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에 나만+장르가 이상하다-132화 (132/183)

132화

<아주 제대로 당했다.>

『특수 스탯의 진화를 즉시 진행합니다.』

『완료.』

눈이 바뀌었다. 아니다. 눈이 좋아졌다거나 그런 감각의 변화가 아니다. 시야가 달라졌다? 그래. 그렇게 말하는 게 그나마 나은 설명일 거다.

이전까지 [내성]은 그냥 [내성]이었다. [내성]의 벽이 갑자기 생기고, 하루에도 문을 수천 명이 열었다 닫았다가를 몇 번씩 반복해도 흔한 소음 하나 없는 것은 그냥 그러려니 여겼다.

하루에 [내성]을 드나드는 사람이 수만이었고, 그들이 사용하는 지하의 목욕탕이 처음과 변함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 역시 고민하지 않았다.

밖에서 본 [내성]보다 안의 [내성]이 엄청나게 넓은 것 역시도 그냥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지금 내 눈에 그런 [내성]의 여러 신비로운 일이 벌어지는 원인이 보인다. 초록색 마력이 바닥과 벽, 천장과 문 그리고 [내성] 곳곳에 수천, 수만 개의 선이 교차하며 얽혀 있었다.

“아아.”

“영주님도 보시이시나요?”

“어? 으응. 보여.”

“어떠세요?”

“…아름답네.”

“그리고요?”

“……눈이 아파.”

“크크크큭!”

소피아는 배를 잡고 웃었다. 한참을 웃더니 이해가 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 끝에 걸린 눈물을 닦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오빠? 소피아 언니?”

“그게…….”

이걸 어떻게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까? 그냥 눈에 내성이 사실을 미세한 녹색 마력의 선이 얽히고설켜 이뤄진 건물이라고? 내가 지금 말을 하면서도 이게 뭔 개소린가 싶은데?

“너도 나중에 블루 랭크 올라가면 알게 될 거야. 말로 설명하긴 힘드네.”

“허어? 오빠! 지금 자랑하는 거예요? 비틱질?!”

“그건 아닌데. 그것처럼 보이겠네. 아무튼, 아님.”

“와아.”

유다연의 눈이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힌 사람 같았다. 어쩜 이럴 수 있냐고 눈으로 욕을 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요즘 은근히 눈으로 하는 욕을 많이 먹고 있네.’

“크크크크. 다연. 영주님 말씀이 맞아요. 이건 설명할 수는 있어도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영주님의 눈에 지금 이 공간은 녹색 마력으로 이뤄진 공간으로 보이니까요.”

“네? 당연히 마력이 흐르고 있겠죠.”

“그게 아니에요. 이 식탁. 누가 만들어서 들고 온 게 아니라, [내성]이라는 건물이 생기고 업그레이드되면서 저절로 생겼어요. 그쵸?”

“…어라? 그러네?”

“그런 거예요.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과 같은 이 상황에 대한 원인이 보이는 거예요. 원리는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뭔 소린지 알 것도 같은데 전혀 모르겠네요.”

유다연만 그런 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아리송한 얼굴이었다. 그나마 마녀 클래스인 올리비아와 캐롤라인만이 뭔가 알 것 같은 표정이라고 할까?

“주인님.”

“응.”

여전히 눈을 가득 채운 녹색 마력의 실들 때문에 눈을 찡그리고 있던 내게,

“보지 않기를 원하신다면 보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

선문답 같은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깨달음이 찾아온 것처럼 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보지 않겠다는 생각을 떠오르고 의지가 일어나자 눈을 가득 채웠던 녹색 마력의 선들이 사라졌다.

평소와 같은 식당의 풍경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온통 녹색 마력의 선으로 반짝거려서 엘라의 얼굴도 제대로 안 보였을 정도였는데, 다시 볼 수 있게 됐으니.

내가 앉아 있던 식탁에 있던 사람들은 다들 다시 내 방으로 모였다. 방을 나서기 전에 여러 흔적이 가득했던 방은 생활 마법인 [상급 청결]과 [하급 리스토어]로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여러 냄새가 가득하던 공간은 청결 마법에 의해 사라졌고, 흩어지고 어질러진 물건들과 어쩌다가 깨진 찻잔도 시간을 돌린 것처럼 원래의 깔끔하게 정돈된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서 다시 말해봐. 아까 말했던 다음 차례라는 것.”

“으음…….”

“얼버무리지 말고. 세밀히, 면밀히, 상세히!”

