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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에 나만+장르가 이상하다-133화 (133/183)

133화

<처음부터였다.>

처음에는 어떤 의도였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시작하게 된 영지법을 정리하는 일은 생각보다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그리고 엘라와 소피아가 ‘최소한 그린 랭크에 오르지 못한 상태로는 블루 랭크의 주인님(영주님)과 잠자리를 당장은 감당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바람에 지의사들 사이에서는 사냥붐이 불었다.

어떻게서든 그린 랭크에 턱걸이라고 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눈으로 이른 아침에 영지를 나가 안전지대 경계선으로 향해서 저녁이 돼서야 돌아오는 일정을 며칠째 반복 중이다.

그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이거 괜찮네? 녹차랑 비슷하면서 꽃차 느낌도 나고? 이게 세계수의 잎으로 만든 차라는 거지?”

“네. 주인님. 마음에 드시니 저도 기뻐요.”

엘라와 한가하게 성벽 위에 티 테이블을 놓고 차와 쿠키를 먹으며 티 타임을 가지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높은 성벽에서 보이는 영지 경계 바깥에서는 폭음과 고함 그리고 좀비가 내지르는 괴성이 아련하게 들려오고, 폭발하고, 불타오르고, 터지고, 얼어붙는 원소의 힘이 넘실대는 장소가 그리 멀지 않음에도,

“차는 그렇다 치고, 쿠키도 직접 만들었어?”

“네. 어떠세요? 주인님?”

“맛있어. 클래스가 [요리사]라고 해도 믿겠어.”

“호호호.”

겨울로 접어든 계절에 어울리는 데이트에 가까운 여유를 즐길 수 있게 됐다. 그 뒤로도 말없이 그저 서로 마주 앉아서 겨울이 성큼 찾아온 성벽 위에서 온기가 사라지지 않는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난리도 아니네.”

이제 막 각성자가 된 것일까? 성벽 너머로 보이는 일단의 무리가 좀비를 상대로 개싸움에 가까운 전투를 벌이고 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본다면 참,

“못 싸우네.”

전투 자체에 소질이 없는 모습이었지만,

“처절하기도 하고.”

그래서 더 생존을 향한 열망이 느껴지는 몸부림이었고,

“모순적이네.”

그렇기에 그 모습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하이엘프가 정령을 이용해 온기를 유지하는 호화로운 차를 마시는 내 모습이 지독하게도 모순적이다.

“여유롭네.”

그 모습이 오히려 이 여유를 더 선명하게 한다. 검은색과 노란색을 교차로 배치하면 각각의 색이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처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그렇게 끙끙거리면서 티를 안 내려고 노력하지 말고.”

맞은 편에 앉은 엘라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여전히 성벽 너머에서 열심히 사냥하는 초보자들과 그 주변에서 혹시 몰라 대기하면서 사냥하는 엘븐나이츠 2개 조에 시선을 두었다.

“주인님.”

“듣고 있어.”

영지의 누구와 비교하더라도, 심지어 그 대상에 유다연이 포함된다고 해도, 엘리아나는 내게 맹목적이고 순종적이다. 그런 엘리아나가 전전긍긍하며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주제라면 무엇일까?

그게 짐작이 되지 않는다면 난 둘 중 하나다. 멍청하거나, 감정이 없거나.

난 둘 중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았고, 그녀가 꺼내기 어려워하는 주제가 무엇인지도 역시 짐작한다.

“소피아는…….”

“엘라.”

문장이 끝나기 전에 서둘러 말을 잘랐다. 단호히.

“나는 말이야. 엘라. 이런 세상이 싫어. 그리고 이런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싫어.”

“…주인님.”

“그거 알아? 난 어떤 일을 계기로 종말이 올 걸 알고 있었어. 그걸 알게 된 날. 내가 무엇을 했을 것 같아?”

“……?”

“죽으려고 했어.”

“!!”

흠칫 놀라며 숨을 들이켜는 게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기감에 고스란히 잡힌다. 엘라가 나와 있을 때는 자신의 기척을 숨기지 않으니 느낄 수 있는 거겠지만.

“하지만 살았지. 유다연이 말렸거든. 솔직히는 나도 죽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말렸어도…….”

뒤에 생략된 말을 엘라는 짐작한 것 같았다. 그리고 조용히 몸을 일으켜 맞은 편이 아니라, 내 옆으로 다가와 나를 끌어안았다.

“아무튼, 다시 살기로 결심하고 나 혼자 몇 가지 원칙을 세웠어.”

