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모르면 맞아야지.>
소멸의 벽이 사라지기 직전에 공격을 해서 막타라도 칠까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어떤 근거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소멸의 벽을 건드리면 굉장히 불길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 대신이라고 할까? [어비스 존]이 어그러지고 [심연]이 폭발과 함께 사라지면서 [심연]을 감싸고 있던 소멸의 벽이 사라진 순간,
“응? 영주님 뭐 하세요?”
“이삭줍기?”
난 들고 있던 시위를 한계까지 당기고 마력을 불어넣었다. 고유능력 [의형강기]와 일반 능력 [성강]은 시위에 활을 걸지 않았음에도 강기(剛氣)로 구현한 수십 개의 화살을 생성했다.
강기의 화살 수십 개가 겹쳐 있었지만, 강기라는 것이 질량을 가진 것이 아니기에 마치 하나의 화살처럼 겹쳐 있는 상태에서 한껏 당겼던 시위를 놓는 순간,
콰르르르르―!!
섬뜩한 소리와 함께 공기를 찢어 버리면서 날아간 화살이 이전에 [어비스 존]이 있던 곳 부근에서 일제히 갈라지며 수십 개의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며 바닥에 나뒹구는 언데드들을 노렸다.
콰득―! 콰콰쾅! 콰득!
호기롭게 공격했지만, 절반도 죽이지 못했다. 하긴 [심연]이 피어난 곳 안에는 거의 2백에 가까운 언데드가 있었으니까.
“그래도 강기로 이뤄진 화살을 맞고 살아 남을 줄은 몰랐는데…….”
“영주님. 그게 아니죠.”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소피아가 어이없는 소릴 들었다는 얼굴로 다가왔다.
“저기 있는 언데드들은 조금 전까지 [심연]에 있던 놈들이에요.”
“그게 왜?”
“비유를 들어보면, 조금 전까지 목욕탕 냉탕에 몸을 푹 담그고 있던 놈들이고 아직 몸이 안 말랐는데, 영주님은 거기다가 불화살을 날린 그런 느낌?”
“음. 마력 저항력이 최고일 때다?”
“그렇죠!! 역시 내 남자! 총명총명!!”
“뒤에 나오는 그런 반응은 ‘내 남자’보다 ‘내 새끼’에 어울리는 반응 아니야? 총명총명이라니.”
“헤헤. 뭐 어때요. 한국에는 ‘오빠가 아빠 된다.’는 말이 있던데. 내 남자가 내 새끼도 되고 그러는 거죠.”
그러는 사이 방금 강기 공격을 받은 언데드와 그 주변에 있는 언데드는 모두 정신을 차렸다. 동시에 검은색 귀화(鬼火)를 일으켜 자신들이 분노했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이쪽을 노려봤다.
주변에 있는 [그랜드 마스터 기사]는 아무래도 좋은 것처럼.
“황천 기사다안!!! 기승!!”
저기 뒤에서 맹렬히 불길을 뿜어내는 언데드가 아마 황천 기사단장이겠지? 놈은 이쪽 특히나 나를 똑바로 노려보며 거대한 팬텀스티드에 올라 탔다.
“기사단!! 돌격!!!”
그리고 그 선택은 단순히 분노에 휩싸여 저지른 충동적인 선택이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맹목적으로 돌진하는 황천 기사단 전체에 불길한 검은 불길이 마치 보호막처럼 감싸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본래라면 팬텀스티드의 특성상 말을 타고 달려도 소리가 나지 않아야 하지만, 기사단 전체를 감싸는 검은 불꽃이 단순한 이펙트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소리와 진동이었다.
기백에 가까운 기사단이 유령마를 타고 검은 불꽃을 몸에 두르고 달려든다. 꿈에 나왔다면 악몽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섬뜩한 장면이다. 그런데 이 상황은 꿈이 아닌 현실.
“온다.”
“그러게 오네요. 참 열심히도 뛰어오네요.”
그 현실을 직접 경험할 나와 소피아의 감상은 ‘대수롭지 않음’이었다. 아니,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애쓴다.’ 정도랄까?
너무 느긋한 거 아니냐고?
“[망루] 요격 모드. [성문] 수성 모드. [성녀 수호대], [성벽] 위로.”
여기가 어딘가. [부속 영지]다. 그것도 쉘터 계열 각성자인 샐리의 고유능력과 결합된=한 독특한 [부속 영지].
[부속 영지]에서는 본 영지의 2랭크 낮은 건물까지 건설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그린 랭크까지 영지 건물을 올리고 영지 범위를 잔뜩 넓혀서 기어이 [심연]을 불러온 [어비스 존] 법진을 깨버린 거 아닌가.
