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에 나만+장르가 이상하다-86화 (86/183)

86화

<파멸의 전조>

『세계수를 수호하는 기사. 엘븐나이츠 기사단을 소환하기 위해서는 카르마 포인트뿐만 아니라, 특정 조건이 필요합니다.』

『영지 내에 세계수의 존재를 확인합니다.』

『조건 만족. 엘븐나이츠 전원을 소환합니다.』

처음 엘리아나를 소환했을 때, 영화처럼 보았던 그 환상과 같은 다른 차원의 과거, 거기서 보았던 엘프들이다. 녹색 피와 먼지 그리고 피곤이 덕지덕지 붙은 각양각색의 엘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무기를 든 엘프뿐만 아니라, 몸이 작고 연약해 보이는 아이들도 엘븐나이츠 뒤에 소환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

이건 엘라의 물기 섞인 탄성이었고,

“아아!”

“아!”

이건 소환된 엘븐나이츠들의 탄식이었으며,

“어머?”

“어머!”

이건 아직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바람의 최상급 정령 실레스톤과 물의 최상급 정령 엘라스트라의 놀람이었다.

“이 타이밍에 이런 말하면 진짜 양아차라는 건 아는데. 회포는 좀 뒤에 풀고 저것부터 치울까? 뒤에 아이들은 성벽 아래로 내려가게 하고? 다치겠다.”

나도 안다. 이 감동적인 순간에 이런 식으로 끼어드는 건 선을 넘는 거라는 걸. 하지만 지금은 진짜 긴급상황이다.

“아! 네! 마기스테르! 저를 도와주세요! 그리고 엘븐나이츠 전원을 우리의 주인을 지켜주세요!”

“오랜만에 옛날 생각이 나는군요. 성녀님.”

“어머니의 축복이!”

엘븐나이츠는 미스릴 무구를 손에 쥐고 내 곁으로 모였다. 그들의 마력은 모두 노란색을 띠고 있었다. 즉, 이들은 기사단 숙소와 랭크를 공유하는 거다. 엘라처럼.

온갖 정령들이 분수처럼 솟아나 나와 엘븐나이츠들 주변을 빼곡히 채웠다. 그러는 사이에 화살을 든 엘라와 엘프치고는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마기스테르가 비슷하게 생긴 활을 든다.

“어라? 이거 왜 저랑 성녀님이랑 출력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겁니까?”

“그건 제가 주인님의 첫 번째 종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힘드신가요? 마기스테르?”

“하하. 성녀님. 저 마기스테르입니다. 세계수의 자식들뿐만 아니라, 성녀님이 태어났을 때도 똥기저귀를 갈아준 대스승.”

“저는 기저귀를 차지 않았어요. 마기스테르.”

“비유입니다. 비유. 이 정도 페널티는 아무것도 아니죠. 제가 보조하겠습니다. 세르비오. 아이들을 아래로 데려주고 와.”

“예. 대스승.”

마기스테르의 명령에 세르비오라고 불린 하늘색을 닮은 옅은 파란 머리카락의 남자 엘프가 땅의 정령을 소환해 아이들을 성벽 아래로 데리고 가는 게 보였다.

“그럼 제대로 한 번 해볼까요? 성녀님?”

마기스테르가 활을 다루는 건 확실히 특이했다. 엘라는 힘을 다해 시위를 당기고 놓고 하곤 했는데, 마기스테르는 너무 대충 시위를 당기고 놓는다. 무엇보다 빠르게 움직여 옐로는 물론이고 그린 랭크의 동체시력으로는 잔상도 잡을 수 없었던 괴물이 있는 쪽은 보지도 않으면서.

“어이쿠.”

그러면서도 가끔 날아오는 보이지 않는 공격은 또 기이한 자세와 이상한 기합으로 잘도 피한다. 한순간이지만, 그가 저런 행동을 할 때마다 긴박한 이곳의 분위기가 어딘가 허술해지면서 장르가 바뀌는 착각이 들곤 한다.

그런데 여기서 더 놀라운 건 생각보다 그의 견제가 날카롭다는 거다. 엘리아나가 소환한 최상급 정령의 공격보다 더 자주 포스트무르의 눈이 마기스테르에게 닿는 게 그 증거다.

그러는 사이에,

“━━, ━━━━, ━━━. ━━━━━━.”

엘라는 알아듣지 못할 단어를 마치 노래처럼 흥얼거렸다. 그럴수록 그녀가 당긴 시위에는 노란색, 푸른색, 초록색, 붉은색 기운이 모여들어 화살의 모양을 이뤄간다. 크게, 크게. 점점 길어진 화살은 당기고 있는 시위 쪽은 한정된 공간이기 때문인지 활 앞쪽으로 점점 늘어났다.

