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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에 나만+장르가 이상하다-90화 (90/183)

90화

<죽인다?>

누가 최초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저 누군가, 몇몇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움직임은 곧 하나의 흐름이 되었다.

신병 교육대 입소식에서 몇 사람이 먼저 단상으로 이동하면 익숙하지 않아도 군대에 입소할 사람이 모두 따라서 그곳으로 모이는 것처럼, 누가 선동하지 않았음에도 인구의 대이동은 그렇게 시작되고 이어졌다.

단순히 한국이라는 동방의 작은 나라에 국한된 움직임이 아니다. 그랬다면 인구의 대이동이라고 했을까?

무기로서 화약은 그 성능이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석유의 위력은 여전하다. 그 말은 곧 탈 것을 이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조배달 놈하고 그놈 부하들이 육공 트럭으로 그린스킨을 로드킬하고 다녔지.

그 말은 오토바이와 차 같은 육상 운송 수단은 물론이고, 헬리콥터와 비행기 같은 공중 운송 수단 역시도 정상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건 곧 살아남은 지구인들이 모두 움직일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 중간에 가다가 이 고요함이 끝나면 어쩌냐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이대로 있으면 어떻게든 결국 죽을 텐데, 시도라도 해봐야지.

무엇보다 시스템이 말하지 않았나. 최소 21일이 걸린다고.

그렇기에 종말로 들어서기 전, 돈과 권력을 쥐고 있던 이들은 그린스킨이 사라진 순간 누구보다 빠르게 행동했다. 전용기에 가족과 측근을 태우고 빠르게 한국으로 날아갔다. 마침 이요한이 있는 영지는 김포시 근처에 있다. 그리고 김포에는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공항이 있고.

세계에 있는 이들이 이렇게 움직였다? 그렇다면 한국 내에서는? 여러 수단을 통한 행렬이 이어졌다. 이전 대규모 원정에서 만나지 못한 지역에 있던 이들 모두와 이미 한 번 탈락했음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과 뭐가 되었든 유토피아 주변이 더 안전할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오는 이들까지.

아마도 그들은 중간에 자신에게 향하는 원정대와 마주치겠지만, 출발할 당시에는 그런 사정은 몰랐을 테니까. 인류의 이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토착한 건 가까운 김포에 사는 이들이 아니었다. 김포는 이미 샅샅이 수색했으니까.

투투투투투투―.

헬리콥터다. 그것도 군용인 커다란 헬리콥터를 타고 도착한 사람들이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영지로 내려서려던 헬리콥터는 발리스타 십여 대가 일제히 자신을 겨누자 화들짝 놀라서 성벽 밖에 땅에 내려섰다.

그리고 헬리콥터가 내려서기 무섭게 안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 어떻게 저렇게 많은 사람이 타고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숫자의 사람이 내렸다. 무기가 달려 있어야 하는 부분을 죄다 떼어내고 오로지 사람을 더 많이 싣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헬리콥터라고 해도 과하게 많다.

얼추 세어도 100명이 넘는다. 이럴 수 있을까?

“아아! 마력 오링이야! 뒈지겠어! 이 아이디어 낸 새끼 누구야?!”

“누구긴 너잖아. 네 능력으로 저 헬리콥터 가볍게 할 수 있다면서. 다 같이 가자고 했잖아!”

“처음 헬기를 띄울 때만 하면 되는 줄 알았지! 왜 영지 안쪽에 내리려고 해서!!”

내리자마자 이 난리 속에서도 제법 깔끔한 몰골을 한 남녀가 말다툼을 시작했다. 군용 헬리콥터라고 해도 어떻게 저렇게 많은 사람이 탔나 했더니, 각성자가 덕분인 것 같다.

“저기……. 지금 그렇게 싸울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어? 왜……?! 헉!”

“…….”

둘이 투덕대는 동안 100여 명이 내린 곳과 가장 가까운 성벽 위에 통일된 복장을 한 ‘병사’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그 병사들 앞에는 미의 화신이라고 불리는 엘프가 2D가 아니라 4D로 존재한다.

“침략? 싸우자?”

생각보다 많은 엘프 중 한 명이 앞에 나서며 그렇게 묻자,

“아뇨아뇨!”

“아닙니다!”

“아니에요!”

