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야, 너두?>
『안녕하십니까.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입니다. 앞서 양측에서 제기한 이의에 대한 조사가 끝났습니다.』
『거두절미하고 조사 결과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본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이 면밀히 조사한 결과 <심연의 추방자> 측에서 설계 및 시공한 차원 침식 주술 법진 통칭 [어비스 존]은 계약에 위배 되지 않습니다.』
허공에 출력된 메시지를 지구의 모든 존재가 보고 있었다. 각성자와 비각성자를 가리지 않고.
그리고 여기,
“결론이 저렇게 났나.”
영국의 맨체스터 주의 쉘터에서 갑자기 나타난 메시지에 혀를 차던 남자는,
“다이애나.”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선 여인의 이름을 불렀다.
“앙리.”
둘은 허공에 등장한 메시지를 보면서 말이 없었다. 앙리도 그리고 다이애나도 서로 말을 하지 않았지만, 메시지의 등장과 함께 같은 장면을 회상하고 있다는 걸 서로가 알고 있었다.
만으로 하루 전, 영국 전체를 대표하는 각성자인 둘은 멸망이 시작되었을 때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아침에 벌어진 일을 떠올리며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 * *
“미친! 다이애나! 다이애나를 불러와!”
앙리는 쉘터를 향해 빠르게 날아오는 비행물체를 발견했다. 그것을 쉘터의 주인인 앙리가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의 쉘터 계열 각성자였다. 그것도 조금 특별한 능력을 지닌 쉘터 계열 각성자. 그의 쉘터는 일반적인 쉘터와 달리 안전 구역의 3배 범위에 대한 환경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이건 사실 엄청난 거다. 일반적인 쉘터 각성자처럼 쉘터 내에 절대적인 아군 보호와 적대적인 존재에 대한 페널티를 가지면서―이요한의 영지처럼 성벽 안쪽과 바깥이 같은 것도 아니고―그 3배에 달하는 영역에 이상이 생기면 바로 안다?
이요한이 들었다면 ‘파괴 이 개자식!’이라고 푸념을 내뱉었을 거다.
물론 이요한은 [망루]라는 사기적인 건물이 있어 그린스킨의 은신도 잡아내지만, 그 [망루]를 세우기 위해서 들어간 카르마 포인트가 상당하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무엇보다 [망루]는 옐로 랭크 영지에 해금된 건물이고, 블루 랭크에서 건설과 대기시간을 삭제하는데 6천만 포인트가 넘게 들었다. 네이비 랭크에서는 1억 포인트가 들었고.
아무튼 앙리의 다급한 소집에 모인 맨체스터 쉘터의 각성자들은 빠르게 거리를 좁히는 거대한 비행물체를 보고 침을 삼키고 있었다.
“다이애나.”
“앙리.”
이 쉘터의 주축인 둘은 서로 이름을 부르면서 많은 말을 하진 않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여러 의미가 함축된 말을 하는 중이었다. 벌써 일 년에 가깝게 괴물과 사투에서 살아남는 동안 둘의 전우이자 친우로 쌓아온 교감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웅―.
선명하고 짙은, 그래서 푸른빛이 조금은 비치는 것 같은 녹색 마력이 다이애나의 검을 타고 흐른다. 전투를 시작하기 전, 그녀의 의식과 같은 행동이었기에 모인 각성자들도 모두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블루(Blue) 랭크까지 고작 몇 개 안 남았어. 누구든지!’
자신의 경지를 떠올리며 두려움을 떨쳐내는 그 순간 쉘터 영역 경계에서 비행물체가 멈추고 천천히 하강했다. 거대한 서프보드를 닮은 물체의 문이 열리고,
척척―.
대충 보기에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인간’들이 나타났다. 어떻게 이런 세상에서 저런 걸 구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잘 정련된 금빛 갑옷과 시퍼런 날이 서 있는 검을 양손으로 쥐고 가지런히 가슴으로 모아 검면을 정면으로 보인 상태로 발을 맞춰 내려섰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마지막에 내린 사람을 보고는,
“이, 이요한?”
“유토피아 영주?!”
