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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에 나만+장르가 이상하다-83화 (83/183)

83화

<짧은 유희가 고귀한 존재께 작은 흡족함이라도 전해지길 이 하찮은 고블린이 기원합니다.>

그린스킨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은 지 일주일이 지나서 다시 시작된 하루. 이른 아침부터 북쪽 성벽에 올라와서 대기 중이었다.

“오빠. 우리 원정이라도 갈까요?”

유다연이 다가와서 살갑게 물었다. 마치 저녁에 집밥 대신에 외식이라도 하자는 듯이.

“글쎄.”

평소라면 그런 유다연의 말에 의연하게 대처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정신이 없었다.

“오빠?”

“아. 음. 미안. 오늘 정신이 좀 없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설기가 며칠 전부터 깨어나질 않아.”

“예?! 어라! 그러고보니까 설기가 안 보였어요! 요 며칠! 어디 아파요? 제가 좀 볼까요?”

유다연의 호들갑에 조금이나마 우울하고 암울했던 기분이 조금 나아진다. 가슴에 훈풍이 돌기 시작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엘라가 다가와 등에 손을 얹는다.

그녀의 손을 타고 흐르는 흘러들어온 따뜻하면서 역설적이게 시원한 마력에 나도 모르게 찡그리고 있던 미간에 힘이 풀린다.

“하아. 진짜 X 같다. 사는 것도 진짜 뭐 같아. 멸망한 이후는 다를 줄 알았는데. 여기도 마찬가지야. 힘 있는 것들이 제대로 일을 ‘못’해서 가운데서 우리만 죽어난다.”

일주일 전에는 천만이나 되는 그린스킨과 침식자가 몰려오더니, 이제는 일주일 동안 그린스킨은 보이지도 않는다.

이것들이 말이야. 누굴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게임처럼 왜 젠이 안 되냐고 운영자한테 문의할 수도 없다. 오히려 안 나오면 좋은 거 아니냐고 할 테니까.

그런 상황에서 설기가 아프다. 아니, 아픈 건 아니다. 엘라의 말에 따르면 전투 경험이 쌓이면서 격을 찾아가는 중이라고 했다. 마치 진화를 앞둔 게임의 펫처럼 벌써 사흘 동안 꼼짝도 안 하고 몸을 웅크리고만 있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그냥 설기 옆에서 같이 누워서 설기를 안아주고 있고 싶지만, 지금은 평화롭던 세상이 아니고, 나도 그냥 회사원 중 하나가 아니라 영지 전체를 책임지는 사람이라서 해가 뜨기 전부터 성벽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스트레스 지수 같은 게 있다면 난 아마 새빨간 그래프가 차트 지붕을 꿰뚫고 있을 거다.

“아오. 돌겠네! 진짜!!”

지금의 상황이 단순히 무언가 내가 잘못해서 생긴 게 아니라, 노력하고 잘 했음에도 보상이 아니라 이렇게 답답한 상황을 맞이했다는 것에 짜증이 치밀어오른다.

“오빠. 들어가서 좀 쉬어요. 어차피 그린스킨 놈들도 안 오잖아요.”

“…….”

“맞습니다. 보스. 하루 정도는 푹 쉬셔도 됩니다.”

유다연과 올리비아를 시작으로 눈치를 보던 지구의 의지의 사제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러자. 나만 쉬는 건 좀 그렇고. 오늘은 영지 전체 쉬자. 성벽 경계는 ‘병사’들에게 시키고.”

“아! 좋아요!”

“보스. 그럼 오늘은 다 쉬게 하고, 음식도 조금 더 풀까요?”

“그래. 특히 애들은 먹고 싶은 게 있을 거야. 치킨이나 피자 같은 것들? 오늘은 주방에 부탁해서 평소처럼 스튜 말고 그런 것 좀 해달라고 해.”

식자재를 비축했다. 컨테이너가 4만 개였다고 했잖나. 그리고 이후 원정을 통해서도 많이 비축했다. 그런데 영지민의 숫자 단위가 달라졌다. 10만을 넘더니, 20만이 넘게 됐다.

그러니 비축한 식자재도 부족하다. 다행이라면 농장에서 비전투 계열 각성자인 ‘농부’나 ‘목동’으로 각성한 각성자들이 노력하고 있으니 줄어드는 속도가 완만해졌지만, 관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내성에 요리사를 추가로 고용했고, 요리사는 단순히 요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는 카르마 포인트로 소환된 존재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한 끼를 스튜로 대체할 수 있게 해줬다.

