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계약에 위배 되지 않습니다.>
황천 기사단장은 자신이 보는 상황이 사실인 건지 의심부터 들었다.
“환상 마법 같은 것에 당한 게 아니지? 내가 느끼는 이 기운. 확실히 어비스가 맞는 거지?”
“맞습니다. 우리가 해냈습니다!”
리치 군단장의 호들갑에 비로소 실감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자신들이 성공한 이 상황이 황천 기사단장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동안 왜 다른 차원을 침공하면서 이런 짓을 하지 않았을까?
심연이 등장한 것만으로도 황천 기사단장 자신의 무력이 최소 1.5배 이상 강해진 게 느껴지는 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효과를 왜?
왜긴 왜겠나.
이건 애초에 실현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카르마 포인트가 엄청 필요한 건 차치하더라도 말이다. 심연은 모든 차원에서 배척받는 개념이 모인 곳이다. 쓰레기통? 하! 오히려 옛날 재래식 화장실에 가깝다. 땅을 파놓고 거기에 볼일을 보는 곳. 오밤중에 가면 귀신에 놀라 뒈질지, 냄새에 숨이 막혀 뒈질지 모를 그런 곳 말이다.
그런 심연이 차원을 침식하는 걸 차원의 상위 존재들이 보고만 있을까?
정말 필사적이고 적극적으로 방어할 거다. 심연을 소환하는 게 아니라, 고작 데스 존이나 언데드 스팟만 생겨도 어떤 상위 존재는 자신을 믿는 존재들을 대거 희생시켜 저지하기까지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게 왜 진짜야?
“이게 맞아?”
황천 기사단장이 품은 의문은 너무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느껴지는 불길함과 불안함이다.
“네. 어비스와 연결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린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응?”
“군주님께 소멸당할까 얼마나 불안하던지. 하필이면 마법진의 획을 잘못 그을 뻔한 적도 있다고요!!”
“정말? 그런 걸 걱정했단 말이야? 쓸데없이?”
“쓰, 쓸데없다뇨! 언데드가 소멸 말고 두려울 게 뭐가 있어요!”
“차라리 소멸하는 게 낫지. 데이몬 님 못 봤어? 소멸 직전까지 갔다가 부활한 게 칠만오천 번이 넘는다던데?”
“아아! 몰라요! 아무튼, 처음으로 구현해 본 거라서 긴장을 엄청 했다고요! 군주께서 개념만 잡아주셨지, 이게 될 줄은 저는 물론이고 다른 아크 리치 선배들도 확신하지 못했으니까요.”
“뭐? 처음이었어?”
“당연히 처음이죠. 군주께서 심연을 되찾겠다고 결심하신 게 2천 년 정도밖에 안 됐는데요.”
“그런데 됐다고? 최초 시도에?”
“하하. 그러니까요. 어쩌면 제가 생전에 마법진 같은 걸 제법 만졌나 봅니다. 하하하.”
“이게 말이……? 되나?”
누군가를 그럴 거다. 운이 좋게 될 수도 있지 않냐고. 보통은 그렇게 넘어갈 수 있지만, 이들은 언데드라는 게 문제다. 행운과 언데드? 언데드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마력에 배척을 받는데 운이 따른다?
“그럴 리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황천 기사단장은 살갗이 없음에도 뼈에 소름이 돋는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에서 알립니다.』
그의 본능은 이번에도 적중률이 좋았다. 너무나도.
『차원 지구의 의지가 차원 쟁탈전 계약에 위배하는 행위가 벌어졌다고 신고했습니다.』
『차원 심연의 추방자의 초월자 리치 군주가 이에 반박합니다. 계약에 위배하는 행위는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뭐, 뭐뭐?!”
당연히 같이 있던 리치 군단장도 그 메시지를 보게 됐다. 고작 군주에게 소멸당하는 두려워해서 아크 리치임에도 마법진에 획을 잘못 그릴 뻔한 겁이 많이 이 아크 리치에게 무려 차원의 초월자들이 다투었다는 소릴 들었으니 경기를 일으키고도 남았다.
『양측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본래라면 묵살했을 사안입니다. 하지만 앞서 그린스킨의 위법 행위와 증거를 확인한 본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은 이번 사안을 조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지금부터 지구의 의지가 주장한 위범 증거 주변의 공간을 동결합니다.』
쩌억―!
순식간에 심연의 온갖 기운이 흘러나오던 땅에서 기운이 사라진다. 아니다. 사라진 게 아니다.
“진짜로 동결했어? 이건 시간에 관여한 것인가? 아니지. 시간만이 아니구나! 시간과 공간을 멈춘 것인가?! 그래서 동결인가? 허어!”
