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인간이 그렇지 뭐.>
이요한의 영지로 가기 위해서 필수로 거쳐야 하는 곳이 몇 군데 있다. 특히 김포 공항에서 출발하는 이들은 깔끔하게 정돈된 도로를 따라 이동하게 된다.
교통수단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잘 정비된 그 도로를 따라서 움직이는 게 현대인의 본능 같은 거다. 그러니 그 도로가 보이는 곳에 매복하고 있다면 그 길을 지나는 이들을 일목요연하게 관찰할 수 있다.
‘역시 사람은 눈치가 빨라야 해.’
조쉬도 이요한이 있는 영지로 향하던 무리 중 하나였다. 엄밀히 따지면 무리의 이인자였다. 그런데 문득 조쉬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요한의 성향과 자신이 이끄는 무리가 맞을까?
그리고 결론은 금방 나왔다. 너튜브만 보더라도 이요한의 성향은 자신들과 맞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돌아가지고 말했다. 하지만 리더는 듣지 않았고, 무리는 그렇게 반으로 갈라졌다.
결론?
보나마나지. 영지로 입국을 거부당한 이들의 말에 따르면 사람을 죽이고 노예처럼 부린 놈들은 모두 목이 잘렸다나?
그래서 조쉬는 안도하며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걸 본 것은 우연이었다. 잠시 쉬려고 길 한쪽에 앉아 있다가 꾸역꾸역 밀려드는 행렬을 본 것은 말이다.
그리고 문득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쩌면 이곳에서 자신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고.
그렇게 조쉬는 이요한의 영지, 유토피아로 향하는 길목 중, 한 곳에 자리잡았다. 사흘 정도 자신의 무리와 함께 관찰하다가 늦은 저녁 적당한 사람을 발견했다.
초라한 행색. 남루한 옷. 무엇보다 피로에 쩌든 것 같은 표정의 일가족 다섯 명. 특히나 어린 아이까지 있다.
그가 노리기 딱 좋은 일행이다. 특히 젊은 여자가 포함된 일행이니 더욱 그렇다.
“시간이 늦었는데, 좀 쉬었다가 가는 게 어때?”
그 일행 앞에 조쉬와 그를 다르는 무리가 나타나 길을 막으며 말했다. 당연히 그 소리를 들은 가족들은 원치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앞으로 나서며 가족을 자신의 등 뒤로 돌려 보호했다.
“아저씨 각성자구나? 그런데 이걸 어쩌지? 쟤도, 쟤도, 그 옆에 있는 애도 그리고 나도 각성잔데?”
조쉬의 농담 같은 말에는 은연중에 살기가 배어있었다. 그가 그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살인을 밥 먹듯이 했기 때문이리라.
“좋은 말로 할 때 따라오는 게 어떨까? 응?”
그 섬뜩한 협박에 다섯 명의 가족의 얼굴에 절망이 드리운 순간,
“나도 궁금한데? 그 좋은 말이라는 거.”
조쉬와 그 일행 뒤에서 조금은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조쉬를 비롯한 이 일을 꾸민 쓰레기들은 섬뜩한 기분에 부르르 떨어야 했다. 각성자가 된 이후로 이렇게 뒤로 바짝 접근할 때까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에.
“어이. 아저씨. 나도 궁금하다니까? 그 좋은 말이라는 거?”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것 같은 앳된 목소리와 내용만 보면 교복을 입고 담배를 뻐끔뻐끔 피워대는 일진 중고딩을 떠오르게 하지만, 조쉬와 그 일당을 포위한 이들은 평범한 이들이 아니다.
“누, 누구……?”
“아저씨. 좀 짜증 나네? 누가 질문에 질문으로 답해도 된다고 했어?”
160이 조금 넘는 작은 키의 갈색 머리카락과 얼굴에 주근깨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아이. 그러나 조쉬는 아이와 그 일행을 보고 조금도 비웃거나 무시할 수 없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마력의 색이 무려 ‘주황색’이었으니까. 연해서 붉은색으로 보일 정도의 주황색이 아니라, 선명하디 선명한 오렌지(Orange) 랭크였다.
