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이요한과 그의 영지가 권능을 다루는 그린스킨에게 공격을 받은 순간 재신을 비롯한 지구의 의지는 난리가 났다. 권능을 다루는 존재란, 조금 과장하면 자신들과 같은 존재라는 뜻이었으니까.
더욱이 실체가 없는 의지로 권능을 다루는 자신과 다르게 실체를 가진 존재였으니. 이건 정말 도를 넘은 짓이었다.
“미친 새끼들!!”
재신이 어울리지 않게 쌍욕을 씹어뱉으면서도 어떻게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녀가 판단하기에 이요한에게 모든 걸 맡기는 건 너무 무책임한 것이었으니.
“좋은 생각 있으면 아무거나 일단 해봐.”
“카르마 포인트나 아이템을 지급하는 건?”
“불가. 지금 이요한에게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 녹화 수정이 붙어 있어.”
“그럼 지원군을 보내는 건 어때?”
“…이요한 영지 소속 각성자보다 강한 각성자가 어디 있어? 보내봐야 끔살당할 걸?”
갑론을박이 이어졌지만, 뚜렷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는 사이,
“어라?”
무려 이요한과 그 휘하의 엘프들이 권능을 다루는 그린스킨을 죽인 거다.
“이게……. 말이 되……나?”
누군가 그렇게 중얼거렸을 만큼 지구의 의지라는 초월 개념들에게 이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간에서 초월한 존재라면 오히려 ‘그럴 수도 있지.’라고 넘기겠지만, 이성적인 개념이 의지를 갖게 되면서 탄생한 지구의 의지들이기에 더 이해할 수 없었다.
“말이 좀 안 되면 어때?! 이겼는데! 역시! 내 새끼!!”
“이요한! 이요한!”
“이요한! 이요한!”
…
인간과 다를 것 없는 호들갑을 떨면서 이요한의 이름을 목놓아 외치는 지구의 의지의 호들갑은 그린스킨의 죽음 이후 카르마 시스템이 등장해 전쟁을 멈추기 전까지 계속됐다.
카르마 시스템이 전장을 멈춘 직후, 지구의 인간이 새롭게 찾아온 평온하고 고요한 평소의 소중함에 감격하며 눈물을 보일 때, 지구의 의지들은,
“억?”
카르마 시스템과 마주했다.
지구의 의지와 카르마 시스템 두 존재들은 육체가 없는 존재들이기에 ‘마주했다.’라는 서술어가 모순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겠지만, 아니다. 두 존재들은 서로를 마주했다.
육체를 지닌 존재가 아님에도 서로를 바라보고 상대의 존재를 온연히 느끼고 있는 두 존재들은 마치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처럼 아무런 의념도 전하지 않았다. 그렇게 육체를 가진 존재들과 다른 의미의 침묵이 이어지기를 얼마,
“여긴 무슨 일로 오셨소?”
재신(財神)이 무거운 입을 열 듯이 의념을 전했다.
[지금에서 이런 얘기를 꺼내서 뭐하나 싶지만, 우리 입장에서 너희는 정말 한심하고 멍청해서 혐오스럽거든.]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질문과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우리,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이라고 불리는 우리는 마법과 계약의 신을 따르고 있지. 그러니 우리에게 계약이라는 건 신성한 존재의 의의이지. 그런데, 그런 우리의 공증을 받으면서 계약서를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서명한다? 그것도 권능을 다루는 차원의 의지가? 하!]
신랄한, 그것도 팩트로 뼈를 조지는 말에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냐며 발끈하려던 지구의 의지는 모두 입을 다물었다.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 입장에서 지구의 의지가 한 행동은 전날부터 텐트치고 밤을 세운 이후에야 구입한 초초초한정판 피규어의 목을 댕강 부러뜨리고 아무렇지 않게 떡국을 먹으러 간 이십팔색 조카 같은 행동이었다.
