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의 호의를 받습니다.>
본래 계약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사소한 계약이 아니라, 그냥 새끼손가락 걸고 한 약속이라고 해도 계약 기간 중에 계약 내용을 바꾸거나 추가하는 걸 그냥 해줄 수 없죠. 안 그래요?
그래서 보통 계약 기간 중에 특약을 추가하는 경우는 여러 조건과 만만치 않은 대가가 필요하죠.
그래서 계약 기간이 끝나기 전에 계약서 수정은 보기 드문 겁니다.
― 계약 전문 변호사, 콘 아티스트(Con Artist).
* * *
[그렇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요약하면 재신이 이걸 준비했다? 이 기가 막힌걸?”
[맞습니다.]
심연 독. 우리는 이걸 좀비 독이라고 불렀다. 물리면 좀비로 변하게 되는 이 독을.
“이러면……. 아니, 이래도 돼? 이걸 시체쟁이 놈들이 받아들였어?”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계약서에 장난질을 친 건 그놈들이 먼저니까요.]
“그래도 안 받아들일 것 같은데?”
좀비가 무서운 아니, 더러운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시스템에서 말하는 심연독, 과거 회귀 전 각성자들은 좀비독이라고 불렸던 것 때문이다.
비각성자는 물론이고, 각성자조차 좀비의 독이 혈관에 파고들면 서서히 좀비로 변해가게 하기에 무섭고 더러운 거다.
그래서 우리는 그린스킨 뒤에 등장하는 침공자를 시체쟁이라고 불렀다.
좀비가 너무나 쉽게 수천, 수만 단위로 하늘에서 떨어진다.
그리고 그 좀비가 인간을 발견하면 침을 흘리며 무턱대고 막무가내로 우악스럽게 달려들고, 그 사이사이에 영화 그램린에 등장하는 것 같은 크기의 작은 악마들이 스며들어 인간을 현혹하고, 저주를 날리고, 납치한다.
“아. 상상했어.”
회귀 전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토가 쏠리는 기분이다. 기억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흔들다가,
“잠깐만.”
문득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잠깐. 잠깐. 이거?”
지금 이 상황에서 좀비 감염에 각성자가 면역이 된다는 건,
“단순히 좀비만 쉬워진 게 아니지 않나?”
단순히 좀비가 ‘개꿀 카르마 포인트 덩어리!’ 같은 게 아니라,
“좀비 독에 면역이니까……. 그렘린을 닮은 그 악마 새끼들도 제대로 활개를 치지 못할 거고?”
좀비와 함께 나와서 처리하기 힘든 악마 처치 난이도 확연하게 내려간다는 뜻이었으며,
“그린스킨도 이제 철수한 거잖아? 맞지? 그러면……. 불리하면 그린스킨 쪽으로 도망가는 짓이나, 쉘터 앞에 좀비독을 주입 시킨 그린스킨을 풀어놓는 짓도 못한다는 거니까……?”
그린스킨까지 사라진 상황에서 시체쟁이들이 맞이해야 할 상황은,
“약한데 물량은 많고, 카르마 포인트는 많이 주는 상황? 어? 나 이거 어디서 봤는데? 아!”
그야말로,
“카우 방이네! 이거!”
게임에서 특수 이벤트 맵을 연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아, 달달하겠네~.”
[마스터. 준비하십시오.]
“엉? 준비? 무슨 준……?”
『전무후무한 업적! 권능이 없는 존재가 권능을 보유한 존재를 ‘격살’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갑자기 시스템 메시지가 튀어 나왔다. 다만 조금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평소에 카르마 포인트 획득이나 업적을 획득했을 때, 등장하는 목소리였다. 불과 1분 전에 등장했던 목소리에 여러 감정이 느껴졌다면, 지금은 평소처럼 감정이 없고 딱딱한 말투의 목소리였다.
『권능을 다루는 존재, 그린스킨의 황족 처치 보상 산정 지침이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내용의 어딘가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보통 ‘보상 산정 중입니다’라거나 ‘보상 산정이 끝났습니다.’ 정도일 텐데.
“지침이 내려와?”
『하나, 전투 기여도에 따라 기본 보상 마이너스 카르마 일억(100,000,000) 포인트를 분배합니다.』
“어, 억?!”
마이너스 카르마 포인트 억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억이 문제가 아니다. 무려 일억이라는 마이너스 카르마 포인트가 ‘기본’ 보상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그린스킨 잡으면 주던 100포인트, 500포인트 하던 그 마이너스 카르마 포인트라는 거지? 지금?”
[맞습니다. 마스터.]
“그리고 ‘하나’라고 했으면 뒤에 뭐가 더 있다는 소리…….”