황천 기사단장은 자신 옆에서 호들갑을 떠는 아크 리치를 보면서 뻑뻑한 밤 고구마를 강제로 목구멍에 처넣은 것처럼 답답함을 느꼈다.
‘지금 그게 중요하냐? 넘치는 힘이 사라졌는데 무슨 이런 멍청한 반응을.’
조금 전까지 세상이 자신을 안아주는 기분이었다면, 지금은 평소 다른 행성을 침공할 때처럼 세상이 자신은 배척하는 기분이 들고 있었다. 언데드이기 때문이다.
“아아! 이런 식인가? 이건 마법으로 가능한가? 아니야. 이건 격이 다른 힘이 개입해야……. 켁?!”
한참 신이 나서 떠들던 리치 군단장의 머리를 황천 기사단장이 후려치면서 조용해졌다. 그제야 그는 이 상황에 대해 생각해볼 여유가 생겼다.
‘일단 차근차근 생각해보자. 뭐가 가장 큰 문제가 될 것인지를.’
…라고 생각했던 황천 기사단장이 있었다.
‘미, 미친?!!’
갑자기 주변의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단순히 온도가 내려가서 얼어붙는 게 아니라, 공간 자체가 시간이 멈추고 공간이 멈춘 것처럼 얼어붙었다.
그 말 하지 않았냐고? 어비스 존만 얼어붙은 게 아니라,
“…….”
조금 전까지 신기해하며 살피던 아크 리치도, 그런 아크 리치의 머리통을 후려갈긴 황천 기사단장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죽었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다. 모든 감각이 살아 있다. 언데드이기에 숨을 쉬진 않지만, 뼈에 새겨진 마기 회로를 타고 흐르는 마기가 한올한올 다 느껴졌다. 그렇지만 눈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움직일 수 없었다.
‘아니지. 눈도 움직이지 않는 거 아닌가? 내가 언데드라서 시야각이 넓을 뿐이지? 미친!! 이게 무슨 일이야!’
그러면서 황천 기사단장은 조금 전 리치 군단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공간 자체와 시간의 동결. 이런 일을 벌어질 수도 있는 건가? 그럼 자신들은 이대로 죽는 건가?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언제까지 이런 상태도 강제로 대기해야 하는지,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왜냐하면 주변의 대기 흐름이나 태양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말 그대로 공간이 동결되고 시간조차 멈춰 버린 공간에 그가 서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몇 분 흐르지 않았을 수도 있고, 며칠이 지났을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 몇 주가 지났을 수도 있었다.
황천 기사단장은 자신이 언데드가 아니었다면 미쳐 버렸을 게 분명한 모든 것이 동결된 공간 속에서 괴로워하던 시간도 결국 끝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입니다. 앞서 양측에서 제기한 이의에 대한 조사가 끝났습니다.』
‘끄, 끝났다!’
『거두절미하고 조사 결과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본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이 면밀히 조사한 결과 〈심연의 추방자〉 측에서 설계 및 시공한 차원 침식 주술 법진 통칭 [어비스 존]은 계약에 위배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 됐어!’
결론이 나오자 황천 기사단장은 언데드가 된 후 처음으로 ‘기쁨’이라는 감정을 절절히 느꼈다. 그 절절할 정도로 모든 뼈를 관통하며 흐르는 쾌감. 그 전율을 느끼느라 그는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하지 못했다.
왜 아직도 그의 몸이 움직이지 않는지를.
* * *
리치 군주는 애초에 객관적으로 자신을 평가하는 시각을 가진 존재가 아니었다. 심연에서 태어난 후, 심연에서도 가장 비루하고 비참한 지역인 〈깊은 곳〉 출신인 그는 그런 시각을 가질 수 없는 환경에서 태어났고, 살아왔다.
그렇기에 자기 객관화가 안 되는 것을 넘어 그런 말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리치 군주는 본인이 왜 지구라는 신생 차원에 집착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아니, 알고 모르는 것을 떠나 그런 상황에 대한 인지 자체를 못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 상황을 지켜보는 우리까지 그걸 모르고 지나가셔야 안 될 말이지 않은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리치 군주는 데이몬이 소멸한 후, 그는 인정하지도 않고 인식하지도 못하는 거대한 결핍을 느꼈고, 그것이 지구라는 차원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난 것이다.
실제로 이번 지구에 [어비스 존]을 설계하는데 소비한 카르마 포인트는 리치 군주가 만 년이 넘게 쌓아온 카르마 포인트의 57%였다. 무려 절반 이상의 카르마 포인트.
그런 그였기에,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에서 알립니다.』
『차원 지구의 의지가 차원 쟁탈전 계약에 위배하는 행위가 벌어졌다고 신고했습니다.』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의 메시지가 출력되는 순간,
“뭐라?! 감히 이 천한 것들이!!! 더러운 작당을 하고 여(余)를 기만하는가아아―!!!”
