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결정 당했다.>
『이벤트 보상으로 획득한 기간제 안전지대 권역 안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기운 [심연]이 존재합니다.』
『기운을 몰아냅니다.』
“호오?”
[음. 아마…….]
흥미로운 기색을 풍긴 나와 달리, 반지의 에고의 말은 생략되어 있었지만 부정적인 뉘앙스였다. 그리고 지구의 의지인 그의 예상이 맞아 떨어졌다.
『현재 [심연] 주변으로 명계의 지배자, 죽음의 고위 신께서 발현한 권능 《소멸》이 적용 중입니다. 기운에 간섭할 수 없습니다.』
“뭐, 괜찮아. 이것까지 해결할 거라고 예상한 건 아니니까. 최고위 언데드들만 심연 밖으로 끄집어내면 돼.”
『하지만 이벤트 보상은 차원 유지를 위한 중요한 행사인 「차원 공방전」의 혜택 중 하나입니다.』
『이것은 어떤 경우에라도 예외가 생겨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그그그그그긍―!
멀리 불길한 기운으로 뒤덮인 땅이 강제로 밀려난다. 거대한 마법진의 특성에 맞게 거대한 원을 그리며 불길한 기운을 내뿜던 원형 공간이 일그러진다.
“응?”
마치 엄청 큰 피자를 곰이 와서 크게 베어 문 것처럼 움푹 들어간 형태가 되었다.
“호오?”
마법에 대해서 잘 모른다. 아니, 아는 게 없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안다. 마법진은 완벽한 원에 가까울수록 안정적이고 위력적이다. 원이 아니라 한 입 크게 베어 문 형태라면?
“마, 막아라!”
“어? 어어?!”
…
마법진은 제대로 작동될 수 없다. 주술 법진이라고 해도 마찬가지. 애초에 진이라는 것이 무언가를 정확하게 늘어놓는 방법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니 그 늘어놓는 법이 틀어지면?
“마, 막아아아!!”
법진은 소멸하는 거다.
문제는,
“아,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닿는 것만으로 리치 넷이 소멸했습니다!”
…
《소멸》이라는 권능이 담긴 벽 때문에 밖에 있는 이들은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크아아악!!”
“뭐, 뭐야?! 이거 왜 이래?!”
“법진에 마기를 쏟아부어! 무조건 안정시키라고!!”
…
한입 파먹은 모양의 법진 안쪽에 있는 이들은 일그러지기 시작한 기운 때문에 언데드임에도 고통에 비명을 지르거나 괴로워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안전 구역에 닿지 않은 아크 리치가 무려 셋이나 법진 안에 있어서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던 법진이 간신히 유지되고 있었다.
쓰러지기 직전의 젠가를 셋이서 두 손에 연결된 가느다란 실로 떠받치고 있는 것과 다를 것 없는 상황이었다.
“아주 개판이네. 난리 났다.”
[…이렇게까지 될 줄 몰랐는데요.]
반지 에고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는 듯한 반응인 걸 보면 이게 엄청난 일인 게 분명하다.
“저거 왜 안 깨져? 슬슬 깨질 때가 됐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깨져서 소멸해도 걱정이고, 안 깨지고 유지해도 걱정이겠습니다.]
“응? 누가?”
[네? 당연히……. 리치 군주가 아니겠습니까?]
“아아.”
* * *
이요한과 군주(君主)가 강 건너 불구경하듯 대화를 나누는 그 시각.
“이, 이, 이 비홀더 똥꾸멍 같은 새끼들이!!”
비홀더는 애초에 거대한 눈에 날개만 달린 악마형 몬스터로 똥꾸멍 그러니까 항문이 없다. 눈 밑에 달린 거대한 입으로 먹고, 입으로 싼다. 더럽게 더럽다는 뜻이다.
아무튼,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죽인다. 카르마 포인트 시스템이고, 신이고 지랄이고, 다 죽인다아!!”
리치 군주의 정신이 완전히 나가버렸다는 게 중요하다.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카르마 포인트의 4할이 이번 페널티로 날아갔다.
그리고 지금도 실시간으로 카르마 포인트가 대거 깎여 나가고 있다. 언데드를 품고 있기에 쌓이는 카르마 포인트보다 훨씬 가파른 속도로 줄어드는 카르마 포인트.
하지만 그렇다고 [어비스 존]을 파괴하자니, 방법이 없다. 애초에 이 주술 법진을 만든 게 리치 군주라고 알려졌지만, 그는 아니다. 언젠가 언급한 내용인데, 리치 군주의 재능은 그야말로 일천하다. 그러니까 재능을 몇 단계로 나누든 가장 밑의 단계에 리치 군주가 있을 거다.
엄청난 운으로 데이몬이 탄생하지 못했다면, 그는 밑바닥을 전전하다 사라질 그런 사령술사였을 거다.