맛도 좋고, 영양과 포만감까지 가능한 신비한 스튜로.

문제는 아무리 여러 종류의 스튜를 준비한다고 해도 식사라는 과정에서 더 자극적이고 무언가를 씹고 뜯는 것도 음식을 먹는 것도 하나의 종류다.

“네! 다들 좋아하겠네요!”

“그래. 난 먼저 들어갈게.”

“네. 쉬세요! 보스.”

“제가 모시겠습니다. 주인님.”

엘라와 비척거리며 걸어서 어떻게 내성으로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그저 비척거리면서 걸음을 옮겨 침대로 갔다. 열 명이 누워도 충분하 침대의 중앙에 웅크리고 있는 설기를 끌어안았다.

고양이는 아니지만, 고양이를 닮은 설기도 특유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 따뜻한 온기에 저절로 눈이 감겼고, 그대로 까무룩 잠이 들었다.

“어라?”

그리고 어느 순간 저절로 눈이 떠졌다. 그건 뭔가 일어날 때가 돼서 일어난 느낌이 아니다. 어딘가 기묘하고 이상한 기분에 눈을 떴다.

일교차가 심한 봄에 깜빡하고 창문을 열고 자다가 추워서 깬 것처럼?

“오빠!!”

문을 부술 듯이 열고 들어오는 유다연의 모습에 이 섬뜩하고 서늘한 기분이 불길한 일에 대한 동물적인 본능이라는 걸 깨달았다.

“서, 성벽 아니, 저기 바깥에!”

섬뜩!

어두운 산에서 호랑이와 마주한 것처럼 머리가 쭈뼛 선다. 모골이 송연하다는 감각에 난 반사적으로 내성 입구로 순간 이동하면서,

“엘라!!”

엘라를 부르고 성벽으로 달려갔다.

* * *

“푸른 피의 고귀한 존재를 뵈어 영광입니다.”

이미 검은 뇌전이 내리쳤을 때부터 자세를 풀고 바닥에 넙죽 엎드린 제스터다. 그는 마치 지금 나타난 존재가 누군지 알고 있는 것처럼 예견하고 행동했다.

“네가 교활한 제스터라고 불린다는 그 고블린이냐?”

오체투지. 온몸을 최대한 바닥에 붙이는 굴욕적인 자세를 당연하다는 듯이 받은 존재는 당연한 소리겠지만, 그린스킨이었다.

어두운 초록색 피부의 거인.

제스터가 고블린이라서 작은 것을 고려하더라도 그의 덩치는 유독 컸다. 일전에 모인 다른 총사령관 중, 오거와 자이언트와 비교해도 크고 거대했다. 그래. 거대하다는 말이 딱 어울릴 거다.

“그래. 고전하고 있다지?”

“불충하게도 그렇습니다.”

“흠. 그래? 하긴 차원마다 특별한 존재가 있기 마련이지.”

“송구합니다.”

“송구할 게 뭐가 있나. 언제나 그렇듯 가축은 뛰어나 봐야 가축일 뿐인데.”

지구의 각성자와 인간을 ‘가축’이라고 말하는 존재이자, 총사령관인 제스터를 종 부리듯이 대하는 존재.

고귀한 푸른 피가 흐르는 존재라고 불리며 수천 억 그린스킨의 칭송과 경애를 받는 존재들 중 하나인 그는 그린스킨이 점령한 모든 차원을 다스리는 왕의 핏줄이다. 다른 차원에 태어났다면 차원의 존재 자체를 뒤흔들 영웅이라고 불리기 부족함이 없는 힘과 권능을 가졌으며, 나면서부터 강자로 태어난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왕의 핏줄 중, 제스터의 앞에 선 존재는 가자 어린 아들이다. 아직 성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존재이지만, 그래도 그는 총사령관 정도는 쉽게 목을 딸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래도 무식하게 혼자 해결하지 않고 도움을 요청한 것은 잘 했다. 합당했어.”

“그저 송구하고 송구할 뿐입니다.”

그런 강함을 지녔기에 본래라면 이런 시기에 나타날 수 없다. 차원의 법칙이 그러하다. 애초에 이런 존재가 처음부터 참여할 수 있다면 뭐하러 열심히 총사령관을 세워서 침공하나? 그냥 대뜸 쳐들어오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제스터의 기지 덕분이다. 제스터는 특수병으로 자신을 애먹인 인간의 영지를 견제하고 중국에 집중했다. 인구가 10억이 넘는 중국에서 인간을 찾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그린스킨에 명령해서 남자와 여자, 아이와 노인을 가리지 않고 모았다. 그렇게 모은 인간을 지독하게 고문했다. 인간의 원념은 훌륭한 주술 재료다. 더욱이 그런 것들이 백이나 천이 아니라, 십만, 백만을 넘어 천만 단위가 되면? 그것을 초과해서 억이 되면?

