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나 정령왕이야! 정령왕!!>
개인적으로 회귀 전이든 회귀 후이든 이런 감정을 느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왜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며칠 전으로 돌려야 했다.
“태기(胎氣)? 이, 임신이라는 거야?”
조인족이 합류하고 나흘 정도가 지났을 무렵, 성벽 위에서 평소처럼 따뜻한 차를 마시던 중에 엘라가 건넨 말이었다. 정확하게는 엘라가 소환한 물의 정령왕 [엘라임]이,
“엘라? 너! 왜? 아니! 그럴 수는 있는데! 너무 빠른 거 아니니?”
라고 하면서 궁금증을 증폭시켰고 그리고 엘라가 태기가 느껴진다고 말해서 알게 됐다.
“저도 확신할 수 없어서 엘라임을 불렀는데. 보자마자 알아차릴 줄은 몰랐어요. 주인님.”
“당연하지! 내가 물의 정령왕이라고! 그나저나 정말 우리 엘라가! 아이가! 엘라를 닮은 아이?!”
아이를 바란 시어머니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잔뜩 흥분한 엘라임의 행동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앞서 운을 띄운 것처럼,
‘아이? 내 아이? 정말?’
상상이나 했을까? 얼마 전에 영지에서 신생아가 태어났다고 했을 때도 대단하다고 말했잖은가. 그런데 내가?
기분이 좋고 나쁘고를 떠올릴 겨를이 없었다.
“주인님……?”
그래서 걱정스레 내 반응을 살피는 엘라의 눈빛을 늦게 발견했다.
“이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기분이 나쁘거나 싫은 건 아니야. 좋아. 엄청. 응. 그런데 이건 좀 뭐라고 할까. 상상도 못 해본 일이라서……. 그래! 멸망이 갑자기 시작되고 각성했다는 메시지를 봤을 때보다 더 의외의 사건이야!!”
엘라는 하이 엘프다. 하이 엘프는 타인의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능력이 있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남편이라면 감정마저도 어느 정도 확실하게 느낄 거다. 그러니까 어쩌면,
“엘라. 내가 어때? 내 기분이 말이야.”
나보다 더 내 감정을 잘 알고 있을 거다.
“행복……, 행복해하고 계셔요.”
“그래……. 그랬구나.”
회귀하자마자 그날 오전에 맑은 하늘을 감상하면서 자살을 해서 이 멸망을 다시 맞이하지 않겠다고 생각한 염세주의자에 인간 불신이 극에 달한 나라는 인간이 회귀 전, 멸망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순수하게 행복해하고 있는 거다. 그래서 이 감정이 익숙하지 않았던 거야.
“고마워. 아! 아니다! 이럴 게 아니지! 뭐, 뭐부터 하지? 영지에 의사부터 찾을까? 아닌가? [치료소]에서 [의사]와 [전문의]부터 부를까? 아니다. 소피아. 소피아를 불러서 일단 축복부터 받자. 아니다. 아니야. 당장 [내성] 안으로 가자. 저런 못생긴 거 보는 거 아니야. 태교에 안 좋아. 지지야. 지지.”
“푸후후후. 주인님. 괜찮아요.”
당황해서 머릿속에서 나오는 말을 아무렇게 하고 있을 때,
“너!”
지금까지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엘라임이 못마땅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게 삿대지부터 날렸다.
“나? 나 왜?”
“너! 엘라가 아이를 가졌다는데 리액션이 빵점이야! 빵점! 너무 기뻐서 당장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어야지!”
미친. 뭐라는 거야? 이 정령이?
“그러다가 죽으면?”
“그럼 어때? 엘라의 아이가 생겼는데?”
“얘 뭐야? 엘라?”
“후후후. 엘라임이 조금 과하게 저를 보호하려고 해서 그래요.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주인님.”
“난 그것도 별로야! 인간 주제에 엘라와 남편이 되었으면 받들어 모시고 살아도 부족한데, 주인님이라니?! 이게 말이 돼?!”
그건 나도 좀 그렇다.
“나도 그래. 호칭을 바꿀 필요가 있겠어.”
“네? 왜요?”
“그래! 내 말이 그 말이야!”
“아니, 나중에 아이가 태어났다고 생각해봐. 그런데 아이가 엄마는 엄마라고 부르고, 아빠는 주인님이라고 부르면 어떻게 해? 보통 엄마가 하는 말을 많이 따라 할 텐데? 당신이 날 주인님이라고 부르면? 그건 뭐, 아빠라고 교육한다고 해도 엄마가 남편을 주인님이라고 불렀으니, 아이도 커서 결혼하면 남편, 그러니까 내 딸의 사위 새끼를 주인님이라고 부르면 어떻게 해? 내가 그 사위 새끼를 죽여버릴 것 같은데?”
