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리치 군주(The Lich Sovereign)>
우주에서 지구를 보면 푸른 보석 같다고 한다. 그만큼 아름답다는 뜻이고, 생물이 살아가기 적합한 행성이라는 뜻이다. 반대로 지금 이 행성을 우주에서 관찰한다면 반사적으로 소름이 올라 팔을 쓸어내릴 거다.
탁하고 역한 검은색 배경에 마치 썩은 살점처럼 보이는 기괴한 대륙과 역병에 걸린 것 같은 어두운 붉은색 핏줄처럼 흐르는 강. 그리고 무엇보다 행성 전체를 감싸고 있는 회색 안개까지.
그저 보고만 있어도 역겨운 행성이 바로 언데드와 악마의 차원 ‘부정한 배덕자’ 차원이다.
생산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곳.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죽음을 부르는 행성. 그 끝이 분명히 정해진 땅.
하지만 이런 수식어와 달리 부정한 배덕자의 차원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이어지고 있다.
어떻게?
카르마 포인트라는 전가의 보도와 같은 힘 덕분이다. 차원을 침략하고 병탄하여 대규모 카르마 포인트를 획득해서 차원을 유지한다. 더욱이 차원 침략 과정에서 생기는 ‘시체’는 부정한 배덕자의 병력으로 치환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 혹은 일석삼조다.
부정한 배덕자 차원의 유일한 행성 가장 높은 탑 최상층에는 뼈로 만든 거대한 용상이 존재한다. 부정한 배덕자 차원의 지배자. 차원의 이명 그래도 부정한 배덕자라고 불리는 지고한 존재.
생명에 등을 돌린 자.
부정한 피가 흐르는 자.
차원의 의지를 배반한 자.
죽음의 기사이며 동시에 어둠의 마도사.
“호오.”
리치 군주(The Lich Sovereign)다.
“그린스킨을 내놓는다? 그것도 살아 있는 그린스킨을?”
“게다가 혈족까지 내놓겠다? 그렇게까지 하여 여(余: 왕이나 황제가 자신을 지칭하는 인칭대명사)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카르마 포인트라…….”
누군가 대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리치 군주의 두 눈에서 푸른 귀화가 넘실거리며 흘러나온다. 또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리치 군주를 감싸고 있는 갑주에서 적갈색 사기가 흘러나와 바닥을 적신다.
그의 차원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높디높은 탑의 가장 최상층. 그곳에 높이 쌓은 단 위에 존재하는 드래곤의 뼈로 이뤄진 거대한 용상의 팔걸이를 규칙적으로 두드리며 말을 아낀다. 방금까지 좋다고 반응하던 것이 마치 착각이었다는 듯이.
“그래. 카르마 포인트로 얼마를 원하는가?”
“그런데 그린스킨의 황제여. 여의 차원이 어떤 곳인지 잊은 것은 아니겠지? 여의 차원에 보내는 것들은 어찌 되었든 결국에는 살아남지 못할 것은 물론이고, 그 끝이 비참할 것이라걸 알고 제안하는 것일 테고?”
“그렇다면 네가 원하는 카르마 포인트가 그 정도? 흠……. 그렇게 하지. 계약을 완성됐다.”
리치 군주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이며 크게 웃었다. 그 행동에 머리에 쓰고 있던 왕관이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카르마 포인트? 주지 않았느냐.”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멍청한 초록색 짐승아.”
“계약은 이행됐다.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어디의 멍청한 초록색 짐승 덕분에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내가 어찌 사기를 칠 수 있단 말이더냐.”
“네 놈의 일방적인 패배 선언으로 여에게 물어야 했을 위약금에서 일부를 차감했으니, 지급한 게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그것의 두 배는 되는 위약금이 남아 있으나, 그동안의 거래를 참작해 위약금을 모두 제해준 거다. 여의 자비에 감사하라.”
“화가 난다? 그래서? 우리 사이가 의리나 신의 같은 따뜻한 단어로 이어진 거였나? 적어도 여는 그런 기억이 없는데? 애초에 여에게서 ‘온정’이나 ‘인정’을 기대하다니. 이보게. 녹색 짐승의 우두머리. 이 몸으로 말할 것 같으면 말이다. 혹한의 지배자이며, 모든 악마의 군주다. 그게 뭔지 모르겠나?”
“여의 계약은 혹한의 것처럼 차갑고, 악마의 것보다 더 명징하다. 즉, 이 몸의 계약은 한 치의 빈틈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멍청한 녹색 짐승 놈아.”
“멍청한 놈.”
세상의 가장 추악한 기운을 온몸에 두르고 있는 리치 군주는 마치 더러운 오물을 만진 결병증에 걸린 귀족처럼 손을 털었다.