기겁하며 자신도 모르게 마력을 일으켰다. 그러니까 사람이 놀라면 ‘어머! 씨발!’ 이러는 것과 같은 반응인 거다. 물론 태생이 선한 작가는 놀랄 때 저러지 않는다. 진짜다.
아무튼 그런 반응을 본 이요한이,
“뭐야? 싸우게?”
라고 말을 꺼내기 무섭게,
후우우우우우웅―!!!!
이요한 앞에 서 있던 먼저 내렸던 기사들의 대검에서 일제히 강기가 솟구친다.
“허업?!”
강기를 눈앞에서 본 이들은 그것이 강기라는 것은 모르고, 강기가 어떤 힘을 지녔는지 몰랐다. 다만,
“네, 네이비?!”
그 강기의 색이 남색이라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았다. 그리고 남색 마력을 지닌 이들의 숫자가 100명이 넘는다는 것에 기절한 사람도 있었다.
“아, 아닙니다! 아니에요!!”
간신히 반쯤 가출한 정신줄을 부여잡아 앉힌 앙리가 무기를 바닥에 내던지고는 두 손을 맹렬히 흔들어 부정했다.
“그래? 맞아? 기사 여왕?”
“…맞습니다. 싸우려는 게 아니었어요.”
다이애나는 왜 이요한이 자신을 기사 여왕이라고 부르는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신을 깔보지도 그렇다고 자신의 무기에 두른 마력을 눈여겨 보지도 않은,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는 눈빛에 투지가 사라짐을 느꼈다.
“환영한다고 말씀드리지는 못하겠네요. 무슨 일이죠?”
“응? 몰라? 올리비아가 메시지를 보냈을 텐데?”
“올리비아……?”
“아! 올리비아 오바테. 유토피아의 냉혈녀! 그 정신 나간 여자가 메시지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애초에 스마트폰이 살아 있는 세상도 아닌데, 무슨 메시지를 주고받겠습니까?”
앙리는 너무 겁에 질려서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한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본능에 이끌려 멸망 전의 삶에서처럼 상황을 인지하고 객관적이고 논리적으로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것을 최대한 피력하려고 노력했다.
무슨 소리냐고? 그냥 ‘메시지 받은 게 없다.’는 말 대신, ‘핸드폰이 없는 세상 어쩌고’를 떠들어 댄 걸 말하는 거다. 올리비아를 유토피아의 냉혈녀라는 이상한 별명으로 부르면서.
“우리 올리비아가 정신이 나갔다고? 그럴 리가. 그녀 만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여자가 없는데? 당신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닌가?”
“그……!”
앙리는 ‘그거야 당신에게나 그렇겠지!’ 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의 생존 본능이 목소리가 나오는 걸 막았다.
“그리고 내가 말한 메시지란 올리비아가 자세하게 적어 올린 [공지]를 말하는 건데? 그걸 안 읽었어?”
“…그게 메시지를 보낸 겁니까?”
앙리는 자신도 모르게 나올 뻔한 욕을 가까스로 삼키고 되물었다. 그걸 메시지를 보냈다고 할 수 있을까? 일방적인 통보지.
“그럼? 전체 메시지잖아. 다들 꼭 읽어 보라고 [공지] 말머리도 넣었을 건데? 가이아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상황을 설명했잖아. 현재 지구가 처한 상황을. 지금까지 거쳐 온 다른 쉘터는 적극적으로 협조했는데. 여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나?”
다른 생각이고 자시고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 내용이 쉘터 내부를 공개하고, 일정 공간을 비워달라는 것이었으니까.
“그건……. 쉘터 내부를.”
“가이아 게시판에 별다른 코멘트가 없어서 동의했다고 여겼는데. 불만이었으면 코멘트라도 남기지 그랬나? 그럼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을 텐데?”
“…….”
앙리는 차마 너라면 그럴 수 있겠냐고 묻지 못했다.
“나라면 그럴 수 있겠냐는 얼굴이네? 나라면 그렇게 하지. 만약 그 방법이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이 나설 정도로 심연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막을 수 있다면.”
그런데 마치 그 생각을 읽은 것처럼 이요한에게서 대답이 튀어나왔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답이.
“아무튼, 너희 뜻은 알겠다. 쯧. 시간 낭비만 했군.”
