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희망과 행복의 결실>
카르마 포인트의 교환과 순환이 일어나면서 그린스킨 때와 다르게 영지에 속한 생존자들은 희망이라는 걸 품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무 걱정 없이 일터로 나가는 삶. 가능한 걸까?’
‘결혼이라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 정도라면?’
‘나와 우리 그이의 아이. 아이를 낳아도 될 것 같아.’
아침을 시작하는 영지민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보였다.
“영쭈님!”
이요한의 옆에서 애착 이불을 쥐고 있던 리리노가 그 소중한 애착 이불을 손에 놓아 버리고 이요한 앞에 서서 양팔을 활짝 벌린다. 이요한에게서 무언가를 보호하려는 것처럼.
“에휴.”
그리고 이요한은 이런 장면이 익숙하다못해 질릴 지경인 것처럼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오빠!”
유다연이 뛰어들 듯이 날아올라 이요한에게 달려들었다. 이대로라면 이요한에게 뛰어든 유다연은 물론이고 이요한과 그 앞에 굳은 얼굴로 양팔을 벌리고 있는 아이까지 다칠 법하지만,
“다친다니까.”
이요한이 대수롭지 않게 팔을 휘젓는 것만으로 유다연은 달려들던 몸이 허공에 멈춘 상대로 고정되었다.
“헤헤. 오빠! 좋은 아침! 리리노도 안녕?”
“나빠! 나쁜 아줌마!”
리리노는 은근슬쩍 자신을 밀치고 이요한의 품에 안기는 유다연을 질색했다. 그 모습조차 귀여워 보이고, 유다연도 귀엽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일부러 더 그러는 거지만,
“이리 와. 리리노.”
“영쭈님. 저 아줌마가. 훌쩍!”
이요한은 아침마다 아이를 울리는 유다연의 정신세계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 그래. 여기. 이불. 밥 마저 먹어야지?”
“넹. 훌쩍.”
코를 먹으면서 같이 귀여운 포크를 손에 쥐고 꼬박꼬박 대답하는 리리노의 모습에 서다혜와 유다연은 기어이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풉! 아유! 우리 리리노! 귀여워 죽겠네! 아줌마랑 같이 살까? 응? 아줌마 딸 할래?”
특히나 서다혜는 리리노를 예뻐했다. 그의 남편인 독고서인도 그렇고.
“웅? 리리노 엄마? 그럼 예쁜 아줌마 영쭈님하고 겨론 해?”
“응?”
“리리노는 영쭈님 딸 하거야.”
“…엥?”
“영쭈님하고 겨론해. 그럼. 리리노 엄마 할 수 이써.”
소시지 야채 볶음에 있는 문어 모양의 빨간 소시지를 포크로 집어 먹으면서 아주 당차게 자신의 꿈을 말하면서 서다혜가 말한 ‘아줌마 딸’을 삼을 수 있는 방법까지 알려주는 리리노의 모습에,
“으아아아아. 심장에 해로워…….”
서다혜는 그대로 쓰러지는 것처럼 바닥에 주저앉았다. 좋아서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여보!”
[내성] 2층에서 계단을 타고 내려오던 독고서인이 그런 서다혜에 놀라 마력까지 사용해서 달려와 그녀를 받았다. 일반적인 속도가 아니었고, 현실에서 물리 법칙은 항상 적용된다. 그 속도의 여파로 후폭풍으로 서다혜 근처에 있던 식기가 뒤집어졌다.
“내……, 문어. 소시지.”
당연히 서다혜가 리리노 옆에 딱 붙어 있었으니, 뒤집어진 음식의 주인은 리리노였다.
“곰탱이 아찌. 나빠!”
“어? 어. 미, 미안해. 리리노야. 아, 아저씨가 다시 사줄게? 응?”
평소에 서다혜만큼이나 리리노를 좋아하고 아끼는 독고서인은 곰 같은 덩치로 자신의 무릎 정도 밖에 오지 않는 아이에게 쩔쩔매고 있었다.