그에게 죽음의 기운이나, 삿된 기운, 독을 비롯해 온갖 추악한 기운은 공기처럼 당연한 것이지만, ‘멍청함’이나 ‘한심함’ 같은 것들은 닿는 것만으로도 불쾌하게 생각한다.
“그래도 멍청하고 아둔한 놈 덕분에 좀비가 아닌 더 나은 것들이 태어나겠구나. 흥미로워.”
오직 리치 군주와 그린스킨 황제의 눈에만 보이는 계약서가 차원 시스템의 규칙에 따라 투명한 파란색 불꽃과 함께 사그라든 순간,
“으허허허허. 이 얼마 만에 느껴보는 생동감 있는 생명력이란 말인가.”
그의 차원에 수백 아니, 수천만에 달하는 그린스킨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렇게 나타난 그린스킨들은 하나 같이 벌벌 떨며 겁에 질려 있었다. 전투 종족이라고 일컫는 그린스킨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도 말이다.
“침공을 준비하라. 초록 짐승이 아무리 모자란 자라고 해도 패배를 인정할 정도의 차원이다. 전쟁을 준비함에 있어 부족함보다 넘치는 것이 나으니. 차고 넘칠 만큼의 병력을 준비하라.”
지구에서 각성자와 비각성자들이 ‘평화의 날’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기간이 끝나던 날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지구 시간으로 사흘이 지났을 때,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왜 병력이 소비만 되고 진화가 안 되느냐 말이야!!”
그린스킨의 황제를 비웃으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과한 준비’를 명령한 리치 군주의 입에서 비명과 같은 질책이 튀어나온다. 그의 감정에 따라 힘이 너울치며 탑의 최상층을 파괴했지만, 그건 질책을 받는 이들의 관심 밖이었다.
“큭.”
“흐음.”
살아남아야 했으니까. 아니, 개중에 가장 오래된 아크 리치는 죽기를 바라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의 분노는 거대한 힘이 되어 탑의 최상층을 부수는 중이었다.
“군주시여.”
죽기를 원했던 가장 오래된 아크 리치가 목숨을 걸고 입을 열어 그를 부르고 나서야 리치 군주는 분노를 멈췄다.
“보고해.”
그리고 침착해진 모습으로 돌아온 척 꾸미며 이빨을 갈면서 그렇게 명령했다.
“현재까지 차원 지구에 벌어진 이벤트는 총 쉰다섯 건입니다.”
“그래. 그렇겠……? 쉰다섯? 열다섯이 아니라?”
“그렇습니다.”
“…왜지?”
리치 군주의 예상보다 훨씬 많이 발생한 이벤트. 그것은 그린스킨이 너무 이른 시기에 패배를 인정했기 때문임을 그는 알지 못했다. 아니, 알았더라도 무시했을 거다.
그린스킨의 황제. 리치 군주. 그리고 심연의 주인까지.
거대한 세 차원의 세 명의 주인들은 그동안 여러 차원을 상대로 사기를 치고 차원을 흡수했다. 셋의 협력 관계는 꽤 오래 이어졌고, 그 체계는 오랜 시간 동안 완벽한 하나의 프로세스를 이뤄왔다.
선발대 그린스킨의 침공으로 기간 시설과 차원 환경을 파괴하고,
리치 군주의 언데드가 넘쳐나는 시체로 병력을 충원해 생존자를 완벽하게 말살하고,
심연의 주민들이 차원을 잠식한다.
그러나 이 프로세스가 깨졌음에도 그린스킨을 ‘초록색 짐승’이라고 무시하던 리치 군주였다. 그렇기에 그린스킨이 이른 시기에 패배를 시인한 시점에서, 선발대와 비슷한 수준에서 진행된 이벤트는 생각과 다르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
그걸 인정하면 리치 군주는 자신이 천 년 동안 무시했던 그린스킨이 한 일을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인정하는 꼴이니까.
“그렇습니다. 쉰다섯 건의 이벤트가 발생했고, 그 중 이벤트가 종료된 건은 여섯 건입니다.”
오래된 아크 리치의 보고에 애써 꾹꾹 눌러 참았던 분노가 터져 나오며,
“뭐라?!!!”
탑의 상층부는 완벽하게 사라졌고, 보고를 위해 들어온 고위 언데드 중 절반이 소멸 직전까지 갔다.
“쯧.”
그제야 다시 분노를 가라앉힌 리치 군주는,
“황천의 군단장들이 이리 약해서야.”
뜻밖에도 남탓을 시전하며 소멸 직전인 고위 언데드를 권능으로 살려냈다. 그렇게 본인 때문에 소멸 직전까지 간 언데드를 되살리자마자,
“그래서?”
