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목격자가 없으면 암살이라던데?>
이쯤 되면 한 가지 궁금한 게 생길 거다. 황천 기사단장이 놀라고, 리치 군단장이 경악하고, 언데드 분대가 벌벌 떨게 한 존재가 누구일까?
뭐, 이요한의 영지에서 출발한 이들이라는 걸 짐작할 테지만.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조금 더 뒤로 돌려봐야 한다.
이요한은 이른 새벽부터 생존자 구출이라는 무거운 임무를 어깨에 얹고 있는 이들을 마중하기 위해 일찍 일어났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 정도면 되려나?”
“…솔직히 말씀드려서 조금 과하다는 거 영주님도 아시죠?”
마기스테르는 어딘가 질린 듯한 눈으로 이요한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마기스테르는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사명감 같은 것이 있었다. 자신의 신녀님의 주인님인 이요한이 바라는 것을 반드시 이뤄주겠다고.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뭐, 차원의 틈에서 서서히 정신적으로 죽어가던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의 신녀까지 살려줬다는 건 기본적으로 깔고 가는 거다.
어머니의 나무가 있는 세상에 불러준 것도.
소환된 엘프를 ‘노예’가 아니라, 신뢰하는 측근이자 동등한 인격체로 대해주는 것도.
철이 없는 [엘븐나이츠]의 천방지축 저지르는 사고도 대수롭지 않게 받아주는 것도.
일일이 열거하자면 긴 양피지, 아니 이 행성에서는 양피지를 안 쓰지. 그 깨끗한 A4? 라는 용지에 가득히 적어야 할 정도로 이유가 많다.
하지만 그가 이요한의 계획을 듣고 그 계획을 반드시 이뤄주고야 말겠다고 다짐한 이유는 엘리아나가 소중한 아이를 잉태했기 때문이다. 엘라임이 넌지시 알려준 말에 따르면 아이는 하이 엘프일 것이라는 것도 그 다짐에 심각함의 무게를 더 했다.
그러니 [엘븐나이츠]에서 지원자가 속출하지 않았겠나. 하지만,
“네이비(Navy) 랭크 미만은 빠져. 최소 네이비 랭크야.”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에 저렇게 저렇게 말할 수 있었다.
“무슨!! 마기 영감! 마스터가 우스워?!”
네비이에 이르지 못한 [엘븐나이츠]의 반발이 있었지만,
“적이 악독한 언데드 놈들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이번 임무는 게릴라 같은 게 아니야. 생존자 구출이지. 그럼 보호해야 할 인간이 많겠지?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몸을 뺄 수 있는 존재의 기준점은 네이비 랭크다.”
마기스테르의 칼 같은 말에 더는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다. 그저 입을 삐쭉대며 불만을 토로할 뿐이었다.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마기스테르는 자신이 조금 과하게 기준을 잡았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이것부터 받아. 이것도. 이거랑, 이것도.”
새벽부터 만난 이요한이 마기스테르의 품에 무언가를 계속 안겨주고 있었다.
전투에 도움이 되는 스크롤과 [연금술사]가 제작한 것처럼 보이는 온갖 색상의 병, 그리고 [마법사]가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흉흉한 마력을 품은 보석이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이건 버프 효과가 있는 음식이야. 새벽부터 [요리사] 클래스 각성자들이 엄청 고생했으니까 끼니마다 꼭 챙겨 먹어. 무엇보다 북미 대륙에 진입하기 전에 꼭 밥부터 먹고.”
요리까지 챙겨준 이요한은 허공을 응시하더니,
“[마스터 기사] 109기 소환할게.”
그렇게 말했다. 109기의 [마스터 기사]. 이요한의 눈에만 보이는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은,
『마이너스 카르마 오천칠백팔십만 칠천팔백이십(57,807,820) 포인트와 특수 카르마 일억 오천칠백사십육만 칠천백팔십(157,467,180) 포인트. 총 이억 일천오백이십칠만 오천(215,275,000) 포인트와 [영단] 109개를 차감합니다.』
이렇게 엄청난 숫자의 압박을 보여줬다. 저것도 할인이 된 거다. 정가인 5억 4,500만에서 [문을 여는 열쇠]의 효과로 소환 비용이 50% 할인 되었다. 그 할인된 카르마 포인트에서 [연구원] 21명 덕분에 2억 1천만 정도가 책정된 셈이다.
