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언제나 그랬듯, 우리 인간은 방법을 찾아낼 거예요.>
소피아와 엘리아나가 ‘각인’을 생각한 건 상당히 오래 전 일이었다. 이요한이 말도 없이, 그리고 겁도 없이 길을 걷다가 블루 랭크로 스탯을 올려 버리고 쓰러진 그때였다.
이요한을 일주일 가깝게 간호하면서 둘은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었다. 자신이 살던 차원이 끝내 무너지던 고통스러운 과거까지 꺼냈을 정도로.
이요한이 기절한 것처럼 잠만 자는 상황에서 둘이 민감하게 주변 환경에 대한 간섭마저 차단하고 방에 틀어박혀 있었으니, 대화의 물꼬라도 틀려면 다양한 주제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소피아가 그런 말을 꺼냈었다.
“고작? 고작이라고 하면 좀 그런가요? 아무튼 마스터 경지에서도 이러셨는데, 우리 영주님 그랜드 마스터 경지는 어쩌죠? 선배님?”
엘리아나는 소피아의 말에 몸이 덜컥 굳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고작 마스터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랜드 마스터 그리고 그 이후 초월의 경지에까지 생각하면 정말 아무 것도 없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아찔한 기분이었다.
“대책을 세워보죠. 후배님.”
“네. 언제나 그랬듯, 우리 인간은 방법을 찾아낼 거예요. 선배님.”
“좋아요.”
그리고 이요한이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신체의 조종 과정에서 기절해 있는 동안 엘리아나의 정령이 움직였다. [엘븐나이츠]와 [창천의 날개]에게 전달된 내용으로 각 그룹에서 전문적인 이들이 영주 보호라는 명목으로 이요한의 방 안에 자리를 잡았다.
이틀 동안 여러 이야기가 오갔고, 방 안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는 인원도 교체되기도 했지만 딱히 이거다 하는 말이 나오지 않았을 무렵,
“그린에서 블루보다 블루에서 네이비로 넘어갈 때, 무의식이 훨씬 넓고 깊게 확장된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창천의 날개]에서 기사단장을 맡고 있는 제니퍼가 영지에서 가장 강한 존재인 엘리아나에게 확인 차 그렇게 물었다. 제니퍼 역시 네이비 랭크를 돌파했던 경험이 있었지만, 그녀는 정상적인 과정을 통해 돌파한 게 아니었다.
공허에 반쯤 몸이 먹혔을 때, 성녀인 소피아 로렌의 신성력으로 공허를 소멸시켰고, 그 과정에서 우연과 우연이 겹치면서 마력 코어와 마력 회로가 하나가 됐다. 반쯤 강제적으로 벽을 넘은 경우다.
“네. 맞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요? 무의식이 열릴 때, 그러니까 초월 직전에 일종의 각인 새기는 겁니다. 제가 친하게 지내던 하이 오크 녀석이 있는데. 그들은 성인식을 치른 후, 부족의 주술사에게 문신을 새기기 전에 지칠 때까지 사냥을 한다더라고요. 문득 그게 떠올랐어요.”
“좋은데요? 더 듣고 싶네요.”
엘리아나가 반응했고,
“그거 그거지?! 하이 오크의 비전 문신술?”
소피아가 자신도 아는 일이라고 그걸 기억하며 동조했다.
이후 회의는 급물살을 타고 진행됐다.
“일반적으로는 이 방법을 쓸 수 없습니다. 무의식에 유용한 비전을 각인시킨다는 건 불가능하죠. 언제 벽을 넘을지 본인조차 알 수 없기 때문이니까요.”
“하지만 영주님을 비롯한 지구의 각성자들은 자신이 원할 때 벽을 넘을 수 있어.”
“좋아요. 다 좋은데. 지금 선택한 것들이 너무 많아요. 이 중에서 최대한 정말 필요한 것만 챙겨서 줄여야 합니다. 지금은 너무 과해요. 다 할 수도 없고요.”
“그렇지. 그리고 이건 무의식에 각인하는 작업이니까. 영주님이 모르는 상태에서 행동 각인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해야 해요.”
“음.”
