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짐승아. 짐승아. 이 어리석은 짐승아.>
비로소 감정을 추스르고 이성적인 판단을 내린 리치 군주의 명령은 즉각 이행되었다.
가장 먼저 차원 [심연]으로 향했다. 언데드이기에 [심연]이라는 차원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이들이 모시는 신이자 군주, 리치 군주가 [심연]에서의 권력 투쟁에서 비참하게 쫓겨났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후로 시간이 흘러 리치 군주가 자신을 내쫓은 존재를 찾았을 때, 그는 이미 소멸했다는 걸 알고 지금의 [심연]을 지배자와 동맹을 맺었지만, [심연]은 언젠가 리치 군주가 반드시 되찾겠다고 천명한 차원이었다.
[심연]을 방문한 존재는 데스 나이트의 상위 존재 헬 나이트와 그 휘하의 멸절의 기사단이다.
“위대한 사령 술사 리치 군주님의 전언이다.”
차원 [심연]은 다른 차원들과 탄생부터 성장해온 배경이 다르다. 이곳은 다른 차원을 굳이 침략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차원 내부에서 여러 일이 벌어진다.
주로 전쟁과 파괴 그리고 새롭게 태어나는 혼돈 같은 것들이 말이다.
실제로 리치 군주도 [심연] 출신이고, 그 역시도 [심연]이라는 차원을 차지하기 위해 도전했다가 패했다고 했잖은가. 그리고 그 리치 군주를 패퇴시킨 존재 역시 다른 전쟁에 휘말려 소멸했다고도 했고.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고 보면 된다.
그런 [심연]이 차원 전쟁에 개입하는 이유는 그린스킨이나 언데드 종족과 달리 어떤 이득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재미. 재미를 위한 참전일 뿐이다.
매번 자신과 비슷한 놈들과 24시간 생사결을 펼치는 놈들인데, 차원 밖의 처음 보는 파릇파릇한 생물과 전투를 즐거워하지 않을 이유가 있겠냐고.
그런 곳이 바로 [심연]이기에 이곳에 리치 군주의 명령을 전달하러 온 언데드도 마법사 계열의 아크 리치가 아니라, 기사 계열 중에서도 돌격형 언데드인 헬 나이트와 멸절의 기사단이 온 거다.
“뭐라는 거야? 이 깡통새끼가?”
“리치 군주? 그게 누군데?”
“왜 그 예전에 진혈마왕에게 덤볐다가 대차게 깨지고 도망친 사령술사.”
“아아. 그 허접쓰레기?”
…
그래. 이런 상태가 되는 거다.
그린스킨이 호전적인 종족이다? [심연]에 머무는 생명체에 비하면 그린스킨은 온순한 초식동물이나 마찬가지다.
가장 앞에서 헬 나이트에게 비죽거리던 악마가 손에 검은 불을 일으켜 그걸 그대로 헬 나이트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일단 맞고 시작할까? 애송이 깡통 새끼야?”
그리고 뒤로 훌쩍 물러나며 바닥에 마기를 흘리면서 기괴한 형태의 마법진을 그려냈다.
콰쾅!
“뭐야? 싸움이야? 전투야? 나도!”
“뉴비야? 할짝해도 돼?! 할래!”
“몸에 좋고 맛도 좋은 깡통이다!”
…
폭음은 소란을 듣고 몰려온 악마와 심연의 거주민들의 환호와 소란에 묻혔다.
그렇지만 일방적으로 선공을 당한 헬 나이트를 필두로 한 멸절의 기사단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피해를 입지도 않았다.
“기사단 정렬.”
리친 군주의 휘하 부대 중에 파괴와 돌격, 기동에 특화된 기사단이 멸절의 기사단이다. 그래서 이름도 멸절이지 않은가.
“감히 주군께 불경한 자를 멸하리라! 멸절 기사단!”
“하!!”
“적을 섬멸하라!!”
“하아아!!”
맹렬히 돌진하는 기사단의 주변으로 짙고 어두운 기운이 안개처럼 피어난다. 마기가 외부로 흘러나와 멸절 기사단 전체를 감싸며 그대로 멋도 모르고 달려드는 심연의 존재들과 충돌한다.
으적―. 콰득―!! 콰드득.
고막을 멀게 할 것 같은 굉음은 없었다. 그저 섬뜩하게 으스러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올 뿐이었다.