『둘, 가장 공헌도가 높은 각성자에게 특별한 고유 능력 개화의 기회를 드립니다.』
『각성자 이요한의 공헌도가 50%를 초과했습니다. 특별한 고유 능력 개화의 기회가 아니라, 고유 능력 개화를 확정합니다.』
『각성자 이요한의 공헌도가 75%를 초과했습니다. 특별한 고유 능력 개화가 특별한 고유 능력 선택권으로 변경됩니다.』
『셋, 이제부터 각성자 이요한의 영지 안에 「상점」과 「자판기」가 설치됩니다. 최초 설치되는 「상점」과 「자판기」는 무료이지만, 이후 추가로 설치하기 위해서는 카르마 포인트가 필요합니다.』
『넷, 당신의 협조와 활약으로 완벽한 증거를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그 증거로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이 벼르던 일을 처리했습니다. 이제부터 생존하는 내내 당신은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의 호의를 받습니다.』
“미쳤? 응?”
두 번째 보상에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세 번째 보상에서 바보 도 트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의 호의? 그게 뭔데?
[마, 마스터…….]
그때 반지의 에고가 처음으로 말을 더듬으며 나를 찾는다.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의 호의를 얻으셨다고요? 진짜로? 개꿀잼 몰카가 아니라?]
‘같이 좀 놀라면 안 될까? 이게 뭔데?’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이라잖아요!! 그린스킨의 황족은 물론이고 지구의 의지마저도 벌벌 떨게 만드는 존재!]
‘알아. 그래서?’
[그래서…라뇨?!]
‘그렇게 일단 흥분부터 하지 말고 설명을 하라고. 난 몇 달 전까지는 평범하게 월급 받으며 살아가던 인간이었다는 걸 감안해서.’
[어……. 그러니까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요?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은 차원에서 벌어지는 모든 전쟁과 전쟁을 지켜보는 존재이며, 규칙을 정하고 법칙을 세우는 존재입니다.]
어딘가 선문답 같은 설명이었으나, 그 설명에서 나는 몇 가지를 알아차렸다.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이 어느 하나의 존재를 지칭하지 않는다는 것과 축구나 야구 경기의 심판 같은 존재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법칙을 세울 힘이 있다?’
[당연하죠. 지구의 의지들이 사기 계약을 당하고 왜 계약을 준수하겠어요? 특히 재신(財神) 같은 경우는 지구에 나타난 그린스킨 따위 콧김으로 쓸어버릴 힘이 있는데도요? 얼마 전에 나타난 애송이요? 권능도 허접한 새끼는 재신이 본신을 강림하는 것만으로 터진 토마토가 됐을 걸요? 그런데 왜 참았을까요?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이 정한 법칙 때문이죠.]
‘그런 존재에게 호의를 샀다?’
[네에!!!]
그러니까 한마디로 난 야구 선수로 경기 중인데 스트라이크와 볼을 판정하는 주심과 홈런과 파울을 판단하고, 세이프와 아웃을 판단하는 부심은 물론 VAR을 판단하는 위원까지 내 편인 셈인가?
[그것보다 훨씬 대단한 거죠. 비유는 적당하지만요.]
“좋다.”
[좋죠.]
“오빠? 뭐가 좋아요? 카르마 포인트가요? 오빠는 마이너스 카르마 포인트가 아니라 플러스 카르마 포인트가 필요한 거잖아요?”
유다연의 시비도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을 만큼 보상이 달달하다.
“그래도……?”
『각성자 이요한의 상황을 카르마 포인트 소비 시스템이 인지했습니다. 마이너스 카르마를 플러스 카르마로 치환해 지급하겠습니다.』
“…네?”
이런 거구나.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의 호의라는 게. 호의를 처음 받는 순간 기쁨보다 뭔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그건 그러니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본능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이거 위험하네.”
[눈치채셨군요.]
“까딱하면 중독되겠어.”
[맞습니다.]
“한국 영화에 그런 대사가 있어.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린 줄 안다. 이거 아쉬우면 찾다가 안 들어주면 서운해하다가 미워하는 개쓰레기가 될 수도 있겠는데? 이건 그냥 어쩌다 한 번 된 거라고 생각해야겠어. 아우. 너무 달아서 턱이 아픈 느낌이다 야.”
그렇다. 너무 달다. 이 종말의 세상에서 너무나 쉽게, 과거 회귀 전과 회귀 후를 통틀어서 고려해도 비슷한 경험조차 없을 만큼 달달한 호의. 이건 조금이라도 익숙해지면 개새끼가 되기 딱 좋다.
무엇보다,
“꽃놀이 패를 쥔 판에서까지 개새끼가 될 순 없지.”
우리는 예상보다 훨씬 수월하게 시체쟁이를 이겨낼 수 있다.
“지금 당장 기존에 영지민 중에 각성하지 못한 사람들 모두 데려와.”