꺼낸 질문은 근본도 그리고 맥락도 없는 질문이었다.
“마흔아홉 건의 이벤트가 진행되고 있어서 최하급 언데드의 소비가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차원 지구의 가축들이 최하급 언데드와 하급 언데드 이벤트를 버틴다는 것은 결국 그것들을 처치한다는 뜻이고, 그건 곧 가축이 강해지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그렇구나.”
비로소 정신이 돌아왔는지 이제는 무턱대고 화를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겠지. 이대로라면 최하급, 하급 언데드는 투입되는 족족 시체 하나 건지지 못하겠구나.”
“따라서…….”
“하지만 이벤트는 계약에 포함된 항목이지 않느냐. 우리가 마음대로 그것에 손을 대는 것이 가능하겠느냐.”
리치 군주의 휘하 언데드는 모두 리치 군주의 권능 아래 묶여 있다. 리치 군주가 정신만 제대로 차리고 있다면 휘하에 있는 언데드들이 하고자 하는 말을 다 듣지 않고 알 수 있다.
육신과 영혼이 모두 리치 군주의 손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
그래서 리치 군주 휘하의 고위 언데드는 오히려 이런 대화가 이어질 때는 안심하곤 한다. 이 때의 리치 군주는 매우 이성적이라는 것이니까. 그건 조금 전 소멸 직전까지 갔었던 고위 언데들도 마찬가지였다.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 나온다. 그리고 존경 어린 시선으로 가장 오래된 아크 리치 데이몬을 바라본다.
“카르마 시스템이 그렇게 세세하게 보지 않을 겁니다. 이벤트를 조기에 끝내는 것이 아니니.”
“오호라! 천천히 수를 줄이자는 말이렷다?”
“그러하옵니다. 군주시여.”
“내가 왜 그래야 할까?”
금방이라도 좋다고 말할 것 같은 분위기였던 리치 군주가 변덕이 생긴 것처럼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되물었을 때, 방금까지 마음을 놓고 있던 황천의 11군단장을 비롯한 고위 언데들이 긴장에 몸이 뻣뻣해졌다.
“하급과 최하급 언데드를 이렇게 소비하면 군주께서 바라는 소망을 이룰 길이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
리치 군주.
그가 바라는 소망을 감히 입에 올린 아크 리치의 말에 그 뒤에 엎드려 있던 고위 언데드의 몸에서 진한 공포와 두려움이 흘러나온다.
그것은 리치 군주의 치부이며, 동시에 그의 힘의 원천이고, 또한 그가 심연에 쫓겨나는 순간 영혼을 걸고 외쳤던 간절한 열망이기도 했다.
금방이라도 폭탄이 터질 것 같은 조마조마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정적을 깰 수 있는 건 오직 한 명. 리치 군주뿐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긴장감에 없는 심장이 생겨 터져 죽을 것 같았던 공포를 맛보고 있던 이들의 정신을 깨운 것은 리치 군주였다.
“최하급 언데드가 사라지면 여의 소망이 멀어진다?”
“그렇습니다.”
“왜지?”
“그것은 군주께서 하찮은 저희에게 베풀어주신 권능이 ‘성장’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장내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는다. 공기가 수십 배는 무거워진 것 같은 착각에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바닥만 바라보는 언데드들은 어서 이 시간이 끝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성장. 그렇지. 성장이 여의 힘이지.”
성장.
언데드와 어울리지 않는 이 힘이 심연에서 흔하고 하찮았던 흑마법사가 리치 군주가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성장이 멈춰버린 언데드라는 종족에서 성장이라는 힘을 부여할 수 있는 고유 능력을 가지게 된 후부터 그는 강해졌다.
자신의 언데드가 성장하면 그에 비례하여 자신도 강해지는 고유 능력이었으니까.
그리고 당연한 원리겠지만, 하급 이하의 언데드가 만들기 더 쉽고, 진화하는데 필요한 카르마가 적게 들고, 더 빠르게 진화한다.
리치 군주가 그린스킨에 이어 두 번째로 차원 침공 역할을 담당하며 시체를 수집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크 리치 데이몬의 지적은 하나 같이 맞는 말이었다.
“좋다. 그리하라.”
그래서 리치 군주는 그걸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자평하기를 초록색 짐승과 다른 이성적으로 논리적인 존재라고 평가해 왔기에,
‘그럴 수는 없지. 여가 그럴 수는 없어. 쯧.’
더 그럴 수 없었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을 자존심이 상한다고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어머? 얘들 재미있는 짓 하네?]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이 가만히 보고 있었다. 마치 결정적인 순간을 노리는 파파라치처럼.
『아포칼립스에 나만 장르가 이상하다?』
심행 퓨전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