그것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스무 명의 어린 각성자들 전부가.
“대답이 없네?”
어린 각성자가 한 걸음을 내딛자 화들짝 놀라서 뒤로 훌쩍 물러선 조쉬는 어느새 자신이 협박하던 가족과 거리가 가깝다는 걸 본능적으로 떠올렸다.
그리고 그 본능에 몸을 맡겨 가장 가까이 있던 각성자로 보인 중년 남자에게 손을 뻗었다.
‘됐다! 이제 이 새끼를 인질로 삼아서? 어?’
뭔가 이상했다. 마력까지 동원해서 뻗은 오른손인데, 바로 코앞에 있던 남자가 딸려오지 않는다. 오히려 중년 남자가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푸쉬이이이―.
그리고 이상한 소리를 듣고서야 그게 자신의 팔꿈치에서 나는 소리라는 걸 조쉬는 뒤늦게 깨달았다.
“어?”
“아저씨. 양아치예요?”
언제 왔던 걸까? 바로 옆으로 다가온 중학생처럼 보이는 백인 아이의 손에는 주황색 마력이 넘실거리는 ‘검’이 쥐여 있었고, 그 검에서는 피가 맺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아아악!!”
그제야 고통이 느껴지며 현실을 인지했는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은 조쉬였으나,
“내가 벌써 이 짓을 사흘째 하는 중이거든요? 진짜 너 같은 새끼들은 왜 이렇게 많은 걸까요? 죽여도 죽여도 또 나오네요? 바퀴벌레처럼.”
그의 비명은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어린 각성자에게는 말이다.
“하아. 영주 님이 보시면 또 상심하시겠지? 우리 마음 약한 영주 님이라면?”
“당연하지. 이딴 쓰레기들은 언제 또 생겨난 건지.”
“됐어. 죽이자. 그냥.”
“거기 뒤에 있는 분들은 가던 길 가세요. 유토피아로 가는 길이죠?”
“네? 아, 네!”
팔꿈치 아래가 잘려서 피를 흘리는 사람을 앞에 두고도 태연하게 자신들끼리 만담을 나누던 이들이 하마터면 인질이 될 뻔한 이들을 향해서 따뜻하게 건넨 질문에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로엔. 네가 좀 안내해드려.”
“그래요. 제가 바로 그 유토피아의 영지민이거든요. 안내해드릴게요. 따라오세요. 아, 여기 물 좀 드시고요. 거기 아이가 많이 놀란 것 같은데.”
태연하게 건넨 수통에 가득 담긴 물은 무려 지금 세상에서 구하기 힘들다는 깨끗하게 정수된 물이었다. 가족 중, 어린 딸에게 조심히 물을 먹이고, 각자 한 모금씩 소중하게 마신 물이다. 그러다 보니,
“죄, 죄송합니다.”
어느새 작지 않은 물통에 담긴 물이 모두 사라졌다.
“괜찮아요. 전 영지 안에서 다시 받으면 되니까. 이동하죠.”
그 말이 이 불쌍한 가족의 무언가를 건드린 걸까? 부모는 뜬금없이 눈물이 터져버렸고, 울고 있는 부모를 본 아이들도 덩달아 눈물을 보인다. 우는 아이들을 보는 부모는 더 눈물보가 터졌고.
“어? 어어. 내가 뭔가 실수라도 한 걸까?”
로엔이라고 불린 단발머리의 여자아이가 더듬거리며 물은 말에 중년의 부부가 대답하기도 전에,
“맞아. 분명히 니 잘못이야. 로엔.”
“맞음. 성격 더러운 로엔.”
“응. 당연히.”
“Absolutely.”
“다, 닥쳐!”
로엔의 일행의 대답이 쏟아졌다.
“아닙! 아닙니다. 그냥 이런 온정을 받아본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감사합니다.”