바로 의지를 투사하고, 권능을 발현해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에 정면으로 반박했다.
[시끄럽기는. 할 말이라도 있니?]
“…계약서에 위배된 일을 한 적은 없다. 내가 한 일을 계약서 어디에도 위법이라고 규정하고 있지 않다.”
뜬금없이 나타난 카르마 포인트에 분노 조절 장애라고 걸린 것처럼 화를 내던 리치 군주가 순식간에 분노 조절 잘해로 변해 논리적으로 반론을 제시했다.
『차원 심연의 추방자의 초월자 리치 군주가 이에 반박합니다. 계약에 위배하는 행위는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행동에 비웃음이나 경멸조차 보이지 않은 카르마 포인트의 행동에 이미 큰 문제가 있는 리치 군주의 정신에 커다란 균열이 새겨졌다.
『양측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본래라면 묵살했을 사안입니다. 하지만 앞서 그린스킨의 위법 행위와 증거를 확인한 본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은 이번 사안을 조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지금부터 지구의 의지가 주장한 위범 증거 주변의 공간을 동결합니다.』
‘이것들이! 감히! 본 여(余)를 능멸하는가!’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 같은 그가 그대로 멈춘 이유는 조금 전 등장한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이 짜증을 내면서 드러낸 힘 때문이었다.
물론 본인은,
‘결과가 나오고 난 뒤에 움직여도 늦지 않다. 여(余)의 의지는 그리 쉬이 무너지지 않으니.’
자신이 겁을 먹었다는 걸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소란이 있고 지구 시간으로 하루가 지나고,
“이, 이것들이 또 개수작을 부리는가!!”
거기서 다시 사흘이 지나고,
“흐흐흐흐. 감히 여를 능멸하고 살기를 바라는가.”
추가로 이틀이 지나 횟수로 일주라는 시간이 지났을 때,
“좋아. 죽여주마. 지구도.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도. 여(余)의 자비를 바라지 마라.”
가뜩이나 문제가 있었던 리치 군주의 정신 상태가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그러나,
『안녕하십니까.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입니다. 앞서 양측에서 제기한 이의에 대한 조사가 끝났습니다.』
『거두절미하고 조사 결과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본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이 면밀히 조사한 결과 〈심연의 추방자〉 측에서 설계 및 시공한 차원 침식 주술 법진 통칭 [어비스 존]은 계약에 위배 되지 않습니다.』
“응? 뭐라?”
그의 예상과 달리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이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자 정신줄을 놓고 본격적으로 분노를 풀어놓으려던 리치 군주의 행동에 제동이 걸렸다. 마치 역동작이 걸린 골기퍼처럼 폭발 직전까지 갔던 그의 분노가 향할 곳을 찾지 못하고 다시 역류했다.
분노가 아무리 격렬한 감정이라고 해도, 고작 감정이 역류한 정도로 호들갑이냐?
“끅?!”
…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리치 군주는 초월자다. 격을 벗고 인과와 이치를 비트는 권능을 다루는 존재. 그런 존재에게 감정의 역류는 단순하지 않다. 가뜩이나 정신이 아픈 리치 군주에게는 더더욱.
“끄윽! 컥!”
리치 군주의 몸에서 일렁이는 마기가 불길하게 넘실거린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울컥, 울컥 박동하는 탁한 기운이 리치 군주를 감싸고 있다.
“참…아야.”
아직 이성이 남은 리치 군주는 자칫 행성 자체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의 폭주를 어떻게 해서든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비록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오른 초월자가 아니라, 고유 능력의 진화로 강제로 초월자에 올랐다고 하더라도 초월자는 초월자.
리치 군주가 마기를 다스리며 막 안정을 찾아갈 무렵,
『계약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의 추가 설명에 리치 군주는 그만 간신히 잡아놓고 유지 중이던 이성의 끈을 놓치고야 말았다.
━━━━━━━━━━━━━━!!!!!!!
소리보다 먼저 강력한 에너지의 폭발이 먼저였다. 탑을 중심으로 2차원의 동심원(圓)이 아니라 3차원의 구(球)를 이루며 퍼져나간 파괴적인 폭발이 행성 누더기의 살점을 걷어내고, 본래 행성이 가지고 있던 땅을 드러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쾅━━━━━!!!
땅이 드러난 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뒤따라 들려온 폭음과 함께 드러난 땅조차 소멸하며 그 아래에 흐르던 뜨거운 맨틀이 모습을 드러내며 사방으로 마그마가 넘쳐흘렀다.
“컥?!”
리치 군주와 수백억의 언데드가 머물던 〈심연의 추방자〉 차원의 모성 누더기 행성이 파괴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