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제가, 저희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영주 님.>
혼란은 오래 가지 않았다. 소피아는 익숙하다는 듯이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고, 그들, 그러니까 창천의 날개 기사단은 내가 자신을 영겁의 침묵에서 꺼내 준 은인이며 또 자신들의 상관이라는 소개를 받았다.
그리고 소피아의 소개가 끝나는 순간 장난스럽던 분위기가 일변했다.
“영주 님. 저희가 무엇을 하면 될까요?”
제니퍼라고 소피아에게 불린 여인. 금빛 전신 갑옷을 입고 허리에 성스러운 검을 차고 있는 이 여인이 가장 먼저 나서며 오른손을 왼손 가슴에 올리며 정중하게 묻는다.
“일단은…….”
“예. 저희는 무엇이든 준비됐습니다! 명령을!”
“좀 씻고 쉬어. 밥도 좀 먹고.”
“예! 예?!”
순식간에 무언가 이유 없이 긴장감이 가득했던 방 안의 분위기가 깨진다. 그리고 실실 웃는 소피아의 웃음이 그 위를 팔랑거리며 날아다닌다.
“소피아를 소환할 때. 그 마지막 전투를 나도 봤거든. 아직 부상자도 좀 있는 것 같고. 당장 다들 옷에 피와 먼지가 가득하네. 내 상황이 어려웠어도 그런 너희를 바로 전장에 투입하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전황이 넉넉하고 여유로워. 그러니 내 말 대로 해.”
“…그!”
“됐어. 제니퍼. 영주 님 말씀대로 해. 일단 밥부터 먹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한숨 자고 나와. 마크는 부상자부터 데려와. 바로 치료해줄 테니까.”
제니퍼의 말을 소피아가 막았다. 그리고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내가 한 말을 재차 말하며 부상자를 귀신 같이 찾아내 빠르게 치료해 나갔다.
“저, 정말? 우리가 정말 쉬어도 돼?”
모두를 치료하고 자신 앞으로 돌아온 소피아아게 제니퍼가 묻자,
“응. 영주 님의 땅, 이 도시는 충분히 그래도 돼.”
소피아는 따뜻한 평온함이 깃든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듣고서야 창천의 날개 전원의 몸에 깃든 힘이 빠지는 게 눈에 보인다.
“잘 왔네. 내 영지에.”
“흑!”
누군가 그 원인을 딱히 꼬집어서 말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 * *
제니퍼는 영주의 방에서 나와 소피아의 안내를 따랐다. 제니퍼에게 이곳은 꿈에서나 그릴 법한 곳이었다. 내성 1층에는 언제든 음식을 먹을 수 있었고, 1인 1실이 기본 원칙이었다. 즉, 내 방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빌어먹을 냄새를 풍기거나 코를 고는 동료들과 함께 자야하는 내무실이 아니라.
그리고 각 방에는 방향만 돌리면 온수가 나오는 샤워 시설과 버튼을 누르면 용변이 사라지는 신기한 화장실이 존재했다.
“제니퍼……. 여긴 천국일까? 어쩌면 사실 우리는 죽은 게 아닐까?”
“그러게.”
불의 정령을 떠올릴 정도로 타는 불꽃 같은 빨간 머리의 앤이 하는 실없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동의할 정도로 그녀에게 이곳이 기이할 정도로 안온했고, 치명적일 정도로 좋았다.
“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물을 마음대로 써봤어. 욕조에 물을 가득 채우고 그 안에 신기한 입욕제? 이뇨제? 아무튼 그런 걸 넣고 거품을 일으키면서. 난 이제 죽어도 좋아.”
“그러게…….”
“앤. 제니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제야 살 만해진 건데. 죽긴 왜 죽어?”
앤이 일방적으로 떠들고 제니퍼는 멍해져서 대답을 반복하는 사이에 벌써 몇 잔째인지 모를 ‘콜라’라고 하는 신기한 음료수에 얼음을 왕창 넣어서 마시던 루이지가 그렇게 따지며 다가왔다.
“루이지. 흠. 그런데 다들 어때?”
“어떠냐니?”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다들 뭐해?”
“다들 한잠 자고 일어났지. 먹고 씻고, 푹 자고 맛있는 걸 먹고. 제니퍼 너는 잠이 덜 깬 것 같은데? 정신 차리라고. 네가 우리 지휘관이잖아?”
루이지는 그렇게 장난스럽게 말하면서 남은 콜라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래……. 그래야지. 아! 소피아는?”
“소피아? 글쎄. 우리가 여기 소환됐을 때를 빼고는 못 봤는데?”
제니퍼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피아가 어디 있는지 주변에 돌아다니는 인간에게 물어보려다가 그럴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이거?”
“소피아의 성력이네. 위치는 바로 근처인가?”
제니퍼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소피아 특유의 성력, 농밀하고 시원한 신성력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바쁘지 않은 걸음으로 내성 3층에서 1층으로 계단을 따라 천천히 내려오면서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기감에 제니퍼는 깨달았다.
자신이 머무는 숙소, 내성 주변에 어린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 바닥을 밟을 때마다 자근자근 하는 생명력 넘치는 풀을 밟는 소리. 깨끗하다 못해 상쾌하기까지 한 공기의 냄새. 나무 냄새. 물 냄새.
멸망을 바라보던 자신들은 이제는 잊어버린, 아주 오래 전에 경험했던 것들을 이 영지는 아무렇지 않게 일상처럼 누리고 사는 곳이라는 것을.
“소피.”
“어? 제니퍼. 더 쉬지? 벌써 나왔어?”
“우리 중, 누구도 4시간 이상 잘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걸? 너도 알잖아?”