아이들의 엄마로 보이는 중년 여인의 대답이 나오기 전까지 로엔을 놀려댔다. 분위기만 보면 종말 전 평범한 아이들의 대화처럼 보였다. 로엔이 가족을 데리고 멀리 가기 전까지도 분명히 그랬다.
“이제. 우리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할까? 아저씨들?”
분명히 그랬다. 조금 전까지는. 지금 살기를 줄줄이 흘리는 이 어린 각성자들이 조금 전 그 각성자들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만큼.
* * *
유토피아, 이요한의 영지로 향하는 길에서 생존자를 납치하려던 빌런들을 사냥하고 있던 시기에 유토피아에서 1km 이상 떨어진 제법 커다란 성당에 일련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주의 참된 말씀을 모르는 저 불쌍한 사람들을 우리가 나서서 인도해야 합니다.”
“아멘.”
“아버지.”
…
이들은 대전이 날에 유토피아 나타났다가 이요한에게 쫓겨난 종교인들과 평화의 날에 유토피아를 찾았다가 쫓겨난 이들이 모인 단체였다.
개신교의 여러 종파는 물론이고, 천주교와 정교, 오리엔트 정교를 비롯한 기독교라는 카테고리가 대통합을 이루면서 이들의 수는 적지 않은 숫자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이들이 그린스킨의 침공을 막을 수 있었던 건 그린스킨들이 이요한의 영지에 집중했기 때문도 있지만, 이 그룹에 속한 각성자들 때문이다.
본래 힘을 가진 사람이 깊은 신념을 가지면 능력보다 더 강해지곤 한다. 마치 성기사처럼 종교라는 아래 뭉친 각성자들은 빠르게 강해지고, 비각성자를 각성자로 만들어내는데 열정을 쏟으면서 각성자 전력이 빠르게 늘어났다.
물론 각성자가 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요한이었다면 그린스킨을 죽였음에도 각성하지 못한 사람은 ‘고쳐 쓸 시도조차 하지 못할 인간’으로 지정하고 내쫓았을 텐데, 이들은 ‘형제님, 자매님.’하면서 서로 뭉치게 되었고,
“자! 저 소돔과 고모라 같은 땅을 향해 다가가는 어리석은 양들을 우리가 구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아멘!”
이들은 어딘가 그들이 믿던 종교에서 많이 달라졌다.
우르르 떼를 지어 사방으로 흩어진 이들은 유토피아로 오는 이들을 발견하면,
“아, 고생하셨어요. 편안한 잠자리와 안전한 쉘터가 있어요.”
“어머. 자매님. 힘드시죠? 잠시 저기 앉아서 쉬시면서 좋은 말씀을 들어보시겠어요?”
“아! 이요한 형제님이요? 알죠. 잘 압니다.”
“유토피아요?! 저희가 바로 유토피아입니다.”
지친 생존자들을 둘러싸고 정신을 쏙 빼놨다. 그리고 거짓말 혹은 반강제적으로 아니면 힘으로 생존자를 끌고 성당으로 향했다.
“여, 여기는 유토피아가 아니잖아요!”
“당신들! 이요한 회장님과 아는 사이라면서요!!”
그러다가 결국에는 자신들이 이요한의 영상에 등장한 성벽에 둘러싸인 안전지대가 아니라, 커다란 성당으로 이동하는 걸 깨달은 이들이 반발하면,
“어리석은 자들이!”
“주여. 이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
저런 말을 지껄이면서 강압적으로 끌고 갔다. 그러다가 종종 반항하는 각성자는 폭력으로 제압해서 성당 안으로 끌고 갔다.
이들이 전도라는 행동으로 생존자를 납치해 성당 안으로 들이는 이유는,
“다녀왔습니다. 지민석 목자님.”
이 성당을 쉘터로 만든 ‘목자’라고 불리는 남자, 지민석 때문이다.
“수고하셨습니다. 형제님. 덕분에 오늘도 주님의 성전이 더 안전하고 풍요로워지겠군요.”