카르마 포인트는 충분하다. 다만 영단이 109개가 전부인 게 문제지.
갑자기 등장한 블루 랭크의 기사 109명. 그것도 [문을 여는 열쇠] 덕분에 마스터 초입이 아니라, 30% 증폭을 이뤄 마스터 중위에 이른 존재가 109명.
마기테르스는 이요한이 자신보다 더 극성이라는 것에 치를 떨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출발한 생존자 구출이었다. 전에 올리비아 때와 달리 은밀하지만 빠르게 이동한 그들은 구름 위를 날고 있었다.
그것도 설기가 마력을 일체 쓰지 않고 온전히 육체의 힘만으로 비행을 했는데,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속도여서 마기스테르가 따로 바람의 정령을 소환해야 했다.
“이 정도 높이라면 리치가 아니라, 아크 리치라도 감지할 수 없겠군. 그것도 마력을 사용하지 않으니.”
까마득하게 멀리 보이는 육지를 보면서 그렇게 중얼거린 마기스테르는 옆에 앉은 조인족의 족장 녹투오스를 보며 입을 열었다.
“어떨 것 같나?”
주어와 목적어가 사라진 질문이었지만, 녹투오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알아듣고 대답했다.
“이 정도 전력이라면……. 역으로 요격을 해도 되겠군. 영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놈들은 오만하게도 10명 내외로 흩어져서 다닌다지? 적지나 마찬가지인 다른 차원에 들어와서??”
“맞아. 그랬지.”
“적지에서는 매사 조심하고, 까치발로 걸어야 하는 걸 모르다니. 쯧쯧.”
“뭐, 어때? 내가 우리 애들 가르칠 때 쓰는 말인데. 지금 딱 어울리는 말이 있는데.”
“뭔가?”
“모르면 맞아야지.”
“…맞는 말이네. 모르면 맞아야지.”
인간과 이종족을 포함해서 가장 나이가 많은 둘이 의외로 통하는 부분이 있는지 신변잡귀적인 주제로 대화를 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순식간에 어떻게 적을 요격할지에 대한 계획이 섰다.
그리고,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는 중이라는 거잖아? 그럼 이거 어때? 북쪽 해안선을 경계로 이렇게 돌면서 사냥하는 방식.”
“아아. 돌려 깎기를 하자는 거네? 음. 나쁘지 않지. 설기가 엄청 빠르고 자체적으로도 무력을 지니고 있으니까. 우리는 나누지 말고 일시에 들이쳐서 비상 신호조차 못 보내게 하는 방식으로?”
“그, 그렇지. 설기…님은 대단하시지.”
익숙하고 숙련된 작전 장교처럼 둘은 순식간에 계획의 뼈대를 세우고, 디테일을 채워갔다.
어느 순간 이 원정의 본래 목적인 생존자 구출은 뒷전이 되었다. 빠르게 한탕을 치고 빠지려는 사기꾼처럼 음흉한 웃음을 짓던 두 노인은 첫 번째 황천 기사단 무리를 발견하고는 악동처럼 웃었다.
“마기로 통신하는 방식이니까 간섭은 힘들어.”
“그러나 다행이 저기 통신병이 한 명뿐이네?”
“으흐흐흐흐.”
“흐흐흐흐.”
“다 뒈졌다.”
“다 죽었다.”
어딘가로 바쁘게 달려가는 황천 기사단의 머리 위로 설기가 급강하를 감행했다. 그 모습이 급강하라기보다는 그냥 급추락 같은 느낌으로 날개를 접고 땅으로 내리꽂혔다.
그리고 단순히 하늘에서 땅으로 거리를 줄이는 게 목적이 아니라, 설기가 최초 급강하에서 노린 목표가 황천 기사단에 어울리지 않게 포함된 리치였다.
콰득―! 파스스스.
섬뜩하게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와 뼈가 갈라지는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추락에 가까운 급강하를 했음에도 오히려 그에 따른 굉음은 없었다. 자이언트 윙 샤벨 타이거도 어떤 의미에서는 고양이과가 아닐까?