“인간을 믿지 않는다.”

“살려야 하는 사람과 죽여야 할 인간을 구분한다.”

“힘이 닿는 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성은 유지해주자.”

“속으로. 아무도 몰라. 유다연도 모르는 거야. 엘라 네가 최초로 듣는 거지.”

* * *

두서없이 쏟아내듯이 말하는 이요한을 보며 엘리아나는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저릿했다. 자신이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인간. 자신의 처음을 준 남자. 무의 공간에서 꺼내주고 신록의 싱그러움과 생명의 찬연함을 다시금 느끼게 해준 소중한 주인.

엘리아나가 이요한에게 처음을 내준 건 사랑하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유다연은 뒤늦게 뛰어들었다고 했지만,

‘처음부터였다.’

엘리아나는 공허와 무의 공간에서 꺼내져 빛이 가득한 성소에서 다시 눈을 뜬 날. 그곳에서 자신을 티끌만큼의 음심도 없이, 애처롭고 애달픈 눈으로 내려다보는 남자의 검은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부터 그에게 반했다.

긍지 높은 하이엘프가 단순히 무의 공간에서 꺼내줬다고 인간을 주인님이라고 부를 리가 없잖은가!

항상 투덜대지만 반대로 그렇기에 엘리아나가 경험하고 들었던 어떤 지도자보다 온정이 넘치는 남자였다.

강한 자에게 강하고, 약한 자에게 한없이 약한 사람.

권능을 다루는 그린스킨을 상대로 조금도 눈을 피하지 않고 전력으로 싸우면서도, 영지의 아이들에게는 그저 당해주는 그런 사람이다.

‘고귀한 사람이다.’

엘리아나는 그렇게 단언했다. 그래서 잘못 생각했다. 아니, 착각을 한 거다.

‘아……! 성급했구나. 이미 한 번 경험하고서도……. 아둔한 엘라야. 엘라야.’

이 아름답고 소중한 영지에 그의 피를 이은 후계자를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불과 며칠 전 블루(Blue) 랭크에 오르는 과정에서 서로 생각하는 차이가 있다는 걸 경험하고서도.

“엘라.”

미안한 마음에, 그리고 죄스러운 마음에 더 꼭 끌어안은 이요한의 입이 그녀의 가슴 사이에서 움직이며 따뜻한 온기와 미묘한 간질거림이 느껴진다. 하지만 목소리에 담긴 씁쓸함은 한겨울 강 위를 휩쓸고 지나가는 모질고 세찬 바람 같았다.

“네. 주인님.”

“그런 건 좋은 말을 생산하기 위해 일정을 정해 교미하는 종마나 하는 짓이야.”

“…….”

“난 최소한의 인간이고 싶어. 이 난리에도, 백 척의 위에 간신히 걸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에서도, 나는 여자를 만난다면, 감정을 교류하고, 이렇게 차를 마시며 데이트도 하고, 좋은 음식을 같이 먹고, 그러다가 저녁에는 같은 침대에서 서로를 탐닉하는 그런 거.”

“그래요. 그렇게 해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 엘리아나는 이전까지 지극히 순종적이던 모습은 착각이었다는 듯이 충동적으로 의자에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이요한과 눈을 맞추고 입술을 찾았다.

한참을 서로의 입술을 탐하던 둘이 떨어졌을 때, 이요한은 평소의 여유롭고 유쾌한 그로 돌아와 있었고 엘리아나는 평소보다 훨씬 적극적이고 밝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런데요. 주인님.”

“음?”

“데이트를 말씀하신 거잖아요? 그렇죠?”

“그렇지?”

“좋아요! 해요! 데이트! 저랑도 하고, 소피아랑도!”

훨씬 밝아진 목소리의 엘리아나는 어려운 문제를 풀어낸 아이처럼 당당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으스대는 것도 같았다. 그래서였다.

“…그래.”

이요한이 피식 웃으면서 긍정의 대답을 내놓은 것은.

“소피아도 내가 믿는 몇 안 되는 내 사람이니까. 충분히 자격이 있지.”

“맞아요.”

이요한도 소피아가 싫은 게 아니다. 그저 이런 분위기가 싫은 거였다. 종말에 뭐 그런 걸 바라냐고? 누군가 그렇게 묻는다면 이요한은 자신 있게 이렇게 말할 거다.

‘종말이니까 더 그런 걸 원하는 거다.’

언젠가 이요한이 했던 말처럼, 이요한도 각성자다. 멸망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일상과 같았을 일에 집착하는 다른 각성자와 다를 것 없는.