“어엄…….”

엘라와 소피아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유다연과 올리비아와 또 눈으로 대화를 나눈다. 뭐하냐?

“음……. 그러니까요, 오빠. 저도 이렇게 급하게 일을 진행할 생각이 없었거든요.”

결국 여러 여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유다연이 운을 띄웠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무난하게 제가 첫 번째가 되었을 거거든요.”

허? 누구 마음대로?

“그런데 갑자기 엘라 언니가 선전포고를 해오는 게 아니겠어요?”

선전포고? 무슨 전쟁이냐?

“가소로웠죠. 오빠와 저 사이가 어디 보통 사이에요?”

보통 사인데?

“그런데 엘라 언니. 진짜 강적이더라고요. 개처럼 패배했어요.”

아니, 이놈이. 당사자인 나 모르게 차례를 너희끼리 정한 과정과 이유를 설명하랬더니, 엉뚱한 소리만 하고 있어.

“그래서 인정하기로 했어요. 첫 번째는 양보한다. 그런데 두 번째는?”

소피아라며?

“전 평소에 소피아 언니를 그냥 약간 미친 언니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어머? 너도? 나도! 나도 네가 도른자라고 생각했어!”

해맑게 그런 말을 하지 마. 뭔가 좀 정신이 나갈 것 같다고. 역시 신성력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하다. 둘이 서로를 향해 조금의 악의도 없는 말을 하는데, 보고 있는 내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소피아 언니가 그러는 거예요. 전투에는 익숙해졌지만, 성적으로 흥분한 상태가 되면 벽을 넘지 못한 우리는 다칠 수도 있대요. 그래서 일단은 양보한 거예요.”

미치겠다. 그런 말을 ‘다 같이’ 했다고? 회의를 열어서?

“첫 번째라거나 두 번째라니? 그런 게 가능해? 아니, 그 전에 넌 괜찮아?”

“뭐가요? 오빠?”

“무슨 라노벨에나 나올 법한 발상이잖아. 하렘? 그런 거?”

“엥? 오빠. 오빠도 잘 알잖아요. 이런 세상이 되었는데. 멸망 전과는 도덕, 관념이 변했다는 걸요. 그리고 이미 수도 없이 보셨잖아요? 예전에.”

아주 작게 ‘예전에’라고 말하는 유다연의 말처럼, 회귀 전을 생각하면 익숙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회귀 전에도 난 따로 옆을 내주지 않았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일부다처 혹은 일처다부 아니면 다부다처의 혼란한 상황에서 뭔가 원초적인 본능을 따르는 게 싫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멸망의 세상은 인간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는 환경이다. 미치지 않은 것은 각성자가 되면서 그나마 강해지기 때문이다. 그럼 각성자가 아닌 사람은? 실제로 영지 소속이 아닌 경우 각성자가 되지 못한 인간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단순히 그린스킨이나 좀비 이런 문제가 아니라, 환경 자체가 그랬다. 그런 상황에서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원래라면 먹는 거다. 자극적이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말이다.

하지만 이런 세상에서 우리 영지가 아니면, 먹는 것조차 화폐가 된다. [자판기]가 등장하기 전까지 통조림 하나 때문에 사람이 죽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니까.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다. 남녀가 몸을 섞는 거다. 그것도 원초적으로 강하게. 본능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기는 짐승과 같은 성교.

그러니 내 여자가 네 여자가 되고, 네 여자가 내 여자가 되는 그런 관계도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알지. 아니까 묻는 거잖아.”

너무 잘 아니까. 나는 그렇게 탐닉하던 이들의 끝이 좋은 적을 본 적이 없다. 하나 같이 더 강한 자극을 찾게 되고 끝은 파국이었다.

“우리에겐 그건 전혀 문제가 아니에요.”

조금은 장난스럽고 어처구니없는 일을 질책하려고 만든 자리였는데, 분위기가 순식간에 진지해지면서,

“보스. 단순히 정절이나 사회적 통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거 아십니까?”

가만히 뒤로 물러나 질렸다는 눈으로 유다연을 보면서 티 나지 않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네이선까지 나섰다.

“현재 영지에 성비가 극악입니다.”

“……성비가 이상하다? 난 보고 받은 게 없는데?”

“그거야 성비 정도는 거론할 필요가 없을 만큼 우리 영지는 큰 사건이 쉬지 않고 벌어졌기 때문이에요.”

네이선의 보고에 올리비아의 보고가 더해지고,

“현재 영지에 남자와 여자의 비율은 2:8입니다.”

