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자판기와 상점 그리고 일상>
나흘 전. 그러니까 좀비 이벤트가 벌어지고 좀비 이벤트 규모가 줄어들기 시작해서 여유가 생겨 활시위를 당기기보다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점점 늘어나던 때였다.
일반 능력 [영지 관리]에 깜빡거리면서 자신의 존재를 피력하는 게 내성을 감싸고 있는 내성 벽 주변에 있었다. 그건 아마도,
‘자판기겠지?’
[자판기]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그것도 그냥 자판기가 아니라 고오오오급 자판기. 오가면서 몇 번 보긴 했지만 그걸 신경 쓰지 못한 것은 그만큼 좀비의 침공 기세가 폭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한가한데. [자판기]나 보고 올까? 겸사겸사 [상점]이라는 것도?”
“좋아요. 주인님.”
언제나처럼 성벽 아래 대기하고 있던 전용 마차에 오르기 무섭게 주변 풍경이 빠르게 뒤로 멀어진다. 성벽에서 내성까지 도착은 10분이 채 되지 않았다.
푸른색 홀로그램이 내성으로 들어가는 문 옆에 반짝이며 자신의 존재감을 자랑한다. 보통의 과자 같은 게 들어 있는, 미국 드라마에서 보면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가 갇히기도 하는 그런 큰 자판기가 네 개는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어라 이거……. 왜 커?”
엄청 큰 자판기가 있었다. 아니, 이걸 자판기라고 불러도 될까 싶을 만큼 컸다.
“일단 설치부터.”
『영지 관리 메뉴를 호출합니다.』
『이벤트 보상으로 받은 [자판기]를 설치합니다.』
『[자판기] 설치 완료! [자판기]에 기본 물품이 등록됩니다. [딱딱한 빵]과 [식수 200mL]가 등록되었습니다. 기본 물품은 가격이 저렴한 대신 개인당 하루에 한 번만 구매할 수 있습니다.』
『[자판기]에 등록된 물품에 구매로 획득한 카르마 포인트는 [자판기]가 50%, 쉘터의 주인인 [영주]가 50%의 비율로 분배합니다.』
『특이 사항 발생! [자판기]와 연동 가능한 건물이 존재합니다. 연동하시겠습니까?』
응? 뭐? 아!
“[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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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 [Rank: Green]
(전략)
4. 「자판기」 생성 이후, 창고의 물건을 자판기에 등록할 수 있습니다. 모든 자원은 자판기 최초 등록 시, 1개를 영구적으로 소비합니다. 단, 창고 랭크가 일정 랭크 이상 도달해 있어야 합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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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 건물 중, 창고의 설명에 분명히 자판기와 관련된 것이 있었다. 그래서 창고에 처음 들어갔을 때 엄청 기대하기도 했던 게 떠오른다.
“연동하겠어.”
『영지 건물 [창고]와 [행정청]이 [자판기]와 연동됩니다. 31%……69%……96%……100%. 완료.』
시스템의 ‘완료’라는 단어가 떨어지기 무섭게 영지 전체를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푸른색 마력이 자판기를 중심으로 뻗어나간다.
“허!”
『[자판기]와 [창고]가 동기화되었습니다. [창고]에 보관한 물건 하나를 영구 소멸해 [자판기]에 등록할 수 있습니다.』
『[자판기]와 [행정청]이 동기화되었습니다. [행정청]의 영향으로 [자판기]에 진열되는 물품의 최대치가 [행정청]의 랭크에 맞춰 늘어납니다. 현재 랭크 Green(5단계). 625개가 추가됩니다.』
[행정청]의 랭크에 맞춰서 자판기에 등록할 수 있는 물품의 한계가 늘어난다는 건 몰랐던 사실이다. 카르마 시스템 메시지가 등장하자마자 어떤 방식인지 저절로 이해가 됐다.
화이트(White) 랭크에서는 1개 추가.
레드(Red) 랭크에서는 5개 추가.
오렌지(Orange) 랭크에서 25개 추가.
옐로(Yellow) 랭크는 125개 추가.
그린(Green) 랭크에 도달하면 무려 625만 개가 추가 된다.
“창고에서 등록할 수 있는 모든 물품을 등록해.”
『영지 건물 [창고]에서 [자판기]에 8,771개의 등록 가능한 물품이 있습니다. 모두 등록하시겠습니까? [자판기]의 등록 슬롯이 부족합니다. 추가 슬롯 확장을 위해서는 [행정청]의 랭크를 업그레이드해 주십시오.』
“어, 엄청 많네? 창고에 그 정도나 되는 물건이 있었다고?”