묘사가 굉장히 사실적이고 구체적이라고? 경험이냐고? 아니다. 아무튼 아니다.
그러니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이 지구의 의지를 짜게 식은 눈으로 볼 수밖에.
“잠깐. 설마 알고 있었어요? 계약서에 장난질 쳐 놓은 거?”
재신보다 뒤쪽에 뭉쳐 있던 다른 지구의 의지가 나서서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그렇게 묻자,
[당연하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긍정의 답이 돌아온다.
“그럼, 말을 해줬어야죠!!”
[우리가? 왜?]
“예?!”
[정말 웃긴다. 너희. 애초에 그 계약의 목적이 뭐야? 그린스킨을 비롯한 세 개의 차원을 끌어드린 너희의 목적.]
“…….”
누구도 말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인간이라는 종족을 멸족시키기 위해서 맺은 계약이었으니까. 본래 계약의 취지마저도 좋지 않다. 하나의 종족의 씨를 말리기 위함이니.
[그런 주제에 우리한테? 왜 계약도 대신 맺어달라고 하지? 애초에 계약서를 끝까지 읽어보지 않고 서명한 놈들이 뭐? 아이고. 정말 답도 없다. 너희는.]
불편하고 무거운 침묵이 다시 내려앉는다. 한숨을 깊게 내쉰 재신이 다시 나선 것은 그로부터 몇 분의 시간이 더 흐른 이후였다.
“그래서, 그 말을 하려고 오셨소?”
[아니지. 우리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아니?]
“그러면 본론부터 꺼내주시겠소?”
[음. 좋아. 아니, 좋아요.]
『지금부터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 본연의 업무를 시작하겠습니다.』
조금 전까지 신랄하게 반말로 지구의 의지를 까던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이 목소리의 톤까지 변경해서 존댓말로 의념을 전했다.
『차원 지구가 포함된 계약에서 부당행위가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이에 우리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은 부당행위에 대한 추적을 진행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본 시스템이 추적이 끝나기 전에 증거를 차원 지구에서 확보했으며, 해당 증거가 조작되지 않았음을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이 공증합니다.』
“…….”
『이는 위대한 마법의 신이며 동시에 계약의 신의 이름에 위배되는 바, 잠시 계약 진행을 멈추고 계약 위반에 대한 합당한 페널티와 보상을 받아내겠습니다.』
[여기까지.]
그리고 위엄을 풍기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다시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여기까지가 공식적인 입장이고, 이제는 지극히 주관적인 입장에서 첨언하자면.]
[너희가 양심이 있으면 이번 일에는 아무것도 못 했다는 걸 인정하겠지?]
[그러니 이번에 계약 위반으로 위약금을 받거든, 양심 없이 낼름 처먹지 말고 진짜 고생한 사람에게 보상이 돌아가게 하는 게 어떻겠니?]
[그러면 이제부터 뛰어다녀야 하는 우리도 힘이 나지 않겠니?]
짧은 설명이었지만, 그 안에는 하고 싶은 말은 물론이고 감정까지 모조리 들어가 있었다.
한 것도 없이 지켜만 보고 있던 너희가 보상을 챙기지 말고, 목숨 걸고 이 사태를 해결한 이요한을 비롯한 각성자에게 보상이 온전히 돌아가도록 하라는 뜻과 그 안에 담긴 짙은 혐오의 감정까지.
“알았으니까 이제 가봐.”
[반말?]
“뭐, 너도 하는데 나는 못해?”
[흥.]
재신이 그렇게 받아치는 순간 코웃음을 치며 제법이라는 기색을 풍긴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들의 존재감이 사라졌다. 저들 말처럼 이제 계약을 어긴 그린스킨을 털러 간 것이리라.
“갔냐? 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존재감을 체크하던 재신은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이 사라졌다는 확신이 들자,
“와……! 씨벌. 지릴 뻔했네!”
재신은 굳이 쉴 필요도 없는 숨을 몰아쉬면서 자신이 아직 멀쩡한지를 살폈다.
