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존경의 의미를 담아 마스터라고 부른다.>
이요한이 블루 랭크라는 거대한 벽을 넘기 위해 시스템에 의해 강제로 정신을 잃고 나서 성벽 밖으로 갔던 지의사들이 하나둘 복귀했다.
내성으로 들어온 그들은,
“영주님께서 벽을 넘는 중이십니다. 최대한 조용히 보내시길 부탁합니다.”
고용인에게 충고와 당부를 들었다. 어딘가 뉘앙스가 조금 다른 묵직한 충고에 서로 눈빛을 주고받던 이들은 곧장 이요한의 방이 있는 [내성] 최상층으로 달렸다.
그리고 굳게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했으나,
“안 열려.”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문고리는 움직이는데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건 안에서 문을 막고 있다는 뜻이라는 걸 짐작한 이들이 문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순간,
[조용히. 소란 피우지 말 것. 각자 생활에 충실. 주인님께서는 문제없을 것. 안정 중요.]
그들의 귓가에 엘리아나의 차가운 목소리가 맴돈다. 평소 엘리아나가 바람의 정령을 통해 정보를 전달할 때 사용하는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기에 익숙하지만,
“아오! 괜히 장비 확인한다고 나가서는!!”
“젠장! 볼 수가 없으니까 답답해 죽겠네!”
“문제가 없을 거라고? 문제가 있거나 없는 걸 거론할 정도로 상황이 별로인 거야?”
…
눈으로 볼 수가 없고, 도대체 왜 ‘문제’라는 걸 언급할 만한 상황이 벌어진 건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구 출신의 각성자인 지의사들이나 이요한이 생각하는 게 같았기 때문이다.
신체 스탯과 특수 스탯을 올리려면 카르마 포인트를 쓰면 된다.
이게 지구의 각성자에겐 상식이다.
반면,
[블루(Blue) 랭크. 그곳에 도달하고 위해서는 벽을 넘어야 하기에 존경의 의미를 담아 마스터라고 부른다.]
이게 타 차원 출신, 엘리아나나 소피아 그리고 고용인들에게는 상식이다. 마스터. 괴물이라고 불리는 존재이며, 거대한 벽을 넘어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
단순히 카르마 포인트를 사용해서 넘거나 부술 수 있는 벽이 아니라는 거다.
양측의 어마어마한 차이의 상식이 이런 답답하고 기묘한 상황을 만들었다.
엘리아나나 소피아가 지구의 각성자 시스템을 이해했다면 조금 더 여유롭게 지의사들을 대했을 텐데, 그들이 아는 상식에서는 벽을 넘을 때는 조용하고 안전한 곳에서 조심히 넘어도 실패할 확률이 있는 과정이니 평소와 달리 빡빡하게 그들을 대하는 거다.
“진정들 해요.”
어쩌면 이번 일을 계기로 서로 감정의 골이 깊어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유다연이 평소와 다르게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동안 다들 열심히 했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우리보다 오빠가 더 고생했어요. 그거 알아요? 이벤트 내내 오빠는 하루에 1시간만 잤어요. 나머지 시간은 항상 깨어 있었다고요.”
알고 있던 지의사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고, 모르고 있던 지의사는 놀란 얼굴을 했다.
“오빠가 왜 깨어 있었을까요? 카르마 포인트 더 먹겠다고?”
“푸후. 그럴 리가. 카르마 포인트가 목적이라면 보스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걸?”
올리비아가 과장된 제스처로 웃으면서 대꾸했다.
“맞아요.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지면 대응하기 위해서 그랬던 거예요. 본인은 잘 모르지만, 오빠는 위기 대처 능력이 뛰어나요. 그 순간에 가장 필요한 것을 빠르게 판단해서 처리할 줄 알죠. 그래서 자는 시간을 줄였던 거였고요.”
“맞아. 보스는 본인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엄청 유능하시지.”
“그러니까 이제 우리도 정신을 좀 차릴 필요가 있어요. 인정하기 싫지만, 엘리아나 언니가 오빠를 생각하는 마음은 저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 않을 거예요. 비록 ‘문제’라는 단어를 언급했지만, 그 문제는 생기지 않을 거고요.”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거니?”
지금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어딘가 좀 불안해 보이던 사나스 샤인스가 답을 구하는 것처럼 물었다. 생육(生育)의 사제이자, 육감적인 몸매에 어울리지 않게 내성적인 그녀가 이렇게 말을 자르는 것처럼 먼저 말을 꺼내 물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지금 얼마나 불안해하는지 말해준다.