이요한은 흥정이나 제안 같은 걸 하지 않고 바로 등을 돌려 그 기이한 비행물체에 올랐다. 자신들을 향해 섬뜩한 살기를 뿌리는 기사들도 그를 따라 들어갔고,
“어? 어어?”
앙리가 뭐라고 말을 해보기도 전에 그들은 쉘터에서 멀어졌다.
“이해해.”
그리고 그 거대한 것이 점처럼 보일 때가 돼서야 다이애나의 입이 열렸다.
“어? 뭐, 뭘?”
“네가 그렇게 반응한 거. 이해한다고.”
“…….”
“저 이요한의 태도가 거슬렸겠지. 넌 우리 쉘터가 유토피아 못지않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말은 안 해도. 아시아의 작은 나라의 쉘터 따위 라고 생각했을 거야. 맞지?”
“…음.”
앙리는 차마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자신이 각성한―엄밀히 따지면 다이애나를 생각해서 파괴가 각성시켜준― 쉘터의 고유능력은 다른 어떤 쉘터보다 더 뛰어난 것이었다. 안전은 물론이고 적을 요격하는 것에도.
그렇기에 앙리가 자평하기를 유토피아는 곧 허물어질 쉘터였다. 그렇잖은가.
‘성벽이라고? 성벽? 고작? 그거야 넘으면 그만이지. 내부에서 어떤 버프나 적을 구속하는 능력이 없는 쉘터를 쉘터라고 할 수 있나?’
앙리가 이런 생각을 가졌다는 걸 다이애나의 측근 중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나도 그랬어.”
“응?”
“나도 그랬다고. 저들의 힘을 직접 보기 전까지는.”
“…응?”
“앙리. 이번에는 실수한 거야.”
“실수? 저들을 쉘터 안으로 들이지 않은 게 실수라고?”
“그래. 우린 뒤처질 거야. 아마 앙리 너는 올리비아가 [공지]라는 말머리로 명령하듯이 올린 서두만 읽고 치웠겠지. 그 올리비아라는 여자가 올렸다는 공지. 다시 제대로 읽어봐. 왜 영지 일부를 내줘야만 하는지, 다른 쉘터에서는 왜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는지 알 테니까.”
다이애나는 앙리에게 거기까지만 말을 건네고 쉘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스탯을 올려 그린을 넘어 블루 랭크에 도달하기 위해서.
‘뒤처져? 우리가? 내가? 쉘터 안쪽을 내준다는 건 쉘터에 적대적이지 않은 존재라고 선포하는 꼴이라고! 저런 괴물들이 쉘터 안에 존재한다면 잠이라도 잘 수 있을 것 같아?!!’
멀어지는 다이애나의 등을 보며 분을 삼키던 앙리가 다시 올리비아의 공지를 읽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30분이 지난 뒤였다.
그리고 글을 전부 읽은 뒤,
“아아.”
앙리는 절망했다. 그리고 이해했다. 왜 모든 쉘터의 주인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쉘터 일부를 개방했는지를.
[텔레포트 게이트].
판타지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 신묘한 물건이 쉘터 안에 건설되는 것만으로 최악의 상황에서도 쉘터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나는.”
그는 어느새 사라진 가이아 게시판 대신 회색빛 하늘을 올려다보며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을,
‘후회하겠군.’
속으로 되뇌었다.
“그런데 너는…….”
마찬가지로 ‘왜 나를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냐.’라는 말도 차마 하지 못했다. 그 이유를 알 것 같았으니까. 자신처럼 다이애나도 이요한을 질투하고 있다는 것을.
앙리의 예상은 만으로 하루가 지난 지금 카르마 포인트의 메시지가 출력된 순간 확정되었다.
『하지만 심연의 출몰은 차원 공방전 계약 이전에 위대한 창조주께서 정한 규칙에 어긋납니다.』
『본디 심연이란…….』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이 어쩌고, 차원의 의지가 어쩌고 하는 것만으로도 스케일이 감당이 안 되는데,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이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창조주 어쩌고 한다?
“아, 좆 됐구나.”
자신도 모르게 생각을 입밖으로 꺼낸 앙리였지만, 그의 주변에 있는 누구도 그걸 뭐라고 하지 않았다.
‘야, 너두?’
다들 지금 같은 마음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