“그래도 대단하네. 재신.”
“그러게. 너 그 정도 깡다구였냐?”
…
“뭐, 어차피 이번 일은 걔들도 증거 못 찾고 헤맨 거잖아. 거창하게 말한 거 문맥을 살피면.”
“그런가?”
“응. 그러니까 결정적인 증거를 잡은 것도 이요하니고, 영상으로 정보를 모은 것도 이요하니니까. 내가 꿀릴 게 뭐 있어? 이요한이 내 새낀데!”
말을 할수록 긴장이 풀리는지 목소리가 높아지던 재신은,
“이번에 들어오는 보상 탐내지 마. 찍먹이라도 하려는 놈이 있으면 진짜 가만 안 둔다!”
으름장을 놓았다. 평소라면 동등한 지위의 지구의 의지 사이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만으로 불쾌하게 생각하는 의지가 있었겠지만, 이요한이 회귀라는 걸 한 이후는 대부분이 재신을 인정하는 분위기였고, 방금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과 대거리를 한 것을 기점으로는 그런 분위기가 더욱 크게 기울었다.
“이번에 내 새끼 지갑 두둑하게 만들어줄 거야! 내가 꼭 그럴 거야!”
재신이 당당하게 선언한 말에 반발하는 지구의 의지는 거의 없었다. 그래 거의 없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의하고, 이번에 위약금이 들어오면 카르마 포인트와 더불어 아이템을 제작하자는 의견을 나누는 지구의 의지들과 동떨어진 지구의 의지가 있었다.
파괴(破壞).
이렇게 말하면 모를 수도 있는데, 그는 회귀 전 엑스칼리버라는 신화급 아이템의 주인이자, 기사 여왕이라고 불린 다이애나 프린스를 지원했던 지구의 의지다. 그리고 회귀 이후에도 그녀를 맹목적으로 지원하고 있고.
‘이건 너무 한쪽으로 힘이 기울잖아. 우리 다이애나는?’
그는 이번 보상에서 다이애나가 아무것도 받지 못하게 될 거라는 걸 알았다. 그건 지구의 의지 중 하나이기에 행복 회로를 돌릴 것도 없었다. 이건 안 되는 거다.
‘이건 너무 불합리해. 이렇게 된 이상…….’
모두가 곧 돌아올 위약금과 보상에 들떠 있을 때, 지구의 의지 중 파괴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영국의 맨체스터로 향했다.
* * *
“나도 그 이야기에 좀 끼워줄래?”
“기사 여왕?”
이 시기와 이 상황에서 만날 거라고 예상치도 못한 사람의 등장에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이 튀어나갔다.
“응? 누구?”
당연히 아직은 기사 여왕이라고 불리기 전이었으니, 그녀는 자신을 말하는 건지 알지 못해서 반문했다. 뭐, 좋다. 그런 거야 다 좋은데,
“왜 반말?”
이 년이 언제 봤다고 말을 잘라? 영어에는 존대가 없다고? 그거 영어를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다. 영어에도 상대를 존중하는 말투가 있다. 그리고 지금은 지구의 의지 덕분에 완벽한 통역이 되는 세상이다.
뉘앙스 정도야 조금의 오류도 없이 전달된다. 길게 말했지만, 저건 반말이 맞다는 거다. 그것도 엄청 무례한.
“칼질을 하도 해서 혀도 반토막으로 잘라먹었나? 아직 안 잘렸으면 진짜로 반으로 잘라줄까?”
원래부터 별로 좋아하지 않는 여자다. 회귀 전의 행보도 내 취향이 아니었고. 그래서 유다연에게 듣기로 다른 지구의 의지가 사제로 삼아 적극적으로 밀고 있다는 말에도 따로 만나지 않았고.
“하?”
그런데 반말을 찍찍해대더니 싫은 소리를 듣고는 대뜸 저렇게 칼에 손이 가는 여자?