지민석은 이들 종교 단체를 이끄는 각성자로, 고유 능력이 쉘터 계열이다. 그것도 [교회 건설]이라는 특이한 계열의 쉘터를 건설할 수 있다.
그의 고유 능력 [교회 건설]은 이요한의 고유 능력 [영지]처럼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쉘터로 지정한 곳이 교회 혹은 성당이어야 하며, 쉘터를 선포할 때 소속된 교인의 숫자가 100명이 넘어야 한다.
이요한의 [영지]가 그랬듯, 조건이 필요한 쉘터는 조건을 갖추면 효과가 뛰어나기 마련이다. 이들이 쉘터로 삼은 이 성당 안에서 ‘불신자’는 여러 디버프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럼 이들이 왜 생존자를 납치하다시피 해서 데려왔을까?
그 원인은 특수 스탯에 있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고유 능력의 랭크를 올리기 위해서는 특수 스탯의 랭크가 상승해야 한다. 이요한이 [위엄] 스탯을 올리기 위해서 플러스 카르마를 투자하는 것처럼.
지민석의 특수 스탯은 [신앙]이다. 당연히 그도 초기 화이트 랭크 일 때는 플러스 카르마 포인트를 투자해서 스탯을 올렸다.
하지만 레드 랭크에서부터 특수 스탯 하나를 올리는데 필요한 포인트가 1,000이다. 지민석의 입장에서는 10만이라는 스탯은 감히 엄두가 나지 않을 수치였다.
무엇보다 쉘터 내부 시설을 더 쾌적하게 업그레이드 하기 위해서도 플러스 카르마가 들어간다. 즉, 이요한처럼 쓸데는 많은데 플러스 카르마 포인트는 부족한 상황인 셈이다.
그래도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지민석과 간부들은 이걸 ‘주의 뜻하심’이라고 말하긴 했다― [신앙]을 높일 방법이 있었다.
신자를 늘리면 된다. 신자 한 명당 레드 랭크 스탯이 0.2가 오른다. 최초 화이트 랭크였을 때도 [신앙] 스탯이 55로 시작했기에 지민석은 플러스 카르마 포인트를 투자해 레드 랭크로 스탯을 올릴 수 있었던 거였다.
문제는 그가 자리 잡은 성당 주변에는 생존자가 없다는 거다. 이요한의 유토피아와 거리가 있다지만, 그렇게 멀리까지 떨어져 있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의 고민이 길어지기 전에 ‘평황의 날’이 시작되면서 유토피아로 사람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것도 전 세계에서.
이러니 주의 뜻하심 어쩌고 하지 않겠냐고. 첫날엔 그래도 조심하는 기색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첫날에만 무려 오십 명이나 되는 생존자를 전도―라고 쓰고 납치라고 읽는― 했으니 다음 날부터는 눈치도 보지 않았다.
“그러니까 납치를 당했다?”
행동이 조심스럽지 않게 되면 실수가 나오기 마련이고,
“네네! 이, 이상한 종교단체에서……. 부모님이 납치되셨어요! 도, 도와주세요!”
실수로 발생한 생존자가 향할 곳은 뻔하다. 이요한이 있는 영지 유토피아다. 남루하고 지친 기색의 중학생 정도 돼 보이는 아이가 동쪽 성문에 도착한 것은 평화의 날이 시작되고 엿새가 지난 후였다.
“영주님께 보고드려.”
“네!”
엘븐나이츠 중 하나가 빠르게 영지 안쪽으로 달려가는 것을 확인한 아이가 그대로 쓰러졌다. 긴장 속에서 유토피아까지 달려왔다가 긴장이 풀리자 그대로 기절한 것이다.
“물의 정령 소환해서 아이 좀 살펴.”
“네. 운다인. 도와줘.”
물의 중급 정령이 쓰러진 아이를 물로 감싸고 시간이 지나 아이가 정신을 차릴 무렵,
“납치라고?”
영지 주인인 이요한이 어처구니없다는 감정을 숨김 없이 드러내며 나타났다.
『아포칼립스에 나만 장르가 이상하다?』
심행 퓨전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