그리고 어느 순간,

“━━━━━━. 퓨어 퍼니시먼트.”

엘라의 입에서 주문 같은 노래가 끝나고 이제는 화살이라기 보다 창, 그것도 기병들이 사용했다는 거대한 기병창 크기가 된 화살이 쏘아진다.

아니, 아니다.

저건 쏘아지는 게 아니다.

공간을 넘었다.

콰득―!

분명히 화살이 살에 박히는 소리였는데, 무언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가 먼저 들리고,

우르르릉!

천둥이 뒤를 따른다.

그리고 천둥 뒤에 벼락이 떨어지는 것처럼 화살이 박힌 곳 주변으로 원소력이 분노한 벼락처럼 떨어진다.

불의 벼락이 떨어지고, 바람의 칼날이 단두대의 칼날처럼 떨어진다. 상처 안에서 땅의 원소가 피를 굳게 만들었고, 물의 원소력이 화살이 박힌 곳을 중심으로 내부를 휘젓는다.

“…크흠.”

맹렬하게 나와 엘라를 공격하려던 놈의 모습이 성벽에서 한참 멀어진 곳에 나타났다. 심장을 노린 것 같았는데, 그 순간에 피한 건지 어떻게 된 건지 어깨에 아직도 선연하고 찬연하며 살벌한 기운을 내뿜는 원소 화살을 달고서.

“가━축 놈━들━이…….”

마체 오래된 테이프가 늘어져서 들리는 기이한 소리처럼,

“━감━히!!!”

소리가 늘어지며 음파가 물리력을 가지고 성벽을 때렸다.

“왜 거기서 더 변신할 거리라도 남았나? 아직 힘을 숨기기라도 했어?”

그 불합리한 폭력에 이죽거리지 않고서는 속이 터져서 뒈질 것 같다. 저 빌어먹을 놈이 규칙을 어기고 나타나서 영지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걸 두 손 놓고 구경만 해야 하는데 입이라도 움직여야지!

그런 주제에 마치 제 놈이 피해자인 것처럼 행동하는 걸 보니까 진짜 고구마가 목구멍에 처박힌 답답함이 느껴진다.

“이 가축 놈이!! 흡!!”

가축 어쩌고 하려는 순간에 놈을 향해 날아간 화살이 수십 발이다. 그 전까지 나를 보호하고 있던 엘븐나이츠 전원이 날린 화살이 포함된 거다.

“빌어먹을 괴물 놈아. 가축에게 처맞은 넌 그럼 뭐냐? 곤충이냐? 네 어미는 그런 너를 낳고 미역국을 처먹다가 뒈졌겠구나. 억울해서.”

“…….”

입을 다물고 있는 놈에게서 흘러나오는 분노라는 감정이 무려 ‘형태’를 보인다. 너울거리는 탁한 남색 아지랑이.

그리고 그에 맞서는 엘라의 선명하고 찬연한 남색 마력.

둘이 곧 부딪칠 것 같았다. 그 여파로 성벽이 무너져도 할 말이 없으리라.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지지직―.

놈의 몸에,

“통신 장애?”

통신 장애나 간섭 현상이 나타났다. 잘 나오던 TV 화면이 지지직 거리면서 끊기는 것처럼 포르투무르의 모습이 끊어졌다가 다시 나타났다가를 반복한다.

“제스터어!!”

그러자 놈이 누군지 모를 존재의 이름을 외쳐 부른다. 거기에는 부탁이나 협력 같은 의미가 아니라, 일방적인 명령이었다.

그리고 이때는 몰랐지만, 놈의 이런 행동은 여러 폭풍을 몰고 오는 계기가 되었다.

* * *

제스터는 합리적인 고블린이다. 고블린과 합리적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지 않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제스터라는 그린스킨을 설명하기에 합리적이라는 단어만큼 어울리는 수식어가 없다.

그래서 아시아를 담당하는 그의 행보는 다른 그린스킨 총사령관들과는 다른 면모가 있다. 본능에 취해 인간을 닥치는 대로 잡아 먹거나, 암컷을 계획 없이 본능대로 탐해 결국 못쓰게 만드는―어디까지나 그린스킨의 관점에서― 다른 진영과 달리 계획적으로 죽이고 사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그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이해를 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어? 어어?”

작동과 고장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고장 난 로봇청소기 같달까?