너도나도 나서서 부정하며 결백을 강조한다. 두 손과 고개를 좌우로 맹렬하게 흔들면서. 당연하겠지. 저들이 이곳에 가장 먼저 날아온 이유는 안전한 영지 안에서 살기 위해서니까.

“그렇다면 질서 있게 성문으로 이동해라. 허튼수작을 하면? 죽는다. 허튼수작 비슷한 거라도 하면? 죽는다. 내가 느끼기에 허튼수작이라고 느끼면? 죽는다. 아무튼, 죽는다.”

농담 같은 말이었는데, 말투에 진심이 꾹꾹 눌러 담겨서 누구도 웃지 못했다. 그저 땅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로 성문 쪽이라고 가리킨 곳을 향해 일렬로 걸었다. 경보하듯이 빠르게.

영지민이었고, 영지 안이었다면 성벽에서 성문까지 10분 안에 도착했겠지만, 이들은 영지민도 아니고, 이들이 밟고 있는 땅은 영지 안쪽도 아니다. 당연히 서두른다고 서둘러도 30분이 넘게 걸린다. 그것도 성문에 가까운 곳에 헬리콥터가 착륙해서 그 정도다.

어떻게 보면 성벽 위에서 가만히 이동하는 이들을 보는 엘프와 경비대는 기다림이 지루할 법도 한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엄중해진 분위기에 아래에서 걷는 이들은 함부로 고개도 들지 못했다.

그렇게 도착한 성문 앞에는,

“각성자는 이쪽, 비각성자는 저쪽. 줄 서. 새치기하면…….”

“죽…는다?”

“맞아. 그거야.”

엄청나게 아름다운 엘프 두 명이 누가 보더라도 편안해 보이는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다리를 까딱거리고 있었다. 죽는다는 말을 내뱉으면서.

“에, 엘프들에게 죽는다는 말이 대박 같은 밈인 걸까?”

“그런…가?”

두 엘프는 인간 두 명이 속닥대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반응하지 않는다. 철저하고 냉정하고 이성적인 얼굴을 하고 각각 각성자와 비각성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 사람 죽인 적 있어?”

그것도 첫 질문부터 충격적이며,

“예?!!”

질문을 받은 사람이 기겁해도 무죄인 질문을.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할 거다. 왜 행정청의 직원을 이용하지 않느냐고.

행정청 [직원]과 [전문직원]도 충분히 잘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곳에 최초로 나타난 생존자 그룹처럼 지금까지 생존한 각성자는 제법 힘을 좀 쓴다고 하는 각성자다.

그렇기에 전투 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행정청 직원보다 전투력이 높고 참과 거짓을 판별할 수 있는 엘프가 더 낫다. 더욱이 엘프가 1차로 거르고 나서 안으로 들어가면 행정청 직원들이 추가로 범죄 여부를 판별할 거다.

그리고 이런 방식이 더 빠르고 편리하다.

어느새 헬리콥터를 타고 왔던 이들 말고도 속속 새로운 사람들이 영지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형 버스를 타고 나타난 아랍계의 사람들이 영지 수속을 받았다.

그러다가,

“너. 열외.”

아랍계 남성 중 한 명을 콕 지목해서 열외시켰다. 머리에 검은색 터번을 쓰고 근육질의 몸매가 드러날 정도로 여기저기 찢어진 흰색 싸웁―아랍의 전통 의상으로 나풀거리는 드레스처럼 된 옷―을 걸친 남자였다.

“나? 나 말이오?”

“이놈 조회해봐.”

그리고 뒤쪽, 성문 안쪽, 명확하게 영지 영역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행정청 직원 중 하나인 호랑이 수인을 향해 명령했다. 엘프의 명령에 호랑이 수인은 허공을 응시하며 무언가를 확인하는 것처럼 손가락을 움직이더니,

“이름 아드난 모하메드 알하심 알마울리. 폭탄 테러 교사 17건. 살인, 강간, 납치, 고문, 식인 등을 비롯한 강력 범죄 227건.”

“미친.”

누군가 나열된 남자의 죄목을 듣고는 그렇게 헛구역질 비슷한 걸 하며 욕지거리를 씹어뱉었다. 그래도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90% 이상의 사람이 같은 표정이었으니까.

그리고 나머지 10%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같은 버스를 타고 온 아랍인들이었다.