“하긴. 그런데 여긴 괜찮아. 더 자도 되고, 더 마음을 놓아도 돼. 그런 곳이거든.”
“그렇게 보이긴 해. 그런데 넌 뭐 하는 거야?”
“나? 좀비를 잡고 있어.”
“응?”
“왜?”
그제야 제니퍼는 영지에 소환되고 거둬들였던 기감을 펼쳤다. 너울거리며 퍼져나가는 기감에 농사를 짓거나, 소와 양을 키우고, 배를 모는 영지민들이 잡혔고, 성벽을 넘어섰을 때.
“!!”
산자에 대한 악의로 점철된 것들이 느껴졌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제니퍼가 자신도 모르게 왼쪽 허리에 찬 검으로 손을 가져갈 때,
“괜찮아. 제니퍼.”
소피아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제니퍼를 진정시켰다. 여긴 정말 괜찮아. 괜찮아. 라는 말이 마치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처럼.
“밖의 좀비는?”
“영지민들이 나가서 사냥 중이야.”
제니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답한 소피아의 대답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곧 자신이 느낀 이상함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사냥?”
“응. 사냥. 방어가 아니라 사냥 중이야.”
“보러 갈래?”
“그래도……. 돼?”
“당연하지. 앞으로 우리가 살 곳이고, 지켜야 하는 곳인데. 다른 애들도 다 부르자!”
소피아는 해맑게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피아가 일어난 뒤에야 제니퍼는 소피아 뒤에 있던 커다란 아니, 거대한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이, 이, 이거?!”
“아! 맞아. 세계수야. 영주 님 거야. 대단하지?”
한껏 어깨가 올라간 소피아의 설명에 제니퍼는 어디서부터 딴죽을 걸어야 할지 몰랐다. 왜 그걸 네가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냐, 세계수가 한낱 인간의 소유물이 되는 게 말이 되느냐 등.
“어휴. 일단 가자.”
“그래!”
제니퍼는 소피아의 변한 모습이 기꺼웠다. 그녀가 어릴 때, 그리고 소피아도 어렸던 시절에, 그 철이 없어 보이고 어딘가 조금 멍청해 보이는 소피아의 모습이 좋았다.
“그래서 있지~. 제니퍼~! 내가 딱 영주 님께 말했지!”
재잘거리는 소피아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면서 제니퍼는 자신의 걸음을 따라 움직이는 땅을 한 번 보고, 스쳐 지나가는 영지의 풍경을 한 번 보며 감탄했다.
“여긴…….”
“응?”
“희망이 넘치는 땅이네.”
“맞아! 영주 님 덕분이야!”
영주 님 덕분이라는 말을 반복하는 사이 제니퍼는 성벽에 도착했다. 경쾌하게 성벽을 오르는 소피아의 뒤를 따라 오른 성벽 위의 풍경은,
“이제 일주일 아니지, 6일 하고 14시간 남았대!”
“좋아! 나 오늘부터 일주일 간 안 잔다!”
“포인트 달달하고!”
하늘에서 좀비가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인간들은 정말 방어나 저지가 아니라 ‘사냥’하는 분위기였다. 그것도 축제처럼. 제니퍼는 모르겠지만, 이건 게임이라는 문화에 익숙한 지구인들이기에 더 그런 분위기가 나는 거였다.
“벌써 일어났나? 더 쉬어도 되는데?”
언제 다가왔는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영주의 목소리에 제니퍼는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여, 영주 님.”
“응. 그래. 다시 보니 반가워. 그나저나 보기에 어때?”
턱으로 영지 바깥,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곳을 가리키며 묻는 영주의 말에 제니퍼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가,
“즐거워……. 보입니다.”
그냥 솔직하게 답했다. 그러자 정답을 말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영주.
“저들은 실시간으로 강해지고 있어서 좋은 거야. 겸사겸사 자신과 가족이 머무는 영지도 지키면서.”
“자신의 땅을 지키는 게 겸사겸사인 겁니까?”
“응.”
그리고 영주는 멸말을 향해 나가고 있는 차원의 거주민인 인간들이 어떤 축복을 받았고, 어떻게 강해지는 건지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침략자를 사냥하면서 획득하는 재화로 강해진다……라.”
좋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다. 인간이 선하다면 말이다.
“딴 생각 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글쎄……. 모르지?”
인간은 선하지 않다. 그건 제니퍼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멸망으로 달려가는 순간에도 탐욕을 위해 동료를 배신하거나, 군대를 사지로 몰아넣는 일이 벌어진다. 그걸 수도 없이 지켜본 제니퍼가 걱정을 드러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리라.
“괜찮으십니까?”
“뭐 이미 말했듯이 나도 모르지. 그런데 걱정은 안 해.”
“저들을 믿으십니까?”
“응? 아, 그런 뜻이 아니야. 딴 생각을 할지 안 할지를 모른다는 거였어. 딴 생각을 품고 헛짓거리를 하면 그걸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어서 걱정하지 않는다는 거야. 주변에 안 보여?”
“아!”
영주의 추가적인 설명을 듣고서야 제니퍼는 비로소 영지 곳곳과 성벽 위에 흩어져 있는 병사가 눈에 들어왔다. 등에 비껴 맨 활과 허리와 허벅지에 수도 없이 결착 되어 있는 단도 그리고 은은하게 느껴지는 정령력까지.
감시자들이다.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그 설명을 듣고서야 제니퍼는 눈앞에 선 남자가 제대로 보였다. 한없이, 어떤 의미에서는 멍청해 보일 정도로 선하게 느껴졌던 남자가 사실은 과거의 자신보다 더 이성적이고 냉철한 존재라는 것을.
“제가, 저희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영주 님.”
『아포칼립스에 나만 장르가 이상하다?』
심행 퓨전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