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차원 시스템이 공지합니다.>
“왜?”
“아니. 어떻게?”
“아니, 왜?”
“어떻게?”
“어, 어어?”
…
남은 시간 56초. → 106초.
억지로 발동한, 동시에 효율이 극악인 주술이 발현되었음 확인하고,
“더, 더 준비를. 쿨럭!”
피를 토하면서 혹시 몰라 준비한 주술 예장을 모조리 꺼내 가슴팍을 적신 자신의 피로 주술진을 그리며 추가로 만약을 대비해 무언가를 준비하던 제스터는,
탱―. 탱탱.
손에 들고 있던 주술 예장을 놓치고야 말았다.
“아아.”
너무 수월하게 고귀한 그린스킨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오히려 고귀한 존재의 푸른 피를 보게 하다니? 이게 고작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인가?
남은 시간 62초. → 6초.
또 시간이 줄어들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고, 지금도 눈을 의심하고 있으며, 끝까지 부정했으나, 어느새 합리적인 고블린 제스터는 인정하고 있다.
고귀한 피가 흐르는 왕의 혈족이 여기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대폭 줄어든 시간에 제스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차라리 이렇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여기서 죽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하지만,
[제에스으터어어어!!!]
그의 생각과 달리 왕의 혈족은 여기서 만족하지 못했다.
저 외침은 고귀한 피를 가진 왕의 혈족의 자존심이 담겨 있었다. 여기서 역소환되게 두면 안 된다. 그럼 어떻게?
지금 당장 인간을 죽여서? 말도 안 된다. 주술은 마법이 아니다.
마법은 규칙에 마력을 더해 세상의 법칙을 즉각적으로 뒤흔든다.
반면 주술은 세상이 법칙을 ‘저울’로 본다. 동등한 가치를 한쪽에 올리고 원하는 대가를 다른 한쪽에 받는다.
그렇기에 마법과 달리 즉각적인 효과가 발현되는 게 아니다. 부적이나 주술 예장으로 즉각 발현되는 종류의 주술도 있지만, 그가 준비한 주술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상황이 이러니 저 명령을 무시해?
맞다. 무시하는 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이다.
그리고 제스터는 합리적인 고블린이지.
그러나,
“크윽!”
아무리 합리적인 고블린이라고 해도 제스터가 그린스킨인 이상 불가능하다. 영혼과 피에 새겨진 고귀한 피를 향한 절대적인 복종은 제스터가 가진 천성조차 억누른다.
“긴급―발현.”
그 찰나의 순간 제스터는 총사령관에 허투루 오른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이 자신의 모든 주술 예장을 소환했다. 공간이 열리고 나타난 주술 예정으로부터 농밀한 주술력이 흘러나온다.
그렇게 주술사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아직 완성하지 못한 귀문진이 주술력을 흘려보낸다.
남은 시간 6초. → 22초.
겨우 16초를 벌었다. 대주술사 제스터가 여러 차원을 거치며 제작하고 모은 주술 예장과 지구에서 살아 있는 인간 1억 7천을 녹여 추가로 제작한 주술 예장을 모두 때려 박아서.
“하악. 하악. 아, 안 되는……. 쿨럭!”
하지만 왕의 혈족이 원하는 것은 고작 이정도가 아니라는 게 전해진다. 22초로는 원하는 걸 쟁취할 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가.
적당한 주물이나 예장도 없는 상황. 남은 것은?
없다? 어쩔 수 없다?
그렇지 않다.
어떤 주술 예장보다 뛰어난 것이 아직 남았다.
무려 그린스킨 주제에 대주술사에 오른 특별하고 특이하고 기이하고 기괴한 제스터 자신의 피와 살 그리고 영혼이다.
주술사의 피와 살은 주술사의 강함에 비례해서 훌륭한 주술 촉매가 된다. 괜히 주술사가 급하면 자신의 피로 부적을 그리는 게 아니다.
그린스킨에서 총사령관의 위치를 낙점 받은 이들은 인간의 시스템으로 치면 블루 랭크의 강자들이다.
그리고 그린스킨이라는 종족의 한계를 넘어 대주술사가 된 제스터의 피와 살점이 녹아내릴수록 주술력은 엄청난 속도로 부푼다.
그리고 주술사의 영혼은 당연하겠지만, 피와 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주술 예장이다.
그 결과,
남은 시간 18초. → 75초.
푸른 피를 가진 고귀한 왕의 혈족은 더 지구에 머물 수 있었다.
하지만 주술사인 제스터가 주술력 덩어리가 되어 사라진 순간,
남은 시간 74초. → 14초.
몇 번의 방해 끝에 목표를 포착한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의 추적은 그런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 했다.
그 순간 존재를 남기지 못하고 소멸에 끝에 도달한 제스터의 영혼에,
[이, 이! 제스터!!!]
푸른 피의 존재가 내뱉는 겁에 질린 외침이 들려왔으나, 그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변화의 시작이고 발단이었다.
* * *
갑자기 물러나 제스터를 부르짖던 놈이 무너진 성벽 너머에서 충혈된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놈의 몸도 정상이 아니다. 엘라의 화살이 박힌 곳을 중심으로 상처가 더 크게 벌어졌다. 가뜩이나 커다란 덩치의 놈이기에 상처 너머의 광경이 보일 정도로.
“죽━인다! 가축━새끼!”
그러나 놈의 전투력은 조금도 감소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여전히 흉폭했고 여전히 폭급하다. 아까 ‘제에스으터어!!!’를 외친 이후 더 그런 것처럼 보였다.
그런 놈이 막 성벽 안쪽으로 손을 넣으려는 그때,
두두두두두―.
“영주 님의 적을 무찌르고 명예를 드높여라!”
