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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에 나만+장르가 이상하다-158화 (158/183)

158화

<잘 처리했네. 이거 실어.>

“너냐?”

“뭐, 뭐가?!”

힐베르토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그는 온몸의 털이 삐쭉 서는 섬뜩함을 맛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늘에서 뛰어내리면서 땅에 착지할 때, 남자에게서 새어 나온 마력이 무려 연한 녹색이었던 걸 봤기 때문이다.

힐베르토는 콜롬비아 최대의 생존자 그룹의 왕이다. 그 말은 다시 말하면 그가 콜롬비아에서 가장 강한 각성자라는 뜻이다. 그런 힐베르토가 이제 고작 옐로 랭크에 막 오른 스탯이었다.

이요한은 블루(Blue) 랭크인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나냐고?

신체 스탯이 옐로 랭크까지 도달하는데 필요한 마이너스 카르마 포인트는 총 55만 포인트다.

특수 스탯도 올려야 하니 일반적인 클래스를 가진 사람은 총 110만이 있어야 비로소 옐로 랭크에 턱걸이라도 올릴 수 있다.

110만. 좀비로 치면 11만 마리를 잡아야 한다. 좀비 11만 마리? 잡을 수 있다. 뭐가 어렵겠나?

그런데 힐베르토가 그렇게 부지런한 놈이고 성실한 놈이었으면 이런 멍청한 짓을 했을까?

무엇보다 시간을 다루는 고유 능력 때문에 특수 스탯이 두 개나 되기에 고유 능력은 오렌지 랭크였다.

이요한처럼 플러스 카르마 포인트와 마이너스 카르마 포인트가 다 필요한 게 아니라, 그는 신체 스탯을 올리는데 마이너스 카르마 포인트만 필요하다. 더 많은 괴물을 사냥해야 한다는 소리다.

“개 같은 글을 올린 게 너냐고.”

“…….”

힐베르토는 옐로 랭크에 도달하자마자 그린 랭크로 신체 스탯을 올릴 때 필요한 스탯을 계산했었다.

옐로 랭크에서 신체 스탯 하나당 4,800이다. 다섯 개 스탯을 100 올리는데 필요한 마이너스 카르마 포인트는 240만.

엄두도 나지 않아 포기했던 랭크에 오른 강자가 방금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이 새끼가 왜 말이 없어? 무언의 긍정이다 이거야?”

네이선이 화를 낼 때마다 그의 주변으로 녹색 마력이 일렁인다. 그러던 네이선이 막 뭐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

쿵―.

거대한 대검을 등에 멘 것치고는 너무나 예쁘장하고 작은 키의 여자가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낙하했다.

“얘야?”

언제 등에서 검을 뽑은 걸까? 가녀린 팔에 어울리지 않게 여자의 한 손에 들린 대검에서 녹색 마력이 일렁인다.

“……?!”

이 여자도 그린 랭크라는 뜻이다.

“릴리! 기다려!”

그리고 하늘 위에서 들려온 여인의 목소리에 비로소 힐베르토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했다. 여인이 들고 있던 무거워 보이던 대검의 시퍼런 날이 어느새 그의 목 언저리에 있었다는 것을.

“아! 왜!!!”

“그냥 죽이면 안 돼!!”

“이 새끼가 요한 ‘오빠’한테 한 거 너도 봤잖아! 올리비아! 그냥 죽이자니까!!”

“그래. 나도 봤어. 그래서 그래.”

어느새 하늘에서 들려오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걸 느낀 힐베르토가 고개를 들었을 때, 거기엔 마치 천사라도 되는 것처럼 해를 등지고 천천히 내려오는 여인이 있었다.

이 시기에 어울리지 않는 네이비 스트라이프 더블 수트 정장 셋업을 착용한 여인의 몸 주변에도 녹색 마력이 일렁거렸다.

“쉽게 죽이면 안 돼. 경고를 남길 겸 최대한 괴롭게 죽일 거야.”

“아. ‘오빠’가 짜증 낸 만큼?”

“그래. 보스가 고민하신 시간의 몇 곱절로 고통스럽게 할 거야.”

“좋아. 인정이야.”

마치 연검을 다루는 것처럼 거대한 대검을 가녀린 팔로 휘릭 흔들어 등에 정확하게 꽂아 넣는 릴리의 모습은 힐베르토에게 충격이었다.