정확하게는 1억 1천만의 인간이 지독한 고통 속에서 죽어가면서 남긴 원념이 쌓이면 말이다.

이렇게 차원의 규칙을 비틀 수 있게 된다. 정학하게는 차원의 눈을 속일 수 있게 된다. 푸른 피의 고귀한 존재의 모습을 한 마리의 특별한 그린스킨으로 착각하도록.

그럼 왜 처음부터 이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냐고?

아깝잖은가. 1억 1천만의 인간의 피와 살을 먹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죽게 하는 게. 주술의 재료가 된 인간의 신체는 먹어도 그린스킨의 배고픔을 채우지 못하고, 언데드가 되지도 못한다. 그야말로 버리게 되는 셈이다.

70억이라는 인구에 비하면 1억이라는 숫자가 얼마 안 되는 것 같지만, 그린스킨의 입장에서는 자신들만 이 사기 계약에 묶여 있는 게 아니다. 그들 뒤를 이어 지구를 침공하기로 되어 있는 이들이 있다.

무엇보다,

“내가 얼마나 머물 수 있지?”

이렇게 눈속임은 금방 들통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단순히 눈속임으로 그저 그런 그린스킨으로 만들었지만, 고귀한 존재가 힘을 쓰기 시작하면 들통날 수밖에 없다. 그때부터는 시간 싸움이 된다.

“죄송합니다. 지구 시간으로 256초입니다.”

1억 1천의 인간을 버리고 얻은 시간이 고작 5분도 안 된다. 4분하고 16초. 이 얼마나 비효율의 극치란 말인가.

“무어. 가축을 상대로. 60초도 과분한 것을.”

“…….”

제스터는 그것을 오만하다 지적하지 않았다. 그저 더욱 깊숙이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이마가 짓눌리도록. 푸른 피라고 불리는 왕의 혈육은 그래도 되는 정도로 충분한 힘이 있기에.

어쩌면 강림하는 것만으로도 그 빌어먹을 영지는 무너질지도 모른다. 왕의 혈육에게는 권능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힘이 있으니까.

그러면 탐내던 영지가 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속았다는 걸 인정할 수 없는 제스터의 분노는 그런 걸 이제 고려하지 않았다.

“실로 당연하고 합당한 말씀이십니다.”

단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자신을 속인 저 같잖은 놈들의 땅이 흔적도 없이 소멸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그럼 언제 가면 될까?”

“고귀한 푸른 피의 존재께서 원하시는 언제든 가능합니다.”

“오! 좋군. 좋아. 그럼 바로 하지.”

“감읍할 따름입니다.”

“뭐 감읍까지야.”

그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덕분에 나도 아버지께 직접 선물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으니. 잘된 일이지.”

“아아. 고귀한 왕께 진상할 것이 저기 있습니까……?”

“왜 없어? 저기 가축이 신기한 놈이라며? 잡아다가 아버지께 보여드리면 재밌어 하실 걸? 그러다가 질리면 별미로 드실 거고.”

“오오!!”

제스터는 마치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는 듯이 감탄하며 감탄했다. 그 모습에 어깨가 한층 올라가는 초록색 거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시작하지.”

계획을 종용했다. 그에 감격했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은 제스터가,

“준비는 됐습니다. 고귀한 존재시여. 다만 지구라는 차원으로 진입하실 때, 하찮은 그린스킨으로 위장하는 것이기에 조금 불편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허락을 구했다.

“아버지를 위함인데, 그 정도 불편함 정도야. 문제 없으니, 진행하라.”

“예.”

제스터가 새롭게 준비한 주술 예장이 거인이 올라선 바닥의 피로 그려진 거대하고 섬세한 주술진에 스며들며 녹아내린다.

“짧은 유희가 고귀한 존재께 작은 흡족함이라도 전해지길 이 하찮은 고블린이 기원합니다.”

“그래. 다녀오지.”

그 순간 거대한 녹색 거인의 모습이 제스터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제스터는 끝까지 녹색 거인의 이름을 듣지 못했으며, 녹색 거인도 제스터에게 자신의 이름을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아포칼립스에 나만 장르가 이상하다?』

심행 퓨전판타지 소설

(주)조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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