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17화
낭독
잊고 있었지만, 초등학교 저학년에는 낭독 수업이 있다. 한자나 은는이가의 사용법 같은 것은 묵독해도 잘 배웠는지 판단할 수가 없다. 교사가 알기 위해서는 말로 표현할 필요가 있다. 국어의 교과서를 소리 내서 읽어 부모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매일 잊지 않고 하고 있음을 표시하는 시트도 있다. 확실히, 이런 것을 했었던 것도 같다. 그야말로 먼 옛날이니 잊어버렸지만.
나와 둘만으로 지내온 탓도 있겠지만 그녀는 말이 적다. 낭독도 서툴렀다. 틀리는 부분은 적었지만 들려주기 위해서 읽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다. 문장의 뜻이 이어지는 부분에서 뜸을 들이거나, 감정을 담아 읽는 것을 잘 하지 못했다.
잘난 듯이 말하고는 있지만 나도 잘 하는 편은 아니었다. 감정이 희박하다고 할까, 겉으로 표현하는 것이 서투르다. 단조롭게, 기계처럼 읽고 만다. 그래도 별로 곤란하지 않게 살아왔으니 그녀가 닮는다고 해서 곤란하지는 않다.
하지만 교정할 수 있다면 하는 편이 좋다. 매일 조금씩 훈련을 하기로 했다. <다이조 할아버지와 간>이나 <여우의 창문> 같은 익숙한 문장이 이어졌다. 국어의 수업을 얕잡아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세대를 넘어서 같은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다면 교과서도 의의가 있는 것이겠지.
몇 번이고 같은 문장을 반복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질리게 된다. 그래서 집에있는 책을 사용해서 연습을 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좋아하는 그림책을 사용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책은, 바꿔 말하자면 우리 집안이 좋아하는 책이기도 하다. 나와 누나가 사랑했던 그림책밖에 남아 있지 않으니까.
<세 마리 염소의 다툼>이나 <멧키라 못키라 동동> 같은 조금 공포스러운 부분이 있는 그림책이 많다. 그녀를 위해 잔뜩 감정을 담아 읽어보자 생각보다 멋쩍었다. 흉내를 내며 읽어도 그녀가 하면 별로 무섭지도 않았다. 기량보다는 목소리의 문제다.
그녀가 친구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정말 매일 낭독을 하는 가정은 많지 않다고 한다. 아이가 성실한 한편 부모 또한 성실한 가정뿐이다. 대체로 이틀에 한 번, 사흘에 한 번 등 편하게 하는 모양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나와 그녀는 그만해야겠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독서가 취미이기도 하고, 새롭게 책을 즐기는 방식을 느꼈기 때문이다.
만화나 라이트노벨도 대량으로 있었다. 특히 만화 같은 것은 낭독하기 좋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녀가 한 번 도전해보았지만 재미있지는 않았다. 농담으로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 일을 통해 이해했는데, 낭독의 요점은 대사가 아니라 심정이나 풍경의 묘사인 것 같다. 캐릭터의 대사는 우리가 하는 말과 별반 차이가 없다. 단지 대사가 아니라, 평소에는 표현하지 않는 마음이나 감상을 말로 표현하기 때문에 낭독이 재미있어지는 것이다.
내 일기나 그녀가 적고 있는 일기도 언젠가 낭독해보면 재미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아직 그녀가 있다면, 그녀의 입으로 내 마음과 그녀의 마음을 읽어달라고 하자. 한심한 부분을 읽히고 싶지는 않지만, 입이나 손으로 해주었던 부분을 그녀가 읽는다고 생각하면 흥분이 되었다.
확인을 위해 그녀에게 일기를 잘 적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경계하면서도 적고 있다고 대답해주었다. 읽을 생각은 없다. 적어도 당분간은 읽을 일이 없다. 그녀가 내게 읽게 해주는 날이 온다면 고맙게 읽을 것이다. 그때까지의 즐거움이다.
생각해보면 나와 그녀의 일기, 점수표, 이 세 가지만이 이 생활의 물적 증거이다. 이것들이 없다면 선의로 아이를 기르고 있는 이상한 가족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만약의 일이 생긴다면 파기해야만 하는 세 가지이다. 점수표 따위는 아깝지도 않지만 일기는 둘도 없는 것이다. 미래를 남길지, 과거의 기록을 선택할지. 그런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녀에게 딱히 은어 같은 외설적인 말을 가르치지는 않았다. 헤매기는 했지만 새삼 리근이나 귀두 같은 말을 알려주는 것도 멋쩍다. 왠지 모르게, 그런 말을 사용하지 않도록 순진무구한 정신을 갖게 하자는 취지도 있었다. 여자아이를 노예처럼 사들이고 펠라티오까지 가르쳤으면서 정조교육만 힘을 쓰는 것도 바보 같기는 하다. 성벽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