“충―!”
땅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빠르게 가까워지는 기마대를 보며 서둘러 길을 텄다.
“전원 거차아아아아아앙!!”
“추우웅―!!”
기마대는 길이 나기 무섭게 순식간에 우리를 지나쳐 장판파의 장비처럼 오연히 서 있는 괴물을 들이 받았다.
기사단이 타고 있는 말은 보통의 말이 아니다. 마구간이라는 영지 건물에서 나온 무려 옐로 랭크의 말이다.
기사단은 또 어떻고? 그들도 하나하나 옐로 랭크의 병력이며 병영에서 소환되는 병사들과 달리 마력을 온전히 사용하는 전장에서 괴물과 같은 자들이 기사다.
무엇보다 기병창이라는 인간의 키보다 커다란 창을 타고 흐르는 유형화된 노란색 마력.
“검기(劍氣)? 아니지. 창기(槍氣)?”
무쇠를 종이 썰 듯이 썰어댄다는 무사 클래스의 어빌리티 중 하나인 창기다. 엑스퍼트 기사가 무엇을 뜻하는지 해답을 제시하는 광경이다.
그런 기사가 무려 200명이다. 옐로 랭크의 전마(戰馬)에 타고 일점돌파를 하는 기사단.
콰득―.
물론 한 번에 괴물 같은 놈을 무너트릴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가장 선두에 선 말과 기사가 곤죽이 됐다. 그러면서도 들고 있던 창기가 넘실대는 창은 놓지 않고 그대로 포스투무르의 다리에 박아넣는다.
콰득―. 콰콰콰―.
다음은 둘, 그 다음은 여섯이 놈의 거대한 주먹에 곤죽이 되었지만, 기사단은 멈추지 않는다. 아니, 으스러지는 토마토처럼 갈리는 기사단을 보면 멈추지 못 한다고 해도 뭐라고 못할 거다.
“죽어라!”
“더 빨리!”
“달려라!!”
하지만 기사단은 절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는 거대한 창으로 찌르거나 던지는 방법으로 차곡차곡 놈에게 데미지를 축적시켰다. 피하는 것?
“노에스!”
“노임!”
“노에스! 놈을 가둬!”
땅의 중급과 상급 정령들이 괴물 놈 주변의 땅을 변화시켰다. 발목까지 땅에 박힌 놈의 주변 땅은 주변 땅보다 수십, 수백 배는 단단해졌다. 저 괴물이라면 2초도 안 돼서 빠져 나올 수 있겠지만, 문제는 그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기사들을 곤죽내는데 집중하고 있다는 거다.
200명의 기사단이 갈려나가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해야 10초 남짓.
안타깝고 아깝지만, 기사단은 이것으로 그들의 몫을 충분하다 못해 넘치게 했다. 왜냐고?
“이, 이! 제스터!!!”
놈의 몸이 다시 노이즈가 낀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순간은 기다려온 엘라에게 그건 완벽한 기회였다.
스으읏.
만약 엘라의 옷이 스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엘라가 이 기회를 놓쳤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이전처럼 막대한 원소력이 폭발하지도 않았다.
그저 섬전(閃電).
그리고 공간을 격하고 날아든 화살은 거인과 비견될 정도로 커다란 괴물 놈의 덩치에 비해 너무 작아보였다.
하지만,
“끄럭?!”
각성자들의 공격에도 끄떡 없던 놈의 두개골을 두부처럼 파고들어 뇌를 곤죽으로 만들 정도의 힘이 있었다.
“이…것이……. 끝……이 아닐……. 것…이…….”
“당연히 끝이 아니지. 이 개자식아! 오는 족족 죽여주마.”
빌어먹을 개자식이 어디서 있는 척 하고 죽으려고. 그냥 뒈져라! 다음에는 나도 이번처럼 무력하지 않을 거니까.
괴물 놈이 죽고 숨이 멎어 거대한 시체가 되자마자,
쑤욱―.
미간에서 간질거리는 느낌과 사라졌던 저장 장치라고 하던 투명한 구술이 튀어나와 하늘로 승천하듯 올라가며 사라졌다.
“뭐야? 이게?”
그 의외의 사태에 벙져 아무 반응도 못하고 있기를 10여 초가 지났을 무렵,
『차원 시스템이 공지합니다.』
지구 전체와,
『허가되지 않은 경로에 의한 부당한 침입이 발생했음을 확인했습니다.』
아득한 차원 너머의 기괴한 행성에,
『이는 위대한 마법의 신이며 동시에 계약의 신의 이름에 위배되는 바, 사건의 전말을 알아내기까지 지구 시간으로 약 17일 동안 계약 진행을 멈추겠습니다.』
동시에 차원의 의지가 메시지로 출력되어 모두가 볼 수 있게 되었다. 지구와 스케빈저가 사는 차원 양쪽에서.
그리고 그 메시지와 함께 모든 것이 악의가 멈췄다. 그린스킨의 침공도, 지구의 방어도.
태양이 떠오르기 전에 그린스킨의 괴성에 잠에서 깨 시작하던 하루였다. 태양이 사라져도 쉬이 안심하지 못하고 불침번을 세우고서야 저물던 하루가.
“미친.”
누군가 저런 감탄사를 터트릴 정도로 고요하고 평화로운 오후의 모습이 되었다. 태양이 떠오르기 전의 괴성도, 밤이 되기 전에 찾아오던 피비린내도 없는 보통의 하루.
“어, 언제까지라고……?”
누군가는 그렇게 의문을 표하며 간절히 바랄 만큼 소중하고 안온한 침묵이고 고요가 찾아왔다.
『아포칼립스에 나만 장르가 이상하다?』
심행 퓨전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