다시 이틀이 지나고 나서야 여러 분야의 강자들이 모인 회의에서 유의미한 결과가 나올 수 있었다.
“얼핏 보면 간단한 체조 같은 거라고 느껴질 법한 부분부터 시작해서……. 맨손 체조를 거쳐 검과 활로 끝내는 거군요. 좋습니다.”
“이번에 조금 과하게 반응하면 우리 착한 영주님은 분명히 다음 벽을 넘으실 때, 저희한테 조언을 구하실 거예요. 그럼 그때. 소피아. 네가 나서서 직접 이걸 각인하면 돼. 이해했지?”
“알았어.”
그게 벌써 한참 전이었고, 그 이후로 갑자기 엘리아나가 임신을 하게 되면서 잠시 뒤로 밀려났지만,
“이제 선배님 차례예요. 신성무투술은 성공적으로 각인 됐어요.”
“그래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는 두 미인의 모습에서 지난 날에 치밀하게 준비한 안배가 모자라지 않다는 것이 이 순간 증명되었다.
신성무투술.
소피아 로렌이 태어난 차원에서 가장 강한 세력을 자랑하던 빛의 신을 믿는 교단에서 성기사와 사제가 가장 먼저 배우는 ‘몸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성기사뿐만 아니라, 사제도 배운다는 것에서 짐작한 사람도 있겠지만, 단순하고 간단한 맨손 체조 같은 느낌으로, 무투술이라는 말을 붙이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하지만 이것은 교단의 성기사들이 배우는 상위 체술과 무기술의 토대가 되는 것으로 오래 반복해서 익히면 위기 상황에서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수준이 된다.
더욱이 그랜드 마스터 이상의 경지에 오른 이들은 무의식이 감지하는 수준으로 위기 감지와 위기 대응에 탁월함을 보인다고 알려져 있다.
소피아도 이 무투술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긴 경험이 수도 없이 많았으니까.
이요한이 앞서 걷는 걸음이나, 한 발로 움직이는 것, 그리고 불규칙적인 보폭과 좌우 이동 그리고 스트레칭과 같은 행동에 이 신성무투술의 묘리가 담겨 있었다.
“생각보다 우리 영주님 엄청 재능이 있으시더라고요. 아닌가? 재능이 아니라, 어쩌면 이게 바로 그건 가봐요. 가신 혜택으로 받는 효과인 ‘사사(師事)’? 마력 각인이 너무 수월해서 조금 당황했다니까요?”
“다 후배님 덕분이죠. 지구의 각성자와 다른 차원의 마력 사용자의 차이를 설명한 덕분 아니겠어요?”
“헤헤헤. 그걸 또 알아주시구~.”
엘리아나는 자신 앞에서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로 해맑게 웃는 소피아를 보며 든든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동료? 등을 맡길 수 있는 전우?
“그래도 선배님이 분위기를 잘 잡아주셔서 더 잘 된 거예요. 옆에서 마력을 은밀하고 무겁게 퍼트리셨으니까.”
앞서 이요한이 단계적으로 스탯을 올리는 것부터 소피아와 엘리아나의 계획 아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소피아가 너무 뜬금없이 다른 종족과 인간이 다르다는 걸 이야기한 건 이요한의 예상처럼 위로를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정말 조금도 아니다. 이요한은 완전 헛다리를 짚은 셈이다.
마력 코어와 마력 각인에 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그걸 마력을 더한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한 이유는 벽을 넘기 직전에 몸을 움직인 것과 함께 머릿속에 마력 회로에 대해서 선명하게 ‘각인’하기 위해서다.
마력 회로를 새기려는 거냐고?
그럴 리가 있나.
소피아의 말처럼 마력 회로를 새기는 것보다 마력 회로가 없이 필요한 마력을 마음대로 꺼내 쓰는 지구의 각성자 몸이 더 상위의 시스템인데.
그건 다 무의식에 무술을 각인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벽을 넘기 전에 몸으로 움직인 것에 더하여 신성무투술 전용 마력 운용법을 벽을 넘느라고 확장된 무의식이 몸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소피아가 유도할 때, 더 선명하게 각인하기 위해서다.