덤으로,
“켁?!”
“꾸엑?!”
“끄아아악!”
기사단의 돌진에 당한 이들의 비명이 뒤를 따랐지만,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기 시작한 멸절의 기사단의 돌진을 막아 세울 수 있는 존재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멸절의 기사단이 원래 이렇게 강한 거냐고?
멸절의 기사단은 강하다. 가장 앞에 선 헬 나이트만 해도 마력 사용자를 기준으로 하면 네이비 랭크는 되는 강자니까.
하지만 이 정도로 일방적이긴 쉽지 않다. 거기에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이곳이 [심연]이라는 거다. 세상 어느 차원보다 마기 농도가 짙은 차원. 사실 마기의 농도가 단순히 짙다는 수준이 아니라, 마기의 근원이 있다고 알려진 곳이 바로 이곳 차원 [심연]이다.
다른 하나는 리치 군주가 헬 나이트를 맨몸으로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연] 출신인 리치 군주가 자신의 전언을 [심연]에 전달하는데, 아무런 대책도 없이 보낼 리가 있겠는가.
차원 [심연]은 리치 군주의 힘이 닿는 차원이다. 비록 거리가 멀어 소실되는 힘이 적지 않지만, 어차피 리치 군주는 힘이 넘쳐서 문제인 초월자가 아닌가.
[심연] 차원으로 파견된 멸절 기사단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탁하고 검은 기운은 리치 군주에게 전해 받는 힘이다.
파죽지세(破竹之勢)라는 말이 있다.
단어의 뜻은 ‘대나무를 가르는 듯한 기세’라는 뜻이다. 마른 대나무를 결대로 자르면 칼이 닿기도 전에 갈라진다. 그걸 빗대서 거침없이 나아가는 것을 뜻하는 거다.
지금 멸절의 기사단이 그렇다.
그렇게 나아가고 나아가,
“정지.”
거대한 문이 있는 심연 중심의 성에 도착했다.
“위대한 죽음의 군주, 리치 군주님의 전언이오.”
끼이익―.
전쟁이 없다면 당연히 닫혀있어야 하고, 전쟁이 일어나 이 성까지 적이 밀고 들어오면 강제로 열리기에 스스로 열리지 않는 문이 오랜만에 스스로 몸을 열어 공간을 내어준다.
그 열린 문으로 들어간 헬 나이트가 돌아온 것은 정확히 28분이 지난 뒤였다.
“돌아간다. 주군의 의지는 실현되었으니.”
* * *
본래 리치 군주가 기거하던 탑이 있던 곳에는 다시 탑이 올라가지 않았다. 리치 군주는 탑을 쌓을 힘이 없었다기보다는 탑이 존재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데이몬.’
탑을 올려 권위를 높이자고 건의하고 주장한 건 언제나 데이몬이었으니까. 리치 군주는 몰랐겠지만, 데이몬은 탑을 올린 이유는 누더기 행성 어디에서든 보이는 탑을 쌓아 예언에 나온 자신을 소멸시켜 줄 ‘날짐승’이 찾아오기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날짐승이 그 날짐승이 아니었고, 데이몬은 탑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소멸했지만.
“군주시여. 황천 기사단과 리치 마법 병단이 모두 집합하였습니다.”
“초록색 짐승은?”
“그것이. 더 많은 카르마 포인트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협상을 해보겠다? 그런 생각은 리치 군주의 머릿속에 없었다. 그는 바로 강제로 차원의 틈을 찢어 그린스킨의 황궁에 마기를 투사했다.
“어리석은 짐승아.”
그리고 의지를 담아 차가운 분노를 토해냈다. 가뜩이나 누구에게 분노를 풀어야 할지 몰라 답답했는데, 이렇게 시비를 걸어준다니.
이런 게 바로 울고 싶은데 뺨을 때려준다는 게 아닌가.
아―. 아아―.
웅웅하는 소리를 내며 그린스킨 황제의 궁에 메아리처럼 리치 군주의 목소리가 울리는 건 단순히 리치 군주의 넘치는 힘 때문만은 아니다. 본래라면 황궁에 자리하고 있어야 할 황제의 혈족 절반이 사라졌고, 그들의 시중을 들어야 할 그린스킨 7할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시체쟁이. 그래서 카르마 포인트는 준비됐나?”