“그럴 리가? 이 사람 이름은 아드난 모사예요. 그런 긴 이름을 가진 남자가 아니고, 착실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변명을 위해 나선 중년의 남자를,

“움직이지 마라.”

아드난 모하메드 알하심 알마울리라는 긴 이름을 가진 테러범이 붙잡아 목에 날카로운 칼을 겨눴다.

얼핏 보면 제법 위협적인 모습이었지만,

스콱―. 푸슈슈슛!

여기 모여 있는 이들 중 30%가 각성자고, 성문 앞에서 검문하던 이들은 무려 엘븐나이츠다. 각성조차 못한 테러범 따위의 위협은 짜증나게 하는 모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허튼짓 하면 죽는다고 했지?”

같은 민족이자 자신을 비호한 아랍인을 인질로 삼고 위협하던 손목을 자른 아름다운 외모의 엘프 여인이 귀찮다는 듯이 짜증을 내며 다가온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비각성자는 물론이고 각성자조차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저 일반인이 일반인의 목에 칼을 겨눈 순간, 칼을 쥔 손목이 깔끔하게 잘려 바닥에 떨어지고, 인질로 잡혀 있던 남자의 얼굴이 피범벅이 되었다.

어? 하고 인질을 걱정한 순간에 어? 하고 테러범의 손목이 잘린 셈이다.

“샐리스트.”

불의 중급 정령이 손바닥 만한 종을 알 수 없는 불꽃 새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운다인.”

반대로 손바닥 만한 인어의 모습으로 물의 중급 정령이 나타났다.

“부탁해.”

‘누구’인 주어와 ‘무엇을’에 해당하는 목적어가 빠진 말이었지만, 정령과 영혼이 이어진 엘프이기에 긴 설명이 필요 없었다.

불의 중급 정령인 샐리스트는 잘린 팔에 고통으로 울부짖는 테러범 놈의 손목을 불로 지져 버렸다.

“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더 큰 고통을 주려는 목적인 것처럼 천천히.

반면에 물의 중급 정령 운다인은 주변에 피를 모두 빨아들여 깨끗하게 했다. 당연히 얼굴에 잔뜩 피가 튄 중년의 남자도 깨끗해졌다.

“아직 죽이지 않은 이유는 너는 특별히 조금 더 고통을 주고 싶어서야. 네 죄목을 보니까. 어디 보자.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한 일주일만 더 살다가 죽자. 어때?”

엘븐나이츠 소속의 엘프가 이러는 이유는 당연히 이요한의 지시 때문이다. 이요한은 지구라는 세상에 대해서 짧게 설명했다. 왕이 없는 세상. 신분제가 거의 없는 세상. 그래서 자유라는 이름으로 방종에 취해 절대로 용서 못할짓을 해대는 범죄자가 있다는 것까지.

정령과 소통하고, 세계수가 심어진 땅에서 다시 태어난 엘븐나이츠들의 기감은 마치 영혼을 보는 고위 사제의 것에 비견될 정도였다.

노아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녹색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이 엘븐나이츠 3조장인 여인의 눈에 아드난 모하메드 알하심 알마울리는 더러운 악취가 풍기는 폐수 같았다.

그래서 묻지도 않고 일단 열외부터 시킨 거고.

“혀를 깨물어도 죽지 않을 거야. 너 같은 놈들은 내가 잘 알아. 절대로 자살은 못 하더라고.”

노아의 조용한 말은 이상하리만치 영지 출입을 위해 긴 줄을 선 이들의 귀에 똑똑히 박혔다.

무엇보다 이름이 긴 테러범은 영지의 성문 옆에 전시물처럼 거치되었다. 그의 죄목이 길게 나열된 커다란 종이와 함께, 불에 탔다가 어설프게 회복하는 걸 반복하는 과정 역시도.

그 덕분일까?

종말 전, 나름대로 사회에서 힘이 있던 이들은 거드름을 피우며 성문으로 다가오다가 금새 순한 양이 되어 착실히 조사를 받았다. 오히려 권력을 손에 쥐고 흔들어 봤기에 본능적으로 알게 된 거다.

여기서 어설프게 뻗대면 무슨 일을 겪게 될지를.

그렇게 순조롭게 입국 심사와 같은 심사가 진행되는 것 같았다.

『아포칼립스에 나만 장르가 이상하다?』

심행 퓨전판타지 소설

(주)조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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