“우리도 좀 이제 성장해야죠.”
“성장? 카르마 포인트를 말하는 거야?”
사나스의 물음에 고개를 좌우로 저은 유다연이 어린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진지하고 연륜이 느껴지는 아우라를 풍기며 답했다.
“우리는 놀러 온 게 아니잖아요. 여기 서바이벌 캠프 같은 게 아니에요. 생존을 걸고 싸우는 곳이지.”
“…….”
“우린 첫날부터 요한 오빠 덕분에 먹는 것, 자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지도 않았고 그린스킨에게 죽거나 겁탈당할 수 있다는 공포를 느끼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부터도 그래요.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이제 유다연이 하려는 말의 뉘앙스가 뭔지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안과 불만으로 가득하던 공기가 변했다.
“난 알아들었어. 일단 그럼 나는 [기사단 숙소]에 들렀다가 [병영]에 들러서 영지 치안 관리를 좀 더 타이트하게 하지.”
네이선 깁스가 검과 방패를 점검하면서 그렇게 말하고 계단으로 향했다. 그런 네이선의 뒤를 따라서 루크와 헌터를 필두로 몇몇 지의사들이 따라나섰다.
“저는 보스가 깨어나실 때까지 영지의 전체적인 상황을 점검해야겠어요. [행정청]에 들러야겠네요. 이사벨라 바람의 정령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래. 가자. 올리비아.”
올리비아는 정령사인 이사벨라 노아를 데리고 계단으로 향했다.
“음. 나는 안전지대 경계선을 둘러보고 올게. 저주 함정 설치도 해야 해. 좀비가 문제가 아니라, 약탈자 같은 놈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도와줄 사람?”
네이비 위치 캐롤라인 후드의 말에 지원자가 손을 들었고 그들이 또 내려갔다.
“헤이즐. 나랑 6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에 결계를 설치하자.”
“알았어. 적의를 감지하는 결계가 필요한 거지? 세이디.”
공간 술사인 세이디 월터스가 결계사인 헤이즐 베이츠와 함께 계단으로 내려가고 또 그 뒤를 이어 몇몇이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은 광전사 릴리 로즈와 유다연이었다.
“음. 난 솔직히 말하면 내게 어울리는 일이 없는 것 같아. 너도 알겠지만, 내가 능력을 발현하면 될 일도 안 되거든.”
릴리 로즈가 민망하다는 듯이 양 볼을 붉히며 그렇게 입을 열자,
“아니. 릴리, 넌 나랑 할 일이 있어.”
유다연이 릴리 로즈의 말을 반박하며 그녀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갔다. 1층으로 향한 유다연과 릴리 로즈는 식당 앞에서 내성 문이 열릴 때마다 고개를 들었다가 실망하는 아이를 발견했다.
“리리노.”
“…리리노는 영쭈님 기다려. 나쁜 아줌마는 저리 가.”
애착 이불인 분홍 이불을 품에 안고 그렇게 말하는 리리노를 보면서 유다연은 지금까지 억지로, 애써 참고 있던 설움과 슬픔 그리고 이요한에 대한 걱정이 울컥 올라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리리노.”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인지하기도 전에 유다연은 리리노를 조심히 그러나 꼭 끌어안았다.
“…울어?”
“…….”
유다연이 회귀 전의 ‘기억’을 주입받았다고 해도 그녀는 이제 스무 살이 된 젊고 어린 여자일 뿐이다. 그런 그녀에게 이요한의 존재는 유일하게 회귀 전 기억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고, 툴툴대면서도 자신의 장난 섞인 애정을 받아주는 고맙고 좋은 사람이었다. 의지가 되고, 기댈 수 있고, 무슨 일이 벌어져도 특유의 그 귀찮다는 얼굴로 대수롭지 않게 해결하는 믿음직한 남자.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같은 지구의 의지의 사제들에게 말을 꺼냈지만, 누구보다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이 유다연이었다.
“울지 마……. 나쁜 아줌마라고 한 거……. 리리노가 사과할게. 이제 그냥 아줌마라고 부를게.”
작은 손으로 자신의 등을 토닥거리는 리리노의 손길에 유다연이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눈물을 닦고는,
“야! 나쁜 아줌마에서 나쁜이 문제가 아니라, 아줌마가 문제인 거거든!”