“풉! 호호호호호.”
“…뭐 이런.”
뭐야? 왜 웃어? 엘라임 이노무시키는 왜 어이없다는 얼굴이야? 저놈이 먼저 말을 꺼냈으면서? 여기서 나만 진지해? 이거 완전 진지한데? 내 딸이 사위 새끼에게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걸 듣는 순간 사위 새끼의 머리통을 날려버릴 것 같은데? 진심으로?
“하하하하.”
“뭐야. 이상해.”
엘라는 내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걸 보더니 이제 아예 바닥에 앉아 배를 잡고 웃었고, 엘라임은 뭔가 잘못 구성된 생명체를 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주, 주인님. 하하하. 하아. 하아. 배가 너무 아파요. 하하하.”
“배 아파? 왜?!”
웃어서 아프다는 뜻이었겠지. 하지만 당시 나는 전혀 그런 걸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멍청이가 되어 있었다.
임신 → 배 아픔? → 산통?!! → 큰일남?!!!!
이런 식으로 사고 회로가 돌아가면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마력을 써가면서 성벽을 내려가―이때 엘라임의 말처럼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소피아를 납치하듯이 데려왔다.
“영…주님?”
소피아는 도저히 무슨 일인 건지 이해를 못하고 있었고,
“으하하하하하. 하하하하.”
엘라는 그 상황이 또 웃긴지 다시 웃기 시작했다.
“소피아. 엘라가 배가 아프대! 어서 치료를!!”
“…보통 저렇게 웃으면 배가 아프죠?”
“응? 엘라가 임신했는데?”
“…선배님이요?! 축하해요! 선배님!! 저도 열심히!!”
소피아가 엘라에게 축하의 말을 전하고 엘라는 웃으면서 손을 휘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할 때,
“아니 임신했는데 배가 아프다니까?!”
너무 답답해서 다시 그 말을 하자마자,
“꺄하하하하하! 너무 웃겨!! 으으. 배 아파……요. 하하하하.”
다시 엘라가 웃기 시작했고,
“…임신했어도 저렇게 웃으면 배가 아프죠. 당연히.”
소피아는 냉정했다.
“뭐야? 쟤. 이상~해.”
그리고 엘라임은 여전히 밉상이었다.
“아…….”
그제야 엘라가 임신 완전 초기라는 것을 깨달았고, 지금까지 내가 한 멍청한 행동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하지만 창피함보다 더 먼저 느껴진 감정은,
“다, 다행이다……. 아아.”
안도였다. 엘라와 그녀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에 대한.
“좋아요. 자상한 예비 아버님. 좋은 아빠가 되겠네요. 그러니까 이제 정신 좀 챙기실게요?”
“큼. 흠흠. 좋아. 내가 아이는 처음이라. 호들갑을 떨었어. 미안.”
소피아는 내가 첫 아이를 가졌다는 것에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가 이내 표정이 풀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예비 엄마, 아빠님. 이제부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안정?”
“정답! 엘라 선배님은 이제부터 [내성]을 벗어나시면 안 돼요.”
“네? 왜요? 후배님?”
“왜라뇨?! 임신 초기는 엄청 조심해야 한다고요!”
“네? 왜요?”
한참 소피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내가 둘의 이야기가 어딘가 어긋나있다는 걸 깨달은 건 한심하다는 듯 소피아를 바라보는 엘라임을 발견한 이후였다.
“뭔데? 그런 얼굴을 할 거면 알려주고 해라.”
“쯧쯧. 인간들이란. 이렇게 나약해서는. 엘프는, 엘라 같은 하이 엘프는 인간과 달라. 첫 번째 아이라 조금 주의하긴 해야겠지만, 아기집이 있는 곳을 마력이나 마기가 담긴 공격에 직격당하지 않는다면, 멀쩡하다고. 나무를 타고 활을 쏴도 돼.”
“뭐?!”
“예?!!”
이게 무슨 밭일하다가 애를 낳았다는 과거 농촌 전설 같은 소리야!
“뭘 그리 놀라? 지금도 나를 소환한 상태잖아?! 나 정령왕인데? 마력이 적지 않게 나간다고. 아니지. 엄청 나간다고!”