부드럽고 조용히 착지하면서도, 착지와 동시에 네이비 랭크까지 열린 설기가 리치의 두개골부터 대퇴부까지 일시에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리치는 보통 불사의 존재에 가깝다. 라이프 베슬을 따로 보관해 부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설기는 차원을 하나의 차원의 최상위 포식자이자, 조율자였으며, 균형 수호자였다. 그에게 따로 보관한 라이프 베슬 따위는 조금 더 신경 써야 할 정도의 문제 밖에 되지 않는다.
더욱이 리치가 누더기 행성이 아니라, 지구로 오게 되면서 라이프 베슬을 일단 지구로 들고 올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되었다.
그러니 부서진 몸이 다시 맞춰지려는 순간,
“먀!”
[흥!]
그걸 설기가 놓칠 리가 없다. 포식자의 흉포한 마력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리치의 마기를 타고 올라가 역으로 라이프 베슬을 깨트렸다.
그렇게 설기의 활약으로 통신을 전할 방법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설기 위에 있던 네이비 랭크의 강자들과 블루 랭크인 [마스터 기사]들의 일방적인 폭력이요, 압도적인 화력이었다.
황천 기사단? 파괴? 살육?
그게 뭐? 모르면 맞아야지.
이런 느낌으로 찰나의 순간에 가해진 압도적인 힘에 고위 언데드라는 지위에 어울리지 않게 부활이나 저항조차 못 해보고 사라졌다.
“그래! 그래! 그래! 이거지!”
“계획대로 되었군. 훌륭한 암살 작전이었다.”
누가 보면 전형적인 책사나 참모가 할 법한 감탄이었지만,
“…이걸 계획대로 된 거라고 할 수 있나? 암살 작전이라고?”
일행 중 최초 리치를 소멸시킨 설기를 제외하면 압도적인 화력을 쏟아부은 둘을 보면서 ‘계획대로’가 아니라, ‘계획대로 되게 만들고야 말겠다’는 말이 더 맞지 않나?
“이거 그건가 봐. 애들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 목격자가 없으면 암살이라던데? 몰살=암살이다?”
그렇게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도 [엘븐나이츠]는 불의 정령과 땅의 정령을 소환해 흔적 일체를 지워냈다.
“사기(死氣)나 악기(惡氣)가 한톨도 남아 있으면 안 돼.”
단순히 언데드를 처치로 적의 전력을 줄이는 게 목적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이동하자. 부탁할게. 설기야.”
“부, 부탁드립니다. 서, 설기님.”
녹투오스가 여전히 설기를 어려워한다는 점만 빼면 산책이나 다를 것 없는 시간이 지나고 다시 설기가 하늘로 솟구쳤다.
그렇게 셋이나 되는 무리를 처치 했을 때,
“응?”
이변이 발생했다. 통신용 아티팩트가 반짝이기 시작한 거다. 통신용 아티팩트는 일단 ‘마기’가 있어야 작동한다. 그리고 일행 중에 마기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게 처음에 그거 하지 말자니까.”
“칫.”
그럼 처음 통신을 어떻게 받았을까? 마기가 있어야 하는데?
“거의 완벽했어! 잔존 마기를 모아서 작동까지 시켰잖아! 말투가 문제였나?”
[엘븐나이츠]의 2조장 에리카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엘븐나이츠] 소환 초기 마기스테르의 체력 단련에 마법산데 왜 체력 단련을 하냐고 따졌다가 ‘왜 그래야 하는지 몸에 심어주지’라는 말과 함께 뒤지게 맞았던 여인이다.
그녀는 소멸한 리치의 소지품을 보다가 통신 아티팩트를 발견했고, 잔존 마기를 끌어모아 통신 아티팩트에 접촉했고 작동시키는데 성공했다.
쉽게 말했지만, 절대로 쉽지 않은 방식이었다. 에리카의 기예를 지켜 본 녹투오스가 놀라며 “젓가락으로 바늘에 실을 꿰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라고 했을 정도니까.
“어떻게 할 텐가?”
