여운 외모의 생명체는 지금 이곳이 전장이고, 잘못하면 다 죽을 뻔했다는 걸 자각할 필요가 있다.
“마시멜로? 미사일?”
“…너 왜 입맛을 다셔? 대장간 용광로에서 마시멜로 구워먹기라도 했냐?”
“히큭?! 아, 아니라쿤! 히큭?!”
열심히 두 손을 흔들어가면서 부정하지만, 딱 봐도 몰래 뭘 먹다가 들킨 라쿤처럼 딸꾹질을 하는데 그게 먹히겠냐?
“…아니. 마시멜로는 어디서 난 건데? 내가 준비한 것 중에 마시멜로도 있었나?”
딱히 마시멜로를 대장간의 고로에서 구워먹었다고 뭐라고 하려는 건 아니다. 뭐, 내가 이렇게 대가리 깨지게 그린스킨을 때려잡는 것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니까.
“아무튼, 내가 그걸 뭐라고 하려는 게 아니라. 너. 여긴 전장이야. 눈 먼 화살에 맞을 수도 있다고. 그러니까 조심하라는 거야. 다치면 너만 손해라고.”
라쿤 장인은 내 말이 어느 부분이 충격이었는지, 마치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이 만든 가공된 아몬드를 먹은 다람쥐처럼 눈이 똥그래진 채로 얼어붙었다.
“아이템의 작동 여부보다 제가 다치지 않는 게 더 중요합니까?”
“당연하지? 그런데 너 말 끝에 ‘라쿤’ 안 한다?”
“오! 아니라쿤! 음음. 영주님의 너그러움에 이 라쿤, 감동했다라쿤!!”
전혀 위엄이 있지도, 그렇다고 위협적이도 않은 라쿤의 목소리는 성벽 전체에 전염된 것처럼 퍼진 함성에 묻혔지만.
“더 열심히 할 거라쿤!”
라쿤 장인에게는 그건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두 팔을 번쩍 들고 앙증맞은 주먹을 움켜쥐고 ‘더 열심히! 더 잘! 더! 더더!’ 이러는 라쿤 장인에게 내가 뭐라고 하겠냐.
‘그래. 이제는 마음대로 해라. 어휴.’
그냥 냅두기로 했다. 다만 안전은 걱정되니까,
“엘라야. 쟤 주변에 땅의 정령 좀 한 명만 붙여줘. 다치지 않게. 어휴.”
엘라아게 특별히 안전사고 예방을 부탁할 뿐이다.
“일단은 아까 못 본 메시지를 마저 확인해야하고 싶은데…….”
빌어먹을 전투가 한창이라는 게 문제다. 김종은의 측근은 김종은이 모두 레이스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면 일반적인 전쟁이라면 대장이 삽질하면 후퇴할 법도 한데,
“저것들은 그게 아니라는 게 문제지.”
방금 들렸던 목소리가 총사령관의 것이었는지, 아니면 침식을 일으킨 고위 그린스킨이었던 건지 목소리를 들은 이후부터 그린스킨과 침식자는 동료의 시체를 발판 삼아 성벽을 오르고 있었다. 맹목적으로, 저돌적으로 말이다.
“잠깐 확인하는 건 괜찮겠지? 응? 이상하게 이번 업적 보상은 아무런 변화가 없는 느낌이라서 궁금해 죽겠거든.”
“네. 저만 믿으세요. 주인님.”
나는 어째서인지 아까부터 다시 조용해진 반지의 에고에게 넌지시 물은 말이었는데……. 엉뚱하게 대답은 엘라에게서 나온다. 뭐, 엘라가 지켜준다고 했으니까.
이렇게 신체적 그리고 정신적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 보상이라면 아마도 카르마 포인트 일 거다. 그래서 더 기대를 품고 메시지 로그를 다시 띄웠다.
『압도적인 업적!』
『이해할 수 없는 시기에 등장한 특수 개체이며 돌연변이인 태터즈 호러 레이스(Tatters Horror Wraith)를 척살하셨습니다!』
『칭호 [접미사: 성스러운 투사]를 부여합니다.』
『특수 카르마 포인트 1천만 포인트를 지급합니다.』
『경고! 경고! 납득할 수 없는 존재가 허락되지 않은 이른 시기에 등장했습니다!』
『이에 따라 모든 보상에 대한 지급을 의혹이 풀릴 때까지 연기합니다!』
『차원을 관장하는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은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지구의 의지는 이 이른 존재의 소환에 대한 결백을 증명해야 합니다.』
『또한.』
『지구의 각성자 이요한은 카르마 시스템의 증거 수집 전용 보구를 착용하고 차원 침공전을 치러야 합니다.』
어…….