즉, [부속 영지]의 [성벽] 너머의 일정 영역, 이벤트 보상으로 안전 구역으로 설정된 구역을 저들이 들어올 수 없다. 원칙적으로.
그러나 [어비스 존]에서 피어난 [심연]이 그러했듯 검은 연기에 휩싸인 황천 기사단은 안전 구역으로 설정된 구역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고생하네.”
문제는 진입하는데 성공하기만 했다는 거다. 영지와 가까워질수록 기사단의 속도는 점점 느려진다. 강풍기를 마주하고 걸어가는 예능 프로에 나오는 게임의 한 장면처럼.
그리고 성벽 근처까지 도착했을 때,
투쾅―! 투투투쾅! 투쾅!
[망루]에서 쏘아지는 탄환에 기세는 더 줄어들었다.
“…저 정도면 그냥 걸어오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영주님도~. 쟤들이 탄 말이 지쳐서 느려진 게 아니잖아요. 말에서 내리나 타고 있으나 안전 구역에 있는 한 속도는 변하지 않는다구요~.”
소피아는 약 올리는 기색이 역력한 말을 태연하게 했다. 신성력을 진하게 담아서.
“응?”
“네?”
그래. 들으라고 신성력을 담은 거다. 저기 성벽 아래서 처음 기세와 다르게 볼품 없이 천천히 ‘다그닥다그닥’ 하는 속도로 걸어오는 황천 기사단을 향해서.
또한,
“그래도 쟤들은 용기가 가상하잖아요~. 저기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아무 것도 못 하는 겁쟁이에 비하면요~. 헤헤~.”
“너어는 지인짜아…….”
가만히 보면 소피아가 항상 헤실거리는 얼굴인데 은근히 성격이 나쁘다. 맺고 끊는 것도 엄청 단칼이고. 성녀라는 클래스와 다르게 냉소적인 모습도 은근히 많고.
“네? 왜요? 네?”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를 그린 것 같은 얼굴로 눈을 열심히 깜빡이는 소피아에 헛웃음만 나온다.
나와 소피아 이토록 여유로운 게 단순히 [성벽]을 믿어서 그런 거냐고? 그린 랭크 성벽으로 블루, 네이비 랭크에 해당하는 황천 기사단을 막을 수 있냐고?
그딴 거 알게 뭐냐. [성벽]으로 돌진하는 기사단 놈들이 멍청한지 아닌지는 관심도 없다.
영국의 SF 소설가이자 미래학자 아서 찰스 클라크가 남긴 과학 3법칙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Any sufficiently advanced technology is indistinguishable from magic.
충분히 발달한 과학 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
그렇다면 충분히 발달한 과학 기술과 불가해에 가까운 야장 기술이 더해지고, 극도로 진보한 마법과 연금술이 첨가된다면?
“[비공정]. 고도 조종.”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말을 타고 무지성 돌진을 하냐? 기사 시대를 몰락으로 이끈 게 무엇인지 모르는 건가? 몰라? 모르면 맞아야지.
조용히 우리의 머리 한참 위로 떠오른 거대한 비행물체인 [비공정]을 힐끗 확인하고,
“전포 포문 개방. 마력 충전.”
위이이잉―. 위잉―.
마력포의 포문이 열리고,
“타깃 락온.”
쿠우우우우우웅―!
마도 공학과 최첨단 공학 그리고 마법과 연금술의 총아인 [비공정] 시스템이 느린 속도로 꾸준히 달려오는 황천 기사단을 순식간에 조준한다.
“포격. 목표는 적의 말살.”
우웅―.
마치 알아들었다는 대답을 하듯이 마력이 짧게 진동한 이후,
콰앙! 쾅쾅―!! 콰아아앙! 콰콰쾅―!! 콰아아아앙!!
이제는 걷는 속도보다 느리게 [부속 영지]의 [성문]을 근처까지 다가온 황천 기사단의 머리 위에 짙은 푸른색 마력 덩어리 수백 개와 연한 남색 마력 덩어리 다섯 개가 떨어진다.
“끄아아아악!!”
“꺼억?!”
“캬아아악!!”
…
[그랜드 마스터 기사]의 강기에 죽은 아크 리치는 나았을 거다. 단번에 라이프베슬 역할을 하는 심장이 갈려 죽었을 테니까. 하지만 [비공정]에서 발포하는 마력포는 마력을 압축해 발사하는 거다. 강기와 다르다.
저 언데드가 상급 언데드 정도, 그러니까 이전에 북한에서 돼지 놈이 변신했던 레이스(Wraith) 정도면 압축된 마력의 힘에 단숨에 뒈졌을 거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었을 거다.
그러나 황천 기사단은 최상급 언데드이기에 압축된 마력에 저항할 수 있다. 그리고 기사단 전체가 마기를 공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더 저항할 수 있다.