“어휴. 이 빌……. 흠흠. 이 나쁜 아포칼립스에 주변에 정상인이 한 명도 없네.”
이요한이 그렇게 투덜대고는 마력으로 고정한 자신의 반찬이 담긴 접시를 리리노에게 건네며 아이를 달랬다.
“영쭈님! 좋아!”
리리노는 좋아하는 문어 모양의 소시지 반찬이 생긴 것도 좋았고, 그걸 이요한이 줬다는 것도 좋았다. 헤실헤실 웃으면서 포크로 소시지를 콕 찍고 잠시 고민하더니,
“영쭈님. 아~.”
이요한에게 내밀었다. 마치 내가 이거 정말 아끼는 건데, 너라서 주는 거야. 라는 얼굴로.
“풉!”
“크크큭!”
그 귀여운 행동이 또 식당에 웃음이 번지게 한다.
따지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이다. 어리고 귀여운 아이의 사랑스러운 행동이었지만, 아포칼립스라는 상황에서 보면 무시하고 지나칠 법한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모두가 행복하게 웃는다. 꾸며내지 않고 진심으로 행복한 기색을 온몸으로 풍겨내며.
이것 역시 아포칼립스라고는 여길 수 없는 광경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성벽 밖에서 좀비를 가득 실은 운석이 떨어지고 있다고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기도 하다.
[대장간]에서 라쿤 장인 다섯 명과 대장장이 각성자가 찍어내는 장비.
내성에 속한 다섯 [요리사]와 각성자 [요리사]가 만들어 내는 예전을 그리워할 법한 요리.
그리고 안온하고 따뜻한 나만의 [집].
의식주가 해결되고 이백만이 넘는 영지민 사이에서 불합리한 일이나,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다. 아포칼립스를 부르는 괴물들에게 안전하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영지민은 ‘행복’이나 ‘희망’을 품게 되고, 그것은 이렇게 가벼운 일에도 웃을 수 있는 순간까지 왔다.
“아, 오빠.”
그리고 앞서 말한 여러 희망과 행복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을 유다연이 입에 담았다.
“…뭘 해달라고? 잠깐만 그 전에. 아이가 태어났다고? 출산을 했어? 어디서? 아니지. 그것보다, 이 상황에서 아이를 갖겠다고 한 부부가 있어?”
이요한은 가장 먼저 받은 충격은 영지에 태어난 아이가 있으니, 이름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였다. 그런 걸 왜 자신에게 부탁한단 말인가? 설기 이름을 지을 때도 엄청 고생했는데.
그리고 이어서 영지 안에서 출산이 이뤄졌다는 것에 놀라고, 다시 이런 시기에 아이를 갖기고 한 부부가 있다는 것에 또 놀란다.
“영주님. 좋은 아침이에요. 무슨 이야기하고 계셨어요?”
“그거 알아? 소피아? 영지에 첫 번째로 출산한 부부가 있대. 그러니까 이 멸망에서 아기가 태어난 거지. 세상에!”
“네? 아이를 갖기로 한 부부 엄청 많은데요? 이미 임신한 엄마들도 꽤 돼요?”
“…그래?”
이요한이 이해하지 못한 것은 그의 생각이 아직 회귀 전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회귀 전에는 어떤 쉘터든 부부가 원해서 아이를 가지는 경우는 없었다. 아이가 태어나는 건 다들 원치 않은 과정에서 생겨나곤 했다.
위력에 의한 강압적인 성관계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그는 전투 계열 클래스의 여자는 임신이 어렵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고.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상황을 대하는 영지 소속 각성자들의 인식이 변했고, 무엇보다 세계수의 축복과 천(千)급 그린스킨 처치 보상을 그는 잊고 있었다. 생산율 증가. 무려 200%나 증가한다.
“아니, 잠깐만. 꽤 된다고?? 꽤?”
“네. 저기 서다혜랑 독고서인처럼 부부가 영지민이 된 경우도 있지만, 영지 안에서 눈이 맞아서 결혼한 부부가 된 케이스도 많아요. 영지민이 자그마치 227만이라고요.”