씨발.
어쩐지 보통 칭호를 얻거나, 지속형 버프를 얻거나, 하다못해 일반 능력이라도 얻으면―아이템은 생겨나지 않았으니까― 신체적 변화나 못해도 컨디션이라도 좋아질 법한데, 그대로더라고.
아니나 다를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뭐 일이 다 끝나니까 와서 오히려 피해자한테 결백을 증명하래? 여기가 무슨 영국 법정이야?
어쩐지 아까부터 반지 에고가 말이 없다. 정확하게는 레이스의 존재가 나타난 이후부터.
대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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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장용 녹화 구슬[Rank: Unknown]]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이 사용하는 저장용 녹화 장비 중 하나입니다.
두 눈 사이, 미간에 구슬을 접촉하면 녹화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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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탱볼 같이 생긴 투명한 공 하나가 내 손에 쥐여져 있었다.
“이거 괜찮은 건가?”
[괜찮습니다. 마스터.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이 제공하는 것은 공정합니다. 카르마 포인트와 같습니다.]
“어? 어.”
평소처럼 이것저것 물어보려고 했지만, 뭔가 기이하고 기묘한 기시감이 그걸 방해했다. 마치 튀어나가려는 나를 뒤에서 덜컥 잡아채는 것 같았다.
언젠가 이런 경험이 있었다. 분명히. 언제였지?
아! 그래.
평생 처음으로 클래식 공연에 가서 음악이 끊기길래 나도 모르게 끝난 줄 알고 박수를 칠 뻔했는데, 같이 간 친구 놈이 기겁하며 내 손을 잡아챌 때의 느낌. 그것과 비슷하다.
“그럼 이건 아무런 해가 없다는 거지? 내게?”
[그렇습니다. 마스터.]
그리고 난 두 번만에 어디가 이상한 건지 캐치했다. 말투. 반지의 에고(Ego)는 지구의 의지의 군주의 파편이다. 그래서 다나까가 아니라, 친근하고 가벼운 말투를 썼다.
지금처럼 딱딱하지 않고.
뭔가 엄청난 일이 벌어지려는 걸까?
“주인님?”
걱정스레 나를 보는 엘라의 눈을 마주하고서야 조금 정신이 돌아왔다. 오케이. 일단 이건 한낱 인간 각성자인 내가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약간은 말캉한 감촉의 구슬을 미간에 가져다 댔다. 더운 여름에 냉동실에서 막 꺼낸 얼음을 댄 것처럼 서늘한 감각이 느껴졌다 싶었는데 사라진다. 그리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부터 마스터께서 보시고 겪는 일들이 모두 녹화됩니다.]
‘흠. 너와의 대화도?’
[맞습니다. 물론 인격체이자 지성체인 마스터의 생각이나 속마음까지 녹화되는 건 아닙니다만, 제 목소리는 반드시 들어가게 될 겁니다.]
‘알았어.’
그 정도면 괜찮다. 안 그래도 내가 지구의 의지와 다른 차원과 맺은 계약에 불만이 많은 사람이다. 따지고 보면 이 녹화 구슬이라는 건 증거 수집을 위한 몰카 같은 거 아니겠나.
“엘라. 누구 다친 사람은 없어?”
“네. 주인님.”
“그래? 그럼 카르마 포인트나 벌어볼까?”
“네!”
그날의 전투는 기어이 다음 날 점심 무렵에서나야 끝이 보였다.
무려 천만이나 되는 그린스킨과 침식자 그리고 지금은 등장할 수 없는 언데드 영체인 레이스의 등장까지.
만으로 꼬박 30시간에 가까운 전투는 튼튼한 마철로 바뀐 철의 성벽에도 그 치열한 흔적을 남겨 놓았다.
반대로 기대한 것 이상의 아이템이 등장했고, 아이템을 가진 각성자의 수도 덩달아 증가하면서 전력이 높아졌다. 무엇보다 새롭게 각성한 각성자도 적지 않았다.
‘피해가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이 정도면 잘 막은 것을 넘어서 개이득인 부분인가?’
소화를 20%도 하지 못했을 정도로 엄청난 숫자의 그린스킨 시체를 내려다보면서 이번 전투의 손익을 따져보고 있었다.
‘맞네. 완전 이득이네. 기존보다 각성자 숫자가 거의 1.5배는 늘었으니까. 앞으로는 더 쉽게 막을 수 있겠지? 중국에 침식자가 몇 명이나 되려나? 아니지. 그전에 이번에 얻은 카르마 포인트부터 정리해야겠다.’
『아포칼립스에 나만 장르가 이상하다?』
심행 퓨전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