그러니 저런 상황이 발생하는 거다.
“저항이지. 면역이 아니라.”
“그렇죠. 저항이라는 단어는 견딘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렇다는 건 고통을 느낀다는 전제조건이 따르는 거죠. 언데드의 비명이라니. 듣기 참 좋네요.”
“역시 너는…….”
“네?”
성격이 나쁘다.
“영주님도 저 소리를 듣고 싶으셔서 [그랜드 마스터 기사]들이 죽일 수 있는데도 두고 보신 거잖아요?”
“흠흠.”
인정. 나도 성격이 썩 좋은 편이 아니라는 거, 인정이다.
“좋은 편이 아니긴요. 영주님도 한 성격하시는 거 우리 영지 사람이라면 다 알 걸요? 심지어 이건 엘라 ‘언니’도 분명히 제 말이 맞는다고 고개를 끄덕이시면서 무릎을 탁 치실 거라고요.”
“…엘라가 없다고 막무가내로 우기지 마.”
“엘라 ‘언니’ 부분은 사실이 아니지만, 한 성격 하신다는 건 인정하시는 거죠?”
“…….”
논리적으로 소피아에게 진 게 아니다. 신성력을 쓰는 후천성 도른자들에게 질 정도로 내가 논리가 없지 않다. 진짜다.
언데드의 고통과 원한 섞인 비명과 [비공정]의 마력 포대에서 쏟아내는 막대한 광량과 폭음 속에서 한가하게 소피아와 농담을 나눌 수 있는 건 이번 일을 준비하기 위해 지구의 쉘터 중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쉘터를 지나면서 내가, 우리가 지닌 힘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했기 때문이다.
최고위 언데드? 네이비 랭크에 버금가는?
지금 당장 눈앞에 리치 군주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언데드로는 나를 그리고 소피아를 긴장시킬 수 있는 존재들이 없다는 걸 확신했다.
“너무 과거에 매몰되어 있었어. 내가.”
과거, 그러니까 회귀 전, 그것도 식물인간으로 누워 화면으로만 마주한 괴물을 기준으로 하면서 우리가 지닌 힘이 과할 정도라는 걸 이번 원정으로 실감했다.
하늘을 날며 마력 포대에서 수백 발의 압축된 마력을 쏟아내는 [비공정].
네이비(Navy) 랭크의 [그랜드 마스터 기사] 수십과 블루(Blue) 랭크의 [마스터 기사] 백여 명.
바이올렛(Violet) 랭크의 소피아와 그녀를 지키는 [성녀 수호대]까지.
“인가아아아안!!”
마력의 포화에 갇혀 고통스러워 하는 와중에도 나를 향해 맹목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짙은 원망을 터트린다.
누가 보면 이 상황에서 내가 가해자고 저 빌어먹을 놈들이 피해자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포격 중지.”
위이이이이―.
“인……가아아안. 죽인다.”
너덜너덜해진 갑옷 사이로 비치는 섬뜩한 안광. 그리고 언뜻 보이는 원한이 뚝뚝 묻어나는 감정까지.
“왜 네가 지랄이야.”
“인간.”
“내가 칼 들고 너한테 여기 쳐들어오라고 시켰냐? 응?”
“…뭐?”
“가만히 잘 사는 남의 차원으로 쳐들어왔다가 네 부하 다 뒈지고, 멍청한 너도 뒈질 상황이라고 해도. 선후를 잊으면 안 되지. 여기서 원망을 할 사람은 우리고 원망을 받아야 하는 건 너희.”
“…….”
놈은 차마 아니라고 우기진 못하겠는지 아니면 그럴 생각조차 없는지 더는 입을 털지 않고 검은 귀화가 넘실대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기만 했다.
“너희가 침공한 후 죽은 인간의 숫자가 억이 넘지. 그린스킨 때부터 하면 십억이 넘고. 그러니까 억울한 얼굴은 우리 몫의 감정이라고. 너흰 그냥 멍청하게 당하는 병신 역할이면 충분해.”
“이, 이이익! 죽인다!!”
“내가 왜 [그랜드 마스터 기사]로 네 목을 치지 않는 것 같니?”
“……!!”
전장의 여우라던가?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언데드라서 그런지 바로 알아들은 얼굴이다.
“그래. 너희가 최대한 고통 속에서 울부짖다가 뒈지길 바라서 그러는 거야.”
거기까지 말하고 뭐라고 말하려는 놈의 머리 위로 ‘푸른색’ 마력 포탄이 비처럼 쏟아졌다.
“오래 살아라. 오래. 최대한.”
푸른색 마력 덩어리가 언데드에 부딪쳐 비산하고 산란하는 광경을 지켜보며 최고위 언데드라는 이름에 걸맞게 오래도록 살아남길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