그럼 누가 만들었냐고?
누구겠나. 리치 군주의 부족한 재능을 뒤덮고 남아 주인인 리치 군주를 초월자의 경지에 강제로 오르게 만든 데이몬이다. 데이몬의 재능이 그 정도였던 거다. 그래서 과거 하이 엘프 예언자가 리치 군주의 멸망이나, 동행한 어비스 나이트가 아니라, 데이몬의 멸망을 예언한 거다.
그러니까,
“젠장! 젠장! 제에에에엔자아아앙!!!”
리치 군주는 초월자이면서도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런데,
“흐엑?!”
막상 [어비스 존]이 어떤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누가 파먹은 것처럼 일그러지며 법진이 일그러지며 취소될 상황에 놓이자,
“마, 막아!! 막으라고!!”
잔뜩 겁에 질려 막으라고 외치며 발악했다. 그런 그의 의지가 그대로 전달되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본래 침공하는 차원의 초월자는 직접적으로 관찰조차 불가능한데?
그건 이 모든 사달의 원인인 [어비스 존] 때문이다. 심연이 소환된 차원 주변에 최고위 언데드가 즐비하기 때문에, 보고 듣는 것은 물론이고 강한 의지를 전할 수도 있게 된 상황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오히려 악수가 되었다. 앞서 설명했지만 법진은 무너지고 있었다. 이미 무너진 젠가나 마찬가지라는 거다. 그걸 세워보겠다고 달려 들어봐야 가능할 리가 없잖은가. 차라리 모두 무너트리고 다시 새우는 게 더 빠를 것이다.
“이, 이이이!!”
다만 리치 군주에게는 그럴 기회가 없다. [어비스 존]이 무너지는 순간 신벌이 내려진다고 했으니까.
그렇다고 이대로 억지로 유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카, 카르마 포인트가……!”
초월자가 된 후 한 번도 카르마 포인트가 부족해 본 적이 없는 리치 군주가 카르마 포인트 걱정을 할 정도로 빠르게 카르마 포인트가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무려 신의 권능을 빌려 벽을 만들었고, 그것에 대한 대가를 리치 군주의 카르마 포인트에서 빠져나간다. 당연히 콤마 초 단위로 막대한 양의 카르마 포인트가 빠져나간다.
“카르마 포인트가 있을 때, 신벌을 받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니야! 다른 방법을! 지금 다른 방법이 뭐가 있어! 망했다고! 그, 그래! 차라리 차원을 팔아버릴까? 아! 그것도 금방 되는 게 아니라고오!!!”
자아가 여러 개 새롭게 태어난 것처럼 막 소리를 지르던 리치 군주는 어떤 것 하나 제대로 결정하지 못했다. 그는 원래 그렇게 살아온 존재였다.
“비, 빌어먹을!!”
그러는 사이에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결정이 내려졌다. 일종의 ‘클리어 당했다.’ 같은 밈처럼 그는 결정하지 않았지만, ‘결정 당했다.’
“아, 아아아―!!”
리치 군주의 비명과 함께 누더기 행성에 검은 뇌전이 강림했다.
* * *
리치 군주는 어떤 결말을 맞이했을까?
누가 그의 결정을 대신 정해줬을까?
다들 눈치 챘겠지만, 그 주체는 이요한이었다.
마기를 쏟아부으며 소멸의 벽 안에서 법진이 무너지는 것을 막고 [어비스 존]을 유지하던 아크 리치를 일별하고,
“[그랜드 마스터 기사] 전원 착검.”
“하!!”
“[마스터 기사]를 대동하고 소멸의 벽 외부에 있는 언데드를 처리해.”
“하아!!”
언데드를 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좀 더 지켜보다가 공격하는 게 낫지 않냐고. 리치 군주의 카르마 포인트가 바닥 나기를 기다렸다가 쓸어버리는 게 더 좋지 않냐고 말이다.
‘목숨을 확률에 걸 수 없지. 이 멸망의 세상에서.’
더 나은 확률. 더 유리한 선택지. 그런 것보다 가장 먼저 우선해야 할 것은 안전이다. 이 돌발 상황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만약에 리치 군주의 카르마 포인트를 모두 썼는데, 저게 여전히 남아있으면? 내가 리치 군주의 카르마 포인트가 얼만지 어떻게 알아?’
이런 세상에서 이요한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안전이다. 무조건 안전.
“소피아. 성녀 수호대와 함께 여길 지켜. 미리 준비해둬.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안전할 수 있게.”
“네. 영주님.”
“설기야.”
“먀!”
[네!]
“전투태세야. 근처에 다가오는 언데드가 있으면 이유 불문하고 죽여버려.”
“먀아~.”
[나만 믿으라고요~.]
설기도 [비공정] 위로 올라가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제야 이쪽을 발견한 언데드가 있었지만, 그들은 이리로 달려올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후아!”
“하아!!”