『[행정청]을 업그레이드하시겠습니까? [행정청]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는 영지 랭크를 업그레이드해야 합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내가 그걸 어떻게 업그레이드하니.
“일단 상할 수 있는 것들부터 등록할게. 육류나 계란 냉장, 냉동 보관해야 하는 신선 식품들 말이야.”
『냉장·냉동 보관 중인 물품 중, 등록 가능한 417개의 물품을 등록하겠습니까?』
“그래. 등록해.”
『등록 완료. 상품의 품질과 가치에 따라 [자판기]에서 등록되는 물품의 가격이 결정됩니다. 2.81초가 소요됩니다. 완료.』
“호오? 그럼 뭐 한우 꽃등심은 비싸고, 돼지고기 앞다리살은 저렴하고 그런 건가?”
『비슷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육류의 부위에 따른 가격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 않습니다. 오히려 육류의 종류와 영지에서 수급 가능한 식품인지 아닌지가 가격을 결정하는데 더 큰 영향을 미칩니다.』
아아. 그러니까 농장 같은 곳에서 획득이 가능하냐 아니냐에 따라 다르다는 거네. 맞지?
[맞습니다. 마스터.]
“좋아. 그럼 나머지는 자극적인 지구인의 입맛을 사로잡을 것들을 등록해야겠다. 일단 라면하고, 탄산음료. 그리고 맥주와 와인 정도? 시원하게 부탁해?”
『보관 중인 물품 중, 등록 가능한 98개의 물품을 등록하겠습니까?』
“그래.”
『등록 완료. 상품의 품질과 가치에 따라 [자판기]에서 등록되는 물품의 가격이 결정됩니다. 완료.』
“그런데 창고에 있는 물건 중에 등록 안 되는 것도 있어?”
『총 1,816가지의 물품은 [자판기]에 등록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두 종류의 컨테이너와 포장을 위해 사용된 비닐, 각종 공구, 철근과 시멘트 같은 건설자제 그리고 ‘자두 맛 사탕의 껍데기’?』
“응?”
『…….』
어떤 놈이 창고에서 몰래 사탕 먹고 쓰레기를!
“미안하다. 내가. 이, 일단 내가 말한 건 모두 등록한 거지?”
『그렇습니다.』
시스템의 대답에 나는 [자판기] 앞에 섰다.
“어디 보자.”
거대한 [자판기]는 그 크기에 어울리게 전면부가 전부 터치패널로 이뤄져 있었다. 대형 TV보다 크고 넓은 터치패널은 단순히 크다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일단 여러 사람이 동시에 이용할 수 있는 기능이 있었고, 무엇보다 카테고리 별로 잘 정돈되어 있었다.
세부 카테고리에 들어가면 그 카테고리에 해당하는 물품의 3차원으로 실물로 투사되는 방식이다.
최초 [자판기] 등록 시에는 [기본] 카테고리만 있었는데, 지금은 [식품]이라는 대분류가 떡하니 존재한다.
그걸 누르면, [기본], [과일], [향신료], [음료], [면/통조림/가공식품], [육류]라는 소분류의 카테고리가 등장한다. 이 중에서 [기본] 카테고리를 선택하면 거기엔 [딱딱한 빵]과 [식수 200mL]만이 존재한다.
이게 바로 [자판기]가 공통적으로 기본으로 제공하는 음식이며, 내가 회귀 전 죽지 못하고 식물인간이 되어야만 했던 이유였다.
‘뭐, 이제는 괜찮아.’
그저 그것을 본 것만으로도 트라우마가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지만, 이제는 제법 떨쳐냈다.
[자판기]가 [창고]와 연동이 되면서 회귀 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정도의 물품이 등록되고 불과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영지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콜라와 사이다. 자극적인 라면. 고기. 계란.
멸망 전에 너무 쉽게 구했던 음식과 재료다.
이것을 다시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건 ‘인간다운’ 생활을 꿈꾼다는 뜻이다.
생존자들은 그것을 열망한다. 창천의 날개 기사단이 소환된 이후, 내성에서 나오는 뜨거운 물과 입욕제만으로도 눈물을 흘린 게 괜히 그런 게 아니다.
그렇게 [자판기]에 등록된 물건을 빠르게 살피고 나서,
“[도로]와 [연구소] 그리고 [행정청]에 [자판기]까지 있으니까. 이제 [창고]의 마지막 기능을 사용할 수 있겠네?”