“네? 기존 영지민이요?”
“그래. 첫날, 소환된 영지민.”
“오빠가 후원한 애들과 교사들 말하는 거죠? 그날 소환된 영지민 중, 각성자가 되지 못한 아이는 없어요. 오빠.”
“어? 그래?”
그동안 꾸준히 각성의 기회를 주었다는 건 나도 인지하고 있지만, 분명히 첫날 영지를 선포했을 때 소환된 사람이 만 명이 넘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그린스킨을 때려잡았는데요. 66일이 지난 후에는 하루에 수만이나 되는 놈들이 나타났는데. 그동안 각성을 못했다면 문제가 있는 거죠. 그럴 수 있는 경우는 하나뿐이니까요.”
“음. 충성 스탯의 기준을 통과 못하는 경우?”
“네네. 헤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런 사람은 없었어요.”
“…그럼 그다음에 들어온 영지민들. 지구의 의지가 소환한 영지민 있잖아. 플러스 카르마 포인트가 높은.”
“네. 아! 그럼 그 모녀도 만나겠네요!”
“그 모녀?”
“왜 그 대 전이(轉移) 사건 때, 마스터가 만났던 모녀요. 가슴으로 낳은 아이와 엄마.”
아아. 누군지 기억났다. 카르마 포인트를 노출하는 방법을 몰라서 떨면서도 아이를 꼭 안고 내게 물어봤던 젊은 여자와 열 살도 안 되는 여자 아이.
“그 모녀가 왜?”
“음? 오빠 몰라요? 오빠가 맛있다고 했던 그 김치랑 밑반찬. 그 언니가 만든 거잖아요.”
“…무슨 소리야. 내가 먹는 음식은 전부 내성에 소속된 [요리사]가 만다는 건데.”
“대부분이죠. 전부가 아니라. 원래는 전부였는데. 김치랑 밑반찬은 오빠가 엄청 좋아했잖아요. 김밥은 환장하고 먹었으면서!”
“…환장까지는 안 했어.”
솔직히 환장하고 먹었다. 김밥을 다시 먹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평범한 세상에서 김밥은 간단한 음식이지만, 종말의 세상에서 김밥은 엄청 먹기 힘든 음식이다. 가장 흔했지만, 이제는 구하기 힘들어 진 게 단무지니까.
“단무지를 만들고, 햄도 만들고, 참기름도 만들었더라. 그 언니 진짜 대단해.”
그래. 단무지를 비롯해, 멸망 전이라면 마트에서 손쉽게 샀을 제품을 다 손수 만들었더랬다.
“요한님. 다 모였습니다.”
헌터가 마침 미각성자 영지민을 데려왔다. 그리고 그 앞에는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여자 아이가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음. 오랜만이네? 이름이 릴리아나였지?”
“네? 네!”
“음. 석궁 쏠 수 있겠어?”
유다연이 말한 모녀가 중, 딸인 아이는 여전히 몸이 작았다. 동년배 중에서도 작은 축에 속한 것처럼 보였다.
“네!! 어, 엄마가 도와준다고 했어요!”
엄마라는 말이 아직도 어색한지 더듬으면서도 배시시 웃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여러 가지 감정이 담긴 눈으로 나를 보는 수만이 넘는 영지민을 보며 입을 열었다.
“충성 스탯을 기준으로 잠시 후부터 괴물이 등장하면 각성할 기회를 줄 것이다.”
마력이 담긴 목소리는 굳이 크게 외치지 않아도 저들의 귀에 선명하게 전달될 거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각성자가 되도록 해. 각성자가 되면 좀비에게 물리거나 할퀴어도 감염되지 않는다고 하니까. 이건 다른 의미로 생존의 문제이기도 하니까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지?”
여기저기서 알겠다는 대답이 튀어나오고 희망에 부푼다. 물론 이들의 수가 수만이나 되기에 전부 당장 각성자가 될 수는 없다.
넉넉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한 연발 석궁도 벌써 파손된 게 적지 않다. 하지만 다행인 건 좀비는 석궁으로 충분히 죽일 수 있을 만큼 약한 몬스터다.
무엇보다 그린스킨 때보다 더 각성이 쉽다. 좀비는 바글바글 모일 테니까. 하늘로 쏴도 맞고 뒈지는 좀비가 나올 정도로.
“다들 성벽 위로 올라……. 가기 전에. 저것부터 어떻게 해야겠네.”
성벽의 한쪽이 무너져 너머의 모습이 보이는 선명하게 보이는 성벽을 보며,
“일단 성벽을 수리……. 아니지. 성벽을 업그레이드하겠다.”
성벽을 업그레이드했다.
『아포칼립스에 나만 장르가 이상하다?』
심행 퓨전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