애써 더 밝게, 잠긴 목소리가 티 나지 않게 그렇게 대꾸했다.
“아줌마가? 왜애? 그럼 뭐라고 불러?”
“엄마?”
“싫어.”
“꺄하하하하하! 하하하하! 리리노 완전 귀엽다! 하하하하!”
단호박이라도 빙의한 것처럼 단박에 ‘엄마’라는 말을 거절하는 리리노의 대답에 유다연은 정말 미친 듯이 웃었다.
“릴리.”
“으, 응?”
“우린 리리노를 포함해서 아이들을 돌보자. 내가 보육원에 있을 때, 육아 마스터였다고.”
“아? 아! 아아! 좋아!!”
보육원에서 동생들을 돌본 경험이 인생의 절반이 넘는 초숙련자 유다연과 귀여운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사랑하는 릴리 로즈는 아이들을 인솔해 시간에 맞춰 밥을 먹이고, 씻기고, 재웠다.
모두가 잠든 늦은 밤.
딸깍―.
어두운 [내성] 1층에서 유일하게 불이 켜진 식당 문이 열리고 조용한 발걸음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엘리아나!”
이요한의 곁에 있어야 할 엘리아나였다. 그리고 환하게 불이 켜진 식당 안에는 지구의 의지의 사제들과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 인원을 제외한 엘븐나이츠와 창천의 날개 기사단 전원, [전문직원]이 모여 있었다.
“성녀님. 성녀님의 주인님은 어떠신가요?”
“다들 오늘 고생하셨어요. 다들. 마기스테르. 주인님은 괜찮으세요. 쓰러지실 때는 마력이 약간 불안정했는데, 이제 완전히 안정세에 접어들었어요. 신체도 서서히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끝났다고 소피아 후배님이 그러더라고요.”
“다행입니다.”
마기스테르와 엘리아나의 대화에 끼어들고 싶었지만, 입술만 달싹이고 끼어들지 못한 이들이 엘리아나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일단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를 설명할게요. 오늘 오전, 주인님께서 내성으로 오시는 길에 카르마 포인트를 사용해 마스터의 벽을 넘는 걸 시도하셨어요.”
“허어?!”
“네?”
…
다른 차원 출신들은 하나 같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기겁했고,
“그런데요?”
“왜 그렇게들 놀라요……?”
…
지구의 각성자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린 랭크와 블루 랭크 사이에는 커다란 벽이 있어요. 그리고 그 벽을 넘어 블루 랭크에 도달하면 우리는 그런 존재를 마스터라고 불러요. 인간을 초월한 힘을 발휘하는 존재이기에.”
늦은 밤 엘리아나의 낭랑한 목소리가 식당에 모인 이들의 귀에 또렷하게 꽂힌다.
“주인님은 물론이고 차원 지구의 여러분은 우리와 강해지는 방법이 다르다는 걸 이제는 저도 알아요. 카르마 포인트를 얻을 수 있고, 그걸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과 그것으로 신체적 능력이 향상된다는 것도요.”
“…….”
“그러나 블루 랭크는 ‘벽을 넘는다’는 말을 할 정도로 그동안의 랭크와 뭔가 달라요. 현재 영지의 [기사단 숙소]에서 소환되는 기사들은 그린 랭크입니다. 그들은 엑스퍼트 최상급 기사라고 칭하죠. 이건 알죠?”
엘리아나는 자신을 바라보는 지구의 의지의 사제들과 눈을 맞추며 설명을 이어갔다.
“엑스퍼트 최상급 기사단, 그러니까 최소 100명의 엑스퍼트 기사단이 모여야 마스터 초입의 기사를 상대할 수 있어요.”
“…!!”
“그 정도로 차이가 나는 이유가 바로 벽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앞으로 블루 랭크로 진입은 안전한 곳에서 진행해주세요. 이해하셨나요?”
파도처럼 여럿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하고서야 굳어 있던 엘리아나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맺힌다.
“그리고 오늘 정말 잘 해주셨어요. 고생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빠는요? 오빠는 언제 깨어나요?”
“오차는 있겠지만, 소피아의 진단으로는 일주일 정도면 충분히 안정화를 마치고 깨어나실 거랍니다.”
“…아. 네.”
“그럼 앞으로도 오늘처럼만 부탁할게요.”
그렇게 이요한이 없이 5일이 지나고, 6일째 되는 날 점심에 그가 눈을 떴다.
『아포칼립스에 나만 장르가 이상하다?』
심행 퓨전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