“그런데 그런 정보를 용케도 올리비아가 아니라, 소피아 네가 알고 있네?”
“그럼요! 영지에서 만나 결혼한 커플이나, 임신한 부부는 저한테 축복을 받으러 오시거든요!”
“아아.”
소피아의 축복이라면 뭐 나쁘지 않지. 그것도 지금과 같은 시기에 임신을 했다면, 모든 것을 조심해야 할 테니까. 세계수가 있어서 공기와 물이 오염되지 않는다고 해도, 임산부는 여러 부분에서 조심해야 하니까.
멸망 전처럼 산부인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아이가 태어났다고? 출산은 어떻게 한 거지?”
“네? 그거야 [치료소]에 [의사]와 [전문의]가 있잖아요? 그리고 사제 계열 각성자의 신성 주문이 더해지면 편하게 아이가 슝~하고 나오죠.”
“슝?”
“네.”
“응?”
“네?”
뭔가 서로 문화적 차이에 의해 대화가 안 되는 것 같은 상황이었지만, 이요한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이런 세상에서 축복을 받으며 태어난 새 생명이란, 희망의 정화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테니까.
“아무튼, 아이 이름을 내가 짓는 건 좀 그래. 그건 거절하고, 대신에 아이가 다른 사람이 봐도 괜찮을 정도가 되면 한 번 보는 건 오케이.”
“네~. 그렇게 전할게요. 오빠. 저는 다 먹었어요! 사냥 가기 전에 설기 좀 보고 올게요!”
프랑스 가정식을 아침으로 먹으면서 늘어졌던 유다연이 통통 뛰면서 계단으로 올라간다.
“데이비드. 오늘 광산에 가서 테라토늄을 발견하면 좀 많이 캐다 줘. 라쿤 장인님이 필요하시다고 하네?”
“아아. 그러지. 테라토늄이면 합금을 만드실 생각이신가?”
“모르지. 난 아직 배우는 중이라서. 라쿤 장인님도 달달한 거 엄청 좋아하시니까. [상점]에 장비 판매해서 [자판기]에서 콜라 뽑아 드시려는 걸지도 모르지.”
“오! 메이드 바이 라쿤이면 엄청 유명하잖나! 또 피가 튀겠구만.”
식당에는 이른 아침의 일상을 시작하는 생산 계열 각성자들이 모여서 시끌벅적해졌다. 한참을 그 광경을 물끄러미 보며 감회에 젖은 이요한이,
“좋네.”
자신도 모르게 생각을 감탄으로 중얼거렸을 때,
“오빠아!!”
계단으로 올라갔던 유다연이 식당의 문을 부술 것처럼 열고 들이닥쳤다.
‘그래. 오늘은 정상적으로 넘어간다 했다. 내가.’
“오빠! 오빠!”
“무슨 일인데?”
“서, 설기! 설기가!”
“어? 설기?”
진화 과정에 들어간 자이언트 윙 샤벨 타이거. 영지민이 사랑하는 귀염둥이. 영주 전용 탈 것인 설기는 오랫동안 자고 있었다.
“설기가!”
“설기가 왜?! 아파?!”
“깨어났어요!!”
“……그걸 왜 그렇게 말해!!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잖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서, 서, 설기가!!”
“설기가 왜?”
이요한이 유다연이 말을 더듬는 것에 답답해서 막 식당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먀아~.”
오랜만에 들려오는 고양이의 울음과 함께 이요한의 품 안으로 새하얀 털뭉치‘들’이 뛰어들었다.
“하하하. 우리 애기! 왜 왔어. 아빠가 갈 텐……? 잠깐만. 털뭉치들? 들이라고?”
지정석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슴에 안겨 식빵을 굽는 설기는 그대로였지만,
“너……. 임신했던 거니?”
설기 주변에 작은 흰색 고양이가 무려 셋이나 더 있었다.
“먀아~?”
물론 설기는 그게 무슨 개소리야? 라는 뜻으로 대답을 대신했지만.
『아포칼립스에 나만 장르가 이상하다?』
심행 퓨전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