그러고 보니 그러네?
“너 들어가!”
“맞아요. 들어가세요. 나오지 마요!”
“이, 이, 이 미친 것들이!! 나 물의 정령왕이야! 이 미친 놈들아!”
“알아.”
“그래서 들어가라는 건데? 마력 많이 먹지 말라고?”
“하! 멍청하기는! 사제의 신성력보다 내가 만드는 치유의 물이 훨씬 아이에게 좋아! 그것도 몰라?!”
엘라임이 발끈해서 하는 말에 나와 소피아의 입에 조개처럼 다물어졌다. 그래? 그걸 어떻게 알아? 애초에 상급 정령도 처음 보는 판인데?
“그럼 좋아. 너는 인정. 하지만 이프리트나 실피드는 안 돼. 노아스까지는 괜찮아.”
“맞아요. 그리고 마력을 적당히 빨아가라고요. 선배님 힘들게 하지 마요.”
“풉! 호호호호.”
“이, 이것들이! 나 정령왕이야! 정령왕!!”
그렇게 그날 소란을 듣고 찾아온 지의사들에 의해 엘라의 임신 사실은 영지 전체에 퍼졌다. 가장 난리가 난 이들은 엘븐나이츠들.
“성녀님. 목욕 준비 끝났습니다.”
“성녀님. [내성] 주변 이상 없습니다.”
“성녀님. 음식 준비됐습니다.”
…
이들은 왜 이 난리일까? 단순히 그들이 아끼는 엘라가 아이를 품었다는 이유로? 나도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소설에 보면 그런 말 있지 않아요? 하프 엘프는 엘프와 인간 모두에게 배척받는다는? 아! [창천의 날개]에 하프 엘프 있지 않으세요?”
식사 자리에서 유다연이 아무 생각 없이 꺼낸 질문에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을 때,
“다른 차원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 차원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엘프에게 대스승이라고 불리던 마기스테르가 답을 했다.
“정말?”
[창천의 날개] 소속 하프 엘프 앤이 놀라며 되물었고,
“그렇습니다. 결단코 없습니다.”
마기스테르는 확신했다. 그가 모든 하프 엘프를 확인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결단코’라는 단어를 붙여가며 확신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확신해?”
아니나 다를까. 앤이 궁금하다는 듯이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그리고 마기스테르의 대답에,
“우리 차원에서는 하프 엘프라는 종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엘프와 인간이 결혼한 이후, 태어나는 아이는 둘 중 하나입니다. 엘프이거나 인간이거나.”
“헐…….”
허탈하지만, 그가 확신한 이유를 충분히 이해했다. 하프라는 종족이 없는 차원이라니. 그냥 유전자의 조합에 의해 하프가 태어나는 게 아니었나?
누군가 그렇게 과학적으로 접근할 때,
“그리고 지금 성녀님의 배 속에 있는 아기는 하이 엘프라는군요. 엘라임님께 확언을 받았습니다.”
마기스테르는 [엘븐나이츠]의 호들갑에 대해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어색하게 웃으면서.
“그러니 우리 멍청한 엘프들의 호들갑을 떨어도 부디 너그러운 양해를 부탁합니다. 도를 넘는 놈이 있으면 제가 뒤통수를 깨놓겠습니다.”
어쩐 일로 하필 북적이는 시간에 식당을 찾았나 했더니, 양해의 말을 전하려고 찾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올리비아가 남미 대륙을 다녀온 오늘.
난 당연하게 새롭게 나타난 고위 언데드 전투 병력이 있는 곳에 엘리아나를 보낼 생각이 없다.
“[엘븐나이츠]. [창천의 날개]. 네이비(Navy) 랭크에 도달한 사람만 지원받을게. 그리고……. 엘프들은 오늘 [농장]에서 [영초]를 최대한 수확해줘.”
대신 블루 랭크의 [기사단 숙소]와 고유 능력 [문을 여는 열쇠]의 영향으로 네이비 랭크에 오른 존재들과 [마스터 기사]라는 블루 랭크 [기사단 숙소]에서 소환할 수 있는 압도적인 전투 병력을 대규모로 보낼 생각이다.
카르마 포인트를 있는 대로 사용하더라도.
“[연금술사]들도 좀 도와주고.”
난 영지를 지키고,
“[요리사] 클래스들은 특별히 버프가 들어간 도시락을 준비해줘. 각자 원하는 메뉴로. 카르마 포인트는 내가 낼 테니까.”
내 사람들을 지킬 거다.
“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