자신의 차원을 침범한 초월자의 의념에도 대수롭지 않은 말로 대꾸하는 그린스킨 황제는 그의 입에서 나온 말과 다르게 어딘가 많이 피폐해 보였다. 실핏줄이 터진 눈은 금방이라도 피눈물을 흘릴 것 같았고, 눈썹 사이에 깊게 팬 주름은 고뇌를 끌어안은 모습이었다.
“카르마 포인트? 아아. 여(余)가 잠시 흥분해서 너희에게 병력을 보내달라고 했던 것? 여가 다시 잠잠히 생각하니, 굳이 짐승의 지원은 필요가 없을 것 같군.”
“무어라아!!!!”
콰르르르릉―!
그린스킨 황제의 분노에 황궁의 대전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고, 돌가루가 떨어진다.
“알아들었으면서 무얼 다시 묻느냐. 누가 멍청한 짐승 아니랄까.”
“이! 이! 고블린 발싸개 같은 새끼가!!”
“여가 오늘 특별히 연락을 한 이유는 그동안 유예해준 차용증의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다.”
“…뭐?”
믿는 도끼에 발등이 아니라 목이 찍힌 것 같은 사람처럼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반문하는 그린스킨의 황제를 리치 군주는 한껏 비웃었다.
“너도 알잖느냐. 짐승아. 이번에 여의 땅에 테러가 벌어진 것을. 그러니 여가 복수를 천명한 것이고.”
“그래. 알지! 내게 병력 지원을 요청한 것도 그래서일 테고!”
“그랬지. 그랬어. 그때는 여도 잔뜩 흥분했으니까.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렇더구나. 너희 모자란 짐승보다 차라리 빌려준 카르마 포인트를 받으면 그것으로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겠다는 것을.”
“이, 이이!!!”
“그러니 이제 미뤘던 계약을 이행하고 정산하자꾸나. 카르마 포인트를 말이다.”
“…….”
분노로 그린스킨이 아니라 레드스킨이 된 것처럼 붉게 달아오른 황제는 차마 그러자고 말을 꺼내지 못했다. 왜? 진짜로 그렇게 하면 황제가 다스리는 차원은 망해버릴 테니까.
지금도 간신히 버티는 중이다. 그린스킨은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 중이다. 카르마 포인트를 생산하지 못하고 소비만 하는 차원인 그린스킨이 너무 이르게 차원 침공전에서 패배했다. 거기서 카르마 포인트를 얻었어야 했는데.
설사 패배했더라도 기존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공방이 지속된 전투였다면 문제가 아니었을 거다. 그랬다면 저기서 황제를 궁지로 몰고 있는 리치 군주가 카르마 포인트를 지원해줬을 테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그게 아니다. 모든 것이 꼬였다. 마치 그동안 자행했던 악행이 이자를 달고 한 번에 돌아오는 것처럼.
“얼마를 지원하면 되겠나.”
결국 황제는 꼬리를 내렸다. 오랜만에 자신이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는데, 아니었다. 오히려 더 궁지에 몰렸다.
“짐승아.”
“…….”
수억의 그린스킨을 아우르는 황제는 자신을 짐승이라고 칭하는 저 말을 듣고도 반항조차 할 수 없었다.
“여는 너희 짐승의 지원 따위 필요 없으니. 카르마 포인트를 집행하라.”
“…정말 끝까지 갈 생각인가?”
“끝? 그럼. 끝까지 할 생각이지.”
“뭐라?”
“쯧쯧. 짐승아. 짐승아. 이 어리석은 짐승아. 카르마 포인트를 회수하면 너희 짐승은 멸망할 것이 아니냐. 그때 가서 망해가는 차원을 삼키면 되는 일인데, 내가 왜 너희 숨통을 틔워주겠느냐?”
그렇다. 그동안 아무렇지 않게 빌려서 썼던 카르마 포인트가 그린스킨 차원을 멸망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상황까지 와버렸다.
“어차피 여는 살아 있는 짐승이 필요한 게 아니니. 잊었느냐? 여는 모든 죽은 자들의 군주니라.”
자멸하면서 멸망의 끝에 도달한 이후에 찾아와도 충분히 이득이라는 뜻이다.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실수했다. 사과하지. 원하는 만큼 그린스킨을 지원하겠다.”
그린스킨 황제는 그저 용서를 빌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