팟―!
엘라가 날린 화살이 검병을 잡은 손등에 박혔다. 단순히 그것을 넘어 손을 뚫고 검병에 화살이 박혔다.
“……!”
놀란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 기사 여왕의 눈빛을 무시하면서,
“꺼져. 그나마 너를 선택한 지구의 의지를 봐서 살려주는 거니까. 어디 겁도 없이 검에 손부터 가?”
자비를 베풀었다. 그래도 살아 있으면 영국 쪽에서 제법 생존자를 데리고 버티는 존재가 될 테니까.
“거기 서!”
화살을 부러뜨리고 손바닥 쪽으로 해서 화살을 뽑은 기사 여왕이 핏발이 선 눈으로 나를 노려본다.
“하아.”
그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저 천둥벌거숭이 같은 게 정말 주제도 모르고.
“엘라.”
나는 엘라를 불렀다. 이 부름은 엘라에게 직접 기사 여왕을 처리하라는 게 아니다.
“저도 함께.”
“그래.”
엘라의 의지에 따라 성벽에서 성벽 아래로 돌로 된 계단이 순식간에 생겨났다. 그리고 난 성벽을 박찼다.
일반인은 물론이고 각성자 중에서도 눈으로 쫓을 수 없는 속도로 기사 여왕과 거리를 좁히고,
“컥?!”
피가 흐르는 손으로 억지로 쥐고 있던 칼을 차버리고 목을 움켜쥐기까지 걸린 시간은 찰나였다.
당연히 엘라는 내 옆에 섰고.
“야.”
“컥?! 컥!”
“그린스킨 좀 썰고, 각성자도 썰고 하니까. 세상에 네 것 같아?”
“크헉?!”
텁―. 텁텁!
목을 잡은 손을 빼내려고 어떻게든 발버둥쳤지만, 내가 말하지 않았나. 랭크의 차이는 벽이 존재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옅은 노란색 마력을 보면 자신감을 가질 만 했다. 아마 이 여자는 자신의 쉘터뿐만 아니라 영국에서도 가장 강한 각성자였을 거다. 그러니 다른 일행도 없이 혼자 여길 찾아와서 깽판을 부린 거겠지.
화르르.
마력을 일으키기 무섭게 연한 녹색 마력이 불꽃으로 화해 내 몸을 감싼다.
“컥?!”
그걸 보고는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놀라는 기사 여왕. 당연하겠지. 이 시기에 어떤 미친놈이 그린 랭크를 달성하겠나.
그제야 체념의 빛이 눈에 맺힌다. 간신히 옐로 랭크에 올라 기고만장하던 기사 여왕은 이제 없다. 아마 동일한 랭크인 같은 옐로 랭크였다면 이런 식으로 압도하지 못했을 거다. 어쨌든 기사 여왕은 전투 클래스에서 손에 꼽히는 강자였고, 재능이 있는 각성자였으니까.
“자비를 베풀었으면 고맙습니다 하고 절은 못 할망정 검을 빼들어?”
“큭!”
이미 의지가 꺾인 기사 여왕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걸 보자마자 손을 털어버렸다.
“쿨럭! 커헉! 쿨럭!”
주저앉아 갑자기 찾아온 산소를 만끽하며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기침하는 기사 여왕을 일별하고,
“꺼져. 다음에 덤비면 진짜로 목을 잘라줄 테니까.”
성벽으로 이어진 돌계단에 발을 올리려는 찰나,
“제, 제발!!”
비명과 같은 애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파괴(破壞)님을……. 제발.”
울면서 애원하는 그녀의 부탁을 나는,
“뭔 소리야. 저게?”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히 무슨 개소리냐고 자세하게 물어야 했다.
[마스터. 상관하실 일이 아닙니다.]
반지의 에고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분명히 그랬을 거다. 나는.
『아포칼립스에 나만 장르가 이상하다?』
심행 퓨전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