실제로 그는 거의 반쯤은 고장 난 상태였다. 프로그램으로 치면 명령어가 충돌해서 먹통이 난 상태라고 할까?

제스터가 지구에 어울리지 않는 저 기이하고 강력한 영지를 인식한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무리를 했다. 그게 바로 특수병이 등장하지 않은 시기에 특수병을 대거 투입하는 것이었다.

역시나 보기 좋게 실패했고, 그것으로 제스터는 이 일이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존재가 하는 게 더 쉽고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그게 바로 고귀한 푸른 피를 이 땅에 소환한 이유였다.

단언컨대 제스터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한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과정을 반복할 거다.

그는 태생이 그런 고블린이었다. 본능에 따르는 그린스킨에서 이성과 합리를 찾는 돌연변이. 하지만 제스터는 자신이 돌연변이이기 때문에 고블린으로 태어나 총사령관까지 오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제스터에게 자신이 처한 이 상황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의 계산은 정확하다. 256초.

고귀한 피의 존재에게는 어림짐작으로 나온 것처럼 대답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주술은 마법과 다르다. 주술은 인과를 무시하는 기적이고 염원의 실현이다.

그렇기에 직관적으로 주술의 결과를 주술사는 짐작한다.

그렇게 나온 시간이 256초다.

처음 고귀한 존재가 그것의 영지에 강림하신 순간에는 역시나 제스터의 예상대로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그렇다. 256초는 온전히 전투를 시작한 이후부터의 시간이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처음부터 틀어졌다.

인간 영지의 주인으로 보이는 존재와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그가 설정한 256초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렇게 17초. 남은 시간 233초.

영지를 살피는 시간만으로 까먹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제스터는 걱정하지 않았다. 고귀한 피는 권능을 다룬다. 그들이 다루는 권능이라면 저 단단한 영지조차 한줌의 먼지가 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니까.

25초. 남은 시간 231초.

성벽 위에서 고귀한 존재에게 살기를 내뿜던 것이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인간이 아닌 인간을 닮은 존재가.

46초. 남은 시간 210초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 행세를 하고 인간처럼 마력을 사용하던 검과 방패를 든 기이한 존재를 가만히 확인하는 사이에 흐른 시간이었다.

이때도 괜찮았다. 아직 210초라는 시간이 남았고, 그 정도면 충분했으니까.

그리고 본격적으로 인간에게 손을 쓰는 순간,

핏―!!

제스터의 왼쪽 눈의 실핏줄이 터져나갔다.

그리고 그의 직관으로 표시되던 남은 시간이 싹둑 잘려나갔다.

48초. 남은 시간 208초 → 198초.

“왜?”

한쪽 시야가 녹색으로 물들었지만, 그건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주술사는 자신의 피로 주술진을 그리기도 하니, 피를 흘리는 것 정도는 문제가 아니다.

다만, 시간이 저렇게 깎였다는 것은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이 이쪽을 추적하는 시간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는 뜻이었다.

핏―!!

“어어?”

57초. 남은 시간 189 → 169초.

코에서 핏물이 흘러내린다. 그리고 다시 남은 시간이 깎여 나갔다. 이번에는 무려 20초다. 점점 깎여나가는 시간이 가속화된다는 건, 추적하려는 타깃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어떻게?”

71초. 남은 시간 155초 → 135초.

“컥?!”

고귀한 푸른 피의 존재와 귀쟁이와 전투가 첨예하게 이어지는 사이에 다시 시간이 줄어들면서 주술의 반동으로 제스터가 피를 토했다.

절반도 남지 않았는데, 문제는…….

“…이럴 수가!”

고귀한 존재가 심각한 상처를 입은 상태라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어떤 불길한 생각이 제스터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몸을 일으켜 서둘러 다급하게 추가적인 안배를 하기 시작했다.

마법사와 달리 주술사가 인과를 비틀어 결과를 만들어내는 이점이 있다면, 반대로 준비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단점이 있다.

그렇기에 제스터는 가장 빠르게, 준비할 수 있는 안배를 찾아냈다.

그리고 그때,

[제스터어!!!]

고귀한 존재의 강렬한 의지가 전해지고,

피잇―!

99초. 남은 시간 107 → 57초.

제스터의 두 눈과 코 그리고 귀에서 녹색 피가 꿀럭꿀럭 흘러나오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제 시간은 줄어 1분도 남지 않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건,

“아, 안 돼……!”

파멸의 전조였다.

『아포칼립스에 나만 장르가 이상하다?』

심행 퓨전판타지 소설

(주)조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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