‘괴, 괴물들?’

이런 놈들이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있다. 그런데 과연 셋뿐일까?

‘일단 피하자.’

고유 능력 [시간 조작]을 발현했다. 기이하게 달라진 시간의 흐름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주변에서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부하의 눈꺼풀이 떨리는 게 슬로우모션을 돌린 것처럼 다 보인다.

그렇게 늘어난 시간대에서 그는 움직였다. 급하다고 달리지 않았다. 시간이 늘어났다고 다 좋은 게 아니다. 느려진 시간대에서 주변 사물과 잘못 닿으면 피륙이 찢어진다.

그래서 힐베르토가 가장 먼저 올리는 스탯이 [마력]과 [체력]이었다. [민첩]을 가장 나중에 올리는 이유도 같은 이유에서였고.

두 걸음, 그리고 셋, 네 걸음 째를 디뎠을 때,

후웅―!

그의 앞에 거대한 대검이 나타났다.

팟―!

그 상황에 놀라 늘어났던 시간대가 정상으로 돌아왔고,

“어디 가, 이 새끼야.”

자신의 앞을 태연하게 막은 릴리 로즈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떻게?”

분명히 자신의 고유 능력은 제대로 발현되었다. 늘어난 시간대를 유영하는 느낌은 착각할 수가 없다. 마치 수영장에서 걷기 운동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니까.

빠악!

“컥?!”

그러나 힐베르토는 그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릴리 로즈가 대검 옆면을 힐베르토를 향해 휘둘렀기 때문이다. 물수제비처럼 몇 번을 튕겨 날아간 힐베르토의 몸은 그가 처음 네이선을 맞이하던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쿨럭! 커헉!”

피를 토하는 힐베르토를 내려다보는 이들의 눈빛 그 너머에서 하늘 위에 떠 있는 거대한 하얀 무언가가 천천히 하강하는 게 눈물로 흐려진 시야에 보였다.

그리고 척척 내리는 기이한 이들. 얼굴이 모두 비슷하게 생겼고, 똑같은 장비를 착용한 이들이 빠르게 내려섰다. 그 숫자가 만 명이 넘을 정도였다.

“어? 어어?”

그리고 그렇게 등장한 이들은 쉘터 안은 물론이고 바깥까지 나가서 주변을 장악했다. 몰려드는 좀비를 처치하고, 쉘터 안에서 반항하는 각성자를 두들겨 캐서 딱 죽지 않을 정도까지만 남겨놓았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가장 패악질을 저지른 간부들은 사지 중 하나 이상이 잘린 채로 바닥에 쌓아놓았다.

“…….”

힐베르토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겁이 막 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화가 나지도 않았다. 뭔가 이 상황과 자신의 눈에 보이는 이 장면이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달까?

퍼억―!

“커억!”

그러다가 누군가의 발에 머리를 맞고, 고통을 느끼고서야 제대로 현실감이 돌아왔다.

“야.”

“…….”

퍼억―. 빡!

“컥? 켁!!”

“대답. 이 새끼야.”

몇 대를 더 맞고서야 정신이 온전히 돌아온 힐베르토는 서둘러 입을 열어 “네, 네.”하고 대답했다.

“너 상태창. 까봐.”

바닥을 뒹구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말하는 사람은 또 새로운 남자였다. 신기하게도 허리와 허벅지뿐만 아니라, 방검복 같은 걸 입은 전면에도 단검이 무수히 많이 차고 있는 행색의 남자가.

“사, 상태창이라뇨?”

“각성자 정보. 까보라고. 카르마 포인트랑 고유 능력도.”

“왜, 왜……?”

왜냐고 물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무식한 폭력이다. 단검을 빼든 남자 역시도 단검에 희미하게 맺힌 녹색 기운을 보이며 몸을 찌르는데, 죽지 않으면서 고통을 느끼게 될 곳만 찔러댔다.

“호오? 이 새끼 고유 능력 쓸만하네? 시간에 관련된 거야?”

“엉? 그러네? 이거 챙기자.”

“그래. 그 [연금술사] 아가씨가 고유 능력도 [스크롤]로 추출할 수 있다고 했지?”

“응. 맞아.”

“좋네. 원정 오면서 버린 시간에 대한 값으로 적당하네.”