하늘 위 높은 곳에 있기에 적의 움직임이 훤히 보였다. 둘 혹은 셋의 무리가 서로 만나도록 이동중이라는 것을.
“저 정도를 처리하려면 마력이 노출되겠지?”
지금까지는 완벽한 공조로 마력이 새어나가는 일이 없게 했지만, 남쪽으로 후퇴하는 놈들은 서른이 넘어간다.
“애매한 숫자네. 치면 조질 수 있는데. 들킬 것 같긴 하고.”
“…그런데 들키면 안 돼요?”
누군가 조심하지만 이해할 수 없다는 감정이 흘러나오게 그렇게 물었다.
“그거야 당……? 그러게? 들키면 안…되나? 들켜도 되지 않아요?”
의사를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기사단 숙소]에서 소환한 109명의 [마스터 기사]를 제외한 이들의 시선이 모두 녹투오스와 마기테르스에게로 모였다.
“잠깐만. 잠깐.”
콜롬버스의 달걀 세우기 같은 모두가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믿고 있던 것이 깨지는 순간 마기테르스는 무언가를 빠르게 계산하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가 서른의 황천 기사단을 처치했지? 그리고 지금 보이는 움직임을 토대로 대략적으로 계산하면 황천 기사단 놈들이 모두 나온 셈이야. 맞아?”
“음.”
마기테르스가 거기까지만 말했음에도 다들 무슨 말을 꺼낼 건지 짐작했다. 이들은 모두 차원의 종말에 맞서 싸운 역전의 용사들이자, 전투의 베테랑들이었으니까.
“본진을 치자?”
“그래. 자네가 그랬잖은가? 황천 기사단에서 가장 큰 문제는 기사단장 놈의 악랄한 머리라고.”
그의 제안에 각자 생각에 잠겼다.
그러면서 빠르게 계산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모인 네이비 랭크 강자는 총 여섯.
마기테르스와 녹투오스.
그리고 [기사단 숙소] 랭크와 [문을 여는 열쇠]의 효과로 [엘븐나이츠]로 소환되기 전, 고향인 차원에서 공허에 맞설 때 넘지 못해던 네이비의 벽을 강제로 넘은 네 명의 조장이 포함되어 있다.
“좋아. 일단 빈집을 노리자. 만약에 칠만하면 쓸어버리고, 그게 아니라면…….”
“전장의 흑여우. 그 빌어먹을 새끼라도 조지자 이거지?”
“그래.”
“좋아!”
죽마고우라도 된 것처럼 서로의 생각을 말하지 않아도 알아차리는 둘을 보면서,
“저게 그건가? 아재들끼리만 통한다는 그거?”
에리카는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을 말했다가 마기테르스의 두고 보자는 눈빛을 받았지만,
“흥! 난 이제부터 신녀님 옆에 있을 거라고요! 베에!”
무적의 방패를 믿고 있었다. 그건 결과를 봐야 알겠지만.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먀아.”
[준비해.]
설기는 출발했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선이었던 곳을 향해서.
“저게 뭔……?!”
그리고 그들이 막 황천 기사단장과 리치 마법 군단이 있는 곳의 구름 위에 도착했을 때, 그들 앞을 스쳐 아래로 떨어지는 운석을 보았다.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음에도 소름이 일게 하는 운석을.
“이것들이 미쳤나!”
그리고 운석이 땋에 닿고 일어나는 존재들을 보면서 녹투오스는 화를 냈다.
“아크 리치가 셋? 데스나이트 로드가 둘? 그럼 지금 지구에 네이비 랭크 수준의 언데드가 일곱이나 있다고?!!”
“…습격은 하지 않는다. 생존자만 구출해서 빠르게 영주님께 돌아간다.”
마기스테르가 빠르게 결정을 내리고 북쪽으로 나아가는 설기의 몸 위에서 각자 생각에 빠진 강자들 사이로,
‘이상한데? 진(陣)을 짜는 느낌이었어. 너무 멀어서 확실하지 않지만.’
엘븐나이츠 조장 중, 유일한 마법사 에리카가 지상에서 미세하게 느껴지던 섬뜩하고 기분 나쁜 마법적 기운을 상기하며 고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