다시 네이선의 말이 더해지면서 그가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꺼낸 건지 이해했다.

“성비가 비슷하게 될 때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응? 왜?”

“아이를 낳는 것으로 어떻게 해결될 정도의 성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224만의 영지민 중에 여성의 인구가 170만 이상입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의문을 가지자마자 도미노의 시작 블록을 건드린 것처럼 여러 이유가 뇌리에 우후죽순 떠오른다.

일단 한국 내로 한정한다면 군대에 있던 남자들은 9할이 전멸했을 거다. 명령에 따라서 출동했을 거고, 화약의 효과가 사라졌으니 휘두르기도 애매한 총을 들고 우왕좌왕하다가.

그리고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이 인정하는 악업 중에 강간은 굉장히 높은 수준의 악업을 쌓는 편이다. 주로 힘에 의한 강간은 남자가 벌이는 게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고 세상이 망해가는 순간 눈 이 돌아서 일을 저지를 가능성도 크다.

악업이 쌓여 각성할 수 없게 된 남자는 당연히 죽었을 거다. 그린스킨은 여자는 살려줘도 남자는 식량으로 삼으니까. 반면 여자는 웬만하면 살려놓는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요건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오히려 2:8 정도의 성비가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먼저 경고하지 않고, 회귀 전처럼 그대로 두었다면 다른 이유로 인류가 망해버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말이 나온 김에 영지 내에 법을 새롭게 정해야 합니다. 기존의 법과 관념을 지금처럼 혼란스러움과 평온한이라는 모순된 분위기가 공존할 때, 지우고 멸망한 세상에 어울리는 개념을 인식시켜야 합니다.”

“맞아요. 보스. 그래서 저희가 [전문직원]과 상의해서 몇 가지 준비를 좀 해봤어요.”

갑자기 분위기 영지 회의로 이어졌지만, 너무 순식간에 그리고 본래부터 이런 회의를 하려고 모인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게 넘어가서 그렇게 회의가 진행됐다.

“그런 식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고! 망해 버린 세상에서 젠더 갈등이라도 일으키고 싶어?! 이럴 게 아니라, 엘리아나님. [행정청]에 정령을 보내 [전문직원]도 좀 불러 주세요. 시간이 되는 사람은 오라고.”

“하지만 남녀의 육체적인 스펙 차이를 아예 무시할 수 없잖아요? 여자는 약하니까 보호하라는 게 아니라요. 아! 엘리아나 언니. 서다혜 아줌마도요. 그 아줌마 법원에서 근무했다고 했어요.”

그것도 아주 열정적으로.

다루는 쟁점들이 너무 뜨거워서 함부로 끼어들기도 애매해서 그저 지켜만 보고 있어야 했다. 그러다가,

“마력은 드러내지 말고. 그건 싸우자는 거잖아.”

너무 과열되면 중재를 하는 정도가 내가 하는 일이었다.

지의사 중 일부만 모여서 하던 회의는 스무 명의 [전문직원] 전원과 서다혜를 비롯해 종말 전에 전문직에 종사하던 이들까지 합류해서 대회의가 되었다.

그리고,

“영쭈님~?”

여러 사람이 오가면서 열린 문을 통해서 설기의 헤츨링인 일명 ‘하찮이들’을 품에 안고 찾아온 리리노와 설기까지 들어오면서 난 엘라와 함께 뒤로 물러나 리리노와 설기랑 놀아주는 포지션이 되었다.

그리고 저녁 시간이 되자,

“다음 회의는 식당에서 해요. 영주님 방이 넓은데 사람이 많이 모이니까 좁네요.”

올리비아가 그렇게 회의의 끝을 알리자 우르르 방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고성이 오가던 방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뭐지? 뭔가 홀린 기분인데?”

“풉.”

엘라와 설기 그리고 하찮이들만 남은 방에서 뭔가 뒤통수를 은근슬쩍 맞은 것 같은 기분에 중얼거리고 나서야,

“하아? 은근슬쩍 회의로 넘어가서 흐지부지됐잖아?”

애초에 저 녀석들을 내 방으로 불러 모았던 이유였던 ‘다음 차례’에 대해서 제대로 된 설명도 듣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새끼들이?!”

아주 제대로 당했다.

“어쩐지 유다연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열정적인 모습이다 했다. 어휴.”

『아포칼립스에 나만 장르가 이상하다?』

심행 퓨전판타지 소설

(주)조아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