벌서 거리를 좁힌 [그랜드 마스터 기사]가 내뿜는 살벌한 기운도 문제였지만,
우르르릉―!!!
점점 섬뜩한 소리를 내며 무너지고 있는 [어비스 존] 때문이다. 소멸의 벽 때문에 안에 영향을 줄 수 없음에도 그저 소멸의 벽 가까운 곳에 붙어서 무턱대고 마기를 피워내는 것에 열중한다.
엄밀히 따지면 저런 행동은 자의가 아니다. 지구에 구현된 [심연] 덕분에 아득히 멀리 떨어진 행성 누더기와 연결된 덕분에 언데드의 머릿속을 울리는 리치 군주의 비명 때문이다.
땡깡을 부리는 아이처럼 비명을 지르며 막으라고 외치는 소리 때문에.
그렇기에,
촤악―!
등 뒤에서 날아온 [그랜드 마스터 기사]의 강기에 너무나 쉽고 허무하게 리치의 머리가 잘려 나뒹굴었다.
제대로 싸웠다면 기사와 마법사라는 차이로 제법 애를 먹었을 리치 군단은 그렇게 허무하게 목이 잘려 나뒹굴었다.
물론 소멸의 벽 안쪽에도 리치가 절반 이상 남아 있지만,
“허어?!”
문제는 그런 게 아니다. 지금은 [심연]이 지구에 소환된 상태라서 카르마 포인트가 500배가 들어오는 상황이다.
생각해보라.
가장 최하급 언데드인 좀비 한 마리를 잡아도 기존의 10포인트가 아니라, 5천 포인트가 플러스마이너스 각각 들어오는 상황이다.
최상급에 해당하는 리치는?
평소라면 마리당 2천만에서 4천만 포인트 내외였을 거다.
그렇다면 지금은? 500배인 100억 포인트? 안타깝게도 아니다. 최하급부터 중급까지는 500배 뻥튀기인 반면, 그 위 단계의 언데드는 200배다. 유다연이 200배라고 호들갑을 떤 것도 그녀가 상급 언데드인 비홀더를 때려잡고 말한 걸 수도 있다.
아무튼, 200배면 얼마?
40억이다. 4,000,000,000.
0이 아홉 개!
그것도 플러스와 마이너스 각각 40억!
처음 멋도 모르고 소멸의 벽에 달려 든 수십 마리의 리치들을 먼저 죽이지 못한 것이 아까울 정도다.
“그래도 좋아! 천사백팔십 억이 어디야!”
소멸의 벽 바깥에 있는 리치가 모두 사망한 순간에 놀란 것은 소멸의 벽 바깥에 있던 언데드들만이 아니다. 벽 안쪽에서 고함을 지르며 어쩔 줄 몰라하던 언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쩌―어어억!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면서 비명을 내지르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어비스 존]을 이루던 법진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리고,
“설기야!”
“먀!!”
[가요!!]
[비공정] 위에서 기회를 보던 설기가 그 혼란한 상황에서 뛰어나갔다. 설기의 목표는 벽 바깥에 있는 두 마리의 최고위 언데드 아크 리치와 데스나이트 로드였다.
『지구 최초로 최고위 언데드를 사냥하셨습니다!』
『업적 보상으로 카르마 포인트를 추가로 획득합니다!』
『아크 리치 처치 보상으로 플러스 카르마 이백오십억(2,500,000,000) 포인트와 마이너스 카르마 이백오십억(2,500,000,000)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업적 보상으로 플러스 카르마 이백오십억(2,500,000,000) 포인트와 마이너스 카르마 이백오십억(2,500,000,000)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이 정도면……. 외려 우리가 쳐들어가도 되는 거 아니야?”
설기가 아크 리치를 가루로 내서 부숴버린 후, [그랜드 마스터 기사]의 합공을 받은 데스나이트 로드 역시 사지가 잘리고 갑옷 안에 감춰둔 핵이 부서지며 소멸했다.
『데스나이트 로드 처치 보상으로 플러스 카르마 이백억(2,000,000,000) 포인트와 마이너스 카르마 이백억(2,000,000,000)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그렇게 소멸의 벽 바깥에 있던 두 마리의 최고위 언데드가 소멸한 순간,
쩌저저적―!!!
기어이 [어비스 존]을 이루고 있던 법진이 일그러지고,
쩌어어엉―!!!!
소멸의 벽을 사정 없이 때리는 막대한 충격파를 생성하며 [어비스 존]이 사라지고,
━━━━━━━━!!!!!
지구에 소환되어 있던 [심연]이 알아들을 수 없으며 귀로 들을 수 없는 비명을 지르며 사라졌다.
그리고 그 혼란이 극에 이른 순간,
“응? 영주님 뭐 하세요?”
“이삭줍기?”
이요한이 들고 있던 활은 시위가 잔뜩 당겨진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