헌터와 네이선의 대화를 힐베르토는 따라갈 수 없었다. 무슨 소린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으니까.

“그러고 보면 참 이상해. 이 새끼는 이런 좋은 고유 능력을 가지고 왜 이런 병식 짓을 하는 거야? 지구의 의지님들의 실수일까? 올리비아. 네 생각은 어때?”

릴리 로즈가 [시간 조작]이라는 고유 능력을 보며 올리비아에게 묻자,

“글쎄요. 인간은 그만큼 자유 의지가 특징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어떤 선택을 할지 너무 경우의 수가 많아서? 뭐, 그런 거 아닐까요?”

“그래?”

“네. 물론 저는 일부러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요.”

“일부러?”

“이런 특별한 고유 능력을 지는 이들은 분명히 먼저 움직인 자들일 거야. 누구보다 빠르게. 우리와 같지. 랭커……? 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릴리 로즈의 작은 머리가 위아래로 흔들린다. 그 모습만 보면 귀여운 인형 같지만, 등에 메고 있는 그녀만 한 대검이 귀여움을 모조리 날려버린다.

“그런 랭커들은 둘 중 하나의 길을 가겠지. 우리처럼 이 종말을 이기기 위해 애를 쓰거나, 아니면 이 쓰레기처럼 남을 착취하거나. 그렇게 되면 쓰레기들은 결국 이렇게 재활용의 기회를 맞이하겠지.”

“그래서?”

“보스의 클래스를 설계한 분들이니 [연금술사]의 존재와 [도서관]의 존재를 모르지 않았을 테니까.”

올리비아가 그렇게 말을 줄였지만, 이요한의 영지 소속 각성자들은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도서관]과 [연금술사]의 존재. 그리고 이후 등장할 영지 건물에서 이들의 특별한 고유 능력을 활용할 방법이 생기리란 걸 계획했을 거라는 것을.

망상이 아니다. 이 각성이라는 것을 계획하고 설계한 존재가 바로 지구의 의지들이었으니까.

또한,

“그럼 무조건 죽이면 안 되겠다. 이제 상태창부터 열라고 해야겠는데?”

이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무턱대고 반항하는 놈들의 목을 치던 [로열 가드]가 팔다리를 자르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얘는 어쩔까?”

“일단 사지는 필요가 없어.”

“그래?”

촤악―!

“끕?!!!!!!!!!!!!”

릴리 로즈가 휘두른 한 벌의 칼질에 양팔과 양다리가 모두 잘려 나갔다. 게다가 그 위로 올리비아가 불을 만들어 상처 부위를 강제로 지져버렸다.

너무 큰 고통이 한꺼번에 몰아치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기절한 힐베르토는 다시 지독한 고통에 눈을 떴다.

“혀도 잘랐으니까 이제 자살은 못 하겠지? 끝?”

“그래. 잘 처리했네. 이거 실어.”

“응.”

올리비아와 릴리 로즈는 무슨 고기 선물 포장을 논하는 것처럼, 사지와 혀가 잘린 힐베르토의 상태를 보고 만족감을 표했다.

그리고 그 광경은 고스란히 가이아 게시판을 통해 실시간 중계되고 있었고,

“흠.”

힐베르토를 따라서 같이 어그로를 끌던 각성자들은 모두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친!”

그리고 그들은 한 명의 예외도 없이 곧장 쉘터를 벗어났다. 아니, 도망쳤다. 쉘터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전화라도 사용할 수 있거나, 서로 통신을 할 수 있는 장비라도 있었으면 모여서 어떻게 해보자는 의견이라도 나눌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런 건 당연히 없다.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가이아 게시판을 이용하면 가능하긴 하겠지만, 거긴 다른 사람도 볼 수 있으니, 아무 의미가 없다.

“젠장!”

누군가는 욕설을 내뱉으며 달렸고,

“달려. 달려야. 어디로? 일단 달려.”

누군가는 그저 도망가야 한다는 것만 되뇌면서 달렸다.

사방으로 흩어진 이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실라페. 노임. 찾아.”

이번 원정에 유토피아 소속 각성자 중, 몇 안 되는 정령사 이사벨 노아가 함께 했다는 것을. 그리고 바람의 중급 정령과 땅의 중급 정력의 추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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