그렇게 엘라와 이요한의 성벽에서 티타임이 지나고 며칠 뒤 엘라의 말처럼 이요한은 소피아와 여유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식당에 들러 천천히 밥을 먹고, 세계수 아래에서 각자 살아온 이야기도 했다.

웃고, 떠들고, 피식 마른 웃음도 흘려보낸다.

그리고 성벽에 올라 파란 수국 자수가 새겨진 순백의 테이블보가 깔린 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이요한이 직접 내린 핸드드립 커피를 마실 때였다.

“…뭘 하자고?”

이요한이 뭔가 잘못 들었다는 얼굴을 하고 소피아를 바라본다. 황당하다는 감정이 두 눈과 떡 벌어진 입으로 충분히 드러난 채로.

“종교요! 종교를 창시해요! 우리!”

“종교쟁이를 내 손으로 내쫓았는데, 나보고 종교를 만들라고?”

이요한은 기괴한 생명체를 마주한 것 같은 얼굴로 소피아를 바라봤다. 아무리 멸망에서 내로남불이 패시브라고 해도 이건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이요한은 속으로 ‘빌어먹을 신성력!’이라고 외치고는,

“그건 선을 넘는 것 같은데? 불가야.”

그렇게 단호하게 반대했다.

“에에?! 왜요?! 종교를 창시하면 엄청 좋아요!”

“좋긴 뭐가 좋……?”

[마스터. 종교를 창시하고 종교관을 설정하시는 추천합니다. 적극적으로 말입니다.]

경험에 의한 종교 혐오를 가진 이요한이 반대를 하려는 찰나, 데이트할 때면 눈치껏 자신의 존재감을 감추고 끼어들지 않던 [정복 군주의 인장]의 군주 에고가 끼어들었다.

“일단 들어나 볼게. 뭐가 좋은데? 아니, 그 전에 종교라는 게 그렇게 마음대로 창시가 되고 그러는 건가?”

“영주님. 종교 창시는 가능해요. 어렵지도 않고요. 그리고 뭐가 좋냐니요?! 영주님 [치료소], 잊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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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소[Rank: Green]

3. 특정 조건을 만족하면, 치료소를 통해 종교를 세울 수 있습니다. 종교를 세우면 [의사]와 [전문의]는 신성력을 사용하는 [사제]와 [대사제]로 변경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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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었을 리가.”

그래. 잊었을 리가 없지. 신성력을 사용하는 클래스 계열인 [사제]와 [대사제]를 고용할 수 있는 시설인데.

‘그런데 종교관은 어떻게 설정하는 건데? 그냥 오늘부터 이런 종교가 생겼습니다. 하면 돼? 그렇게 쉬워?’

[단순히 종교관을 설정하는 건 [영지 관리]로 충분하지만, 보다 나은 설정과 교리 그리고 혜택을 정하는 데는 저보다 더 전문가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어?”

“네! 영주님을 위해서요.”

“나를? 나를 위해서? 종교를 창시하면 [치료소]에서 사제와 대사제, 추기경이나 이단 심문관을 고용할 수 있다는 말 때문이야?”

“네? 그건 몰랐는데요?”

“그럼 왜 종교를?”

“그거야. 종교를 창시하면 그 종교를 믿는 이들은 ‘혜택’을 받으니까요! 그리고 혜택은 종교를 창시할 때 선택할 수 있어요. 보통은 안 되지만, 영주님은 가능하세요.”

“음…….”

여러 생각이 휘몰아치듯이 떠올랐다가 가라앉는다. 가라앉는 것들은 고려할 필요가 없는 항목이다. 그렇게 하나씩 사라지고 고려해야 할 것만 남았을 때,

“좋아.”

소피아의 제안을 이요한은 승낙했다.

“까아아아!! 좋아요! 좋아! 뭐부터 할까요? 네? 아! 교리부터 설정할까요? 이만팔천오백 개의 교리가 벌써 떠올라요.”

“…굉장히 많으면서 쓸데없이 구체적인 숫자네?”

“그리고 성서도 집필해야 하고, 성가도 만들어야! 아아아!!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그 전에 말이야. 종교면 신이 있어야 하니까 신부터 정해야 하는 거 아냐?”

“네? 그걸 왜요?”

“응?”

“신은 영주님이잖아요.”

“…??”

『아포칼립스에 나만 장르가 이상하다?』

심행 퓨전판타지 소설

(주)조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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