[창고]의 마지막 기능을 언급했다. [창고]라는 건물이 생긴 이후부터 기대하던 기능은,
『몬스터 부산물 연구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맞습니다. 해당 기능을 활성화할 시, 영지에 소속된 이들의 사냥으로 사망한 몬스터 사체를 확률적으로 창고에 자동 입고합니다. [연구소]의 몬스터 부산물 연구를 활성화하시겠습니까?』
“당연하지.”
몬스터 부산물 연구라는 것이다. 언젠가 설명했던 것 같은데, 각성자가 사냥하는 몬스터는 지구에 스며든다. 아이템이 탄생하는 것도 그것 때문이고.
하지만 몬스터 부산물 연구 기능을 활성화 되면 이제 확률적으로 땅으로 흡수되지 않은 온전한 몬스터 사체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건 연구소로 자동으로 이동해서 연구를 거쳐 대장간이나 후에 등장한 다른 영지 건물에서 여러 분야에서 활용하게 될 거다.
특히 좀비는 그나마 보잘것없이 독 같은 거나 만들 테지만,
“악마. 그 빌어먹을 놈들은 분명히 ‘요술’ 같은 걸 썼으니까.”
좀비와 함께 등장하는 악마는 진짜 버릴 게 없다. 마력 기관인 심장부터 초능력 같은 이능을 다루는 뿔과 힘줄, 피, 손톱 같은 것까지.
그렇다고 좀비가 쓰레기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좀비 시체에서 추출한 독은 기이하게도 악마에게 먹힌다. 이상하지? 좀비 틈에서 몰래 요술을 날리는 놈들은데? 그런데 시스템이 그렇다.
이걸 어떻게 알고 있냐고?
회귀 전에 몬스터 사체를 이용하던 괴짜가 있었다. 좀비의 살점을 혀에 대보기도 하고, 고유 능력이었는지 몬스터가 땅에 스며들기 전에 일부를 건져서 그걸로 여러 가지를 만들던 사람.
평화롭던 시절 전문 장인 너튜브 채널처럼, 그런 영상을 만들어 올렸고 제법 인기가 있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신기한 이름이었는데.”
아무튼, 그런 사람이 있었다. 즉, 이제부터 잡는 좀비를 비롯한 언데드와 악마종은 모두 제법 그럴듯한 재료로 변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재료는 [상점]에서 판매할 예정이다.
“여기가 적당하겠네.”
자판기 옆에 내성으로 들어가는 커다란 문 왼쪽에 설치가 가능하다는 초록색 홀로그램이 떠오르는 것을 확인하고 바로 [상점]을 설치했다.
[자판기]와 마찬가지로 [상점]은 영지 건물과 다르게 설치하겠다는 의지를 전하기 무섭게,
『영지 관리 메뉴를 호출합니다.』
『이벤트 보상으로 받은 [상점]을 설치합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출력되고 바로 설치가 됐다. 그리고 건설된 3층 높이의 [상점]은 어딘가 익숙했다.
“음……. 다있소?”
균일가 생활용품 매장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건물은 검은색의 특이한 재질의 나무와 유리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이상하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진열된 상품이 하나도 없었다.
『[상점]은 쉘터 소속으로 인증 받은 존재만 방문할 수 있습니다.』
『[상점] 이용을 허가 받은 존재는 지정된 상품을 판매와 구매할 수 있습니다. 거래에 사용되는 재화는 카르마 포인트이며, 거래 수수료는 판매자와 구매자 모두 일괄 15%입니다.』
『쉘터에 설치된 [자판기]에 등록된 물품을 거래할 수 없습니다. 다만 [자판기]에 등록된 물품의 가공을 거친 상품이라면 판매와 구매할 수 있습니다.』
내가 [상점] 안으로 들어서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시스템 메시지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소리를 해대는 것처럼 보이는 시스템 메시지인데 그 내막을 살펴보면 각성자들이 기겁할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상품으로 등록되면 사고팔 수 있다고? 카르마 포인트로?”
“그렇다면?”
“음. 카르마 포인트의 ‘거래’가 가능해지는데?”
물론 직접적으로 개인 간 거래가 아니다. 물품을 사고파는 과정에서 생기는 간접적인 거래였지만, 그것만 해도 어딘가?
“이, 이건! 어, 엄청나잖아?!”
처음에는 [자판기]의 등장과 8천 개가 넘는 물품이 등록되면서 [상점]에 관심도 주지 않았지만, 이제 보니까 왜 이걸 무려 권능을 다루는 그린스킨 사냥 ‘업적 보상’이라고 했는지 이해했다.
『아포칼립스에 나만 장르가 이상하다?』
심행 퓨전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