「기절하기 직전에 100회 이상 반복한 행동 + 기절한 이후 확장한 심층 무의식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마력 운용 = 완숙의 신성무투술」이라는 방식이 나온 거다.
하이 오크 종족의 전투 문신술에서 출발한 계획이 완성의 단계 와 있다.
소피아가 시전한 게 신성무투술이라면,
“그럼 이제 제 차례일까요?”
“네. 선배님은 뭐라고 하셨죠?”
“[바람의 산책]이라고 해요.”
엘리아나가 준비하는 것은 바람의 산책이라는 기술이다.
“그게 그건가요? [엘븐나이츠]의 기초 신법(身法: 몸을 쓰는 법)?”
“후훗. 아뇨. 이건 어린 엘프들이 배우는 놀이랍니다.”
이것은 어린 엘프들이 세계수 아래서 자연스럽게 배우고 터득하는 몸을 쓰는 법이고,
“세계수께서 자신의 연약한 어린 자식이 위험에서 몸을 빼길 바라는 마음에서 내려주신 것이기도 하지요.”
세계수가 직접 내려준 신법이다.
“오! 엄청 좋아보여요! 아이들이 배우는 거니까 일단 쉽겠네요? 그리고 빠르게 익힐 수 있고. 놀이라고 했으니까……. 모든 면에서 활용할 수 있는 폭이 엄청 넓은 기술일 거고요.”
엘리아나는 찰나였지만 감탄과 놀람에 눈이 동그랗게 커질 정도였다. 소피아의 짐작이 모두 사실이기 때문이다.
[바람의 산책]은 엘프가 숲에서 어떤 종족보다 민첩하고 날렵하게 살 수 있는 원동력이자, 엘프의 개성 넘치는 수 많은 사법(射法: 활을 쏘는 행위)의 토대가 되는 것이기도 했다.
“선배님! 그럼 잘 부탁해요! 우리 영주님!”
“네. 그래요. 그리고 이제부터 ‘언니’라고 불러 줄래요?”
“어? 네! 좋아요. 언니! 헤헤헤.”
이요한은 알까? 자신을 가장 최측근에서 둘러 싸고 있는 사랑하는 여인 둘이 이토록 치밀하고 무서운 여인들이라는 것을?
아무튼 엘리아나가 이요한에게 다가가 [바람의 산책]을 동조시킬 때,
쏴아아아아―.
이요한의 머리 위에 드리운 세계수의 가지 움직였다. 바람이 아름드리 나무의 수 많은 가지를 스치고 지나가면서 내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이요한과 엘리아나의 몸 위로 순수하고 순정한, 그러면서도 찬연하고 찬란한 자연력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아아. 어머니시여.”
그 모습이 마치 세계수가 이요한과 엘리아나 그리고 엘리아나의 뱃속에 있는 아이까지 모두 축복하는 것 같은 모습으로 보여서 엘프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미쳤어. 여긴. 정말이지.”
그리고 조인족의 주술사이자, 제사장인 오페라는 오늘도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감탄과 경악이 섞인 ‘미쳤다’는 말을 되뇌었다.
엘리아나의 각인이 세계수의 도움으로 월등한 무언가로 변해 끝나기 무섭게,
“으음.”
기절한 듯 누워 있던 이요한이 눈을 떴다. 이요한이 눈을 뜨고 가장 먼저 본 것은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엘리아나의 커다란 눈동자였다.
“엘라.”
“고생하셨어요. 요한님.”
그 목소리를 듣고서야 이요한은 자신이 아무런 문제도 없이 무사히 벽을 넘었음을 실감했다.
“뭔가 꿈을 꾼 것 같았는데.”
“꿈이요?”
“응. 빛을 향해 달리기도 하고, 바람을 타고 뛰어놀기도 하는 그런 이상한 꿈.”
이요한이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 바로 옆에 있던 소피아와 엘리아나가 차례로 움찔 거렸다.
소피아의 [신성무투술]은 빛의 신을 모신 그녀의 교단에서 빛을 바라보며 맹목적으로 따르겠다는 의지의 산물이었고.
엘리아나의 [바람의 산책]은 말 그대로 바람을 타고 뛰고 달리고 매달리며 노는 놀이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