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12화
필산
어느 날, 목욕을 마치고 거실에 가자 그녀가 노트를 펼치고 있었다. 기특하게도 공부를 하는 모양이다. 가끔 보는 일이기는 하지만, 볼 때마다 놀라고 만다. 난 집에서 공부 같은 걸 한 적이 없다. 집에서 참고서를 펼친 것도 고등학교와 대학의 수험 시즌 같은, 한정된 몇 개월 정도였다. 하물며 초등학생이었을 때는 놀기만 하면서 지내고는 했다.
콩깍지가 끼었다고 해야겠지만, 무척 성실하고 좋은 아이라고 생각한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목을 축인다. 땀으로 잃어버린 수분이 채워지는 감각이 상쾌하다. 그녀와 마주 앉아서 노트를 들여다보니, 곱셈을 연습하고 있는 모양이다.
덧셈이나 뺄셈, 혹은 구구단에서 막히는 사람은 드물다고 한다. 산수가 싫어지는 계기는 대부분 필산과 나눗셈이라고. 생각해보면 누나도 산수를 잘 하지 못했다. 시계를 보는 법을 잘 익히지 못했고, 지금도 암산을 주저한다. 옆에서 듣고 있었던 내가 먼저 이해해서 싫어하고는 했던 기억이 난다.
그녀는 항상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시계 보는 법을 먼저 가르쳤다. 긴 바늘이 한 바퀴를 돌면 한 시간이고, 짧은 바늘이 9의 자리에 멈출 때쯤 귀가한다. 고독한 시간이 많은 아이일수록 배움이 빠르다. 그런데 사실, 그녀는 원래 곱셈을 마스터 했을 터였다.
그녀는 작년에 구구단을 암기했다. 매일 세 번씩 부모 앞에서 암송하고 도장을 받는 숙제가 있다고 한다. 칠 일은 칠, 하고. 왠지 모르지만 팔단이 서투른 모양이라, 팔오 사십구, 라고 하고는 했다.
대강 기억했을 즈음, 필산도 가르쳐두었다. 내 편견일지도 모르겠으나, 구구단을 암기하기보다는 필산으로 수식을 이해하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한다. 문제집 같은 호들갑스러운 것을 사기도 뭐해서, 이면지를 사용해서 적당한 문제를 만들어주고는 했다.
그때 했던 공부를 학교가 따라잡은 것이겠지. 잊어버리지는 않았겠지만, 다시 생각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노트에 내가 만든 문제가 여러 장 붙어있다. 이면지보다 백지 노트가 더 비싼데, 아까운 짓을 한다.
문제를 몇 가지 만들어주냐고 물어보자, 수긍한다. 오늘은 적당한 이면지가 없어서 복사 용지를 가지러 방으로 갔다. 겸사겸사 검정과 빨강 볼펜을 가지고 거실로 돌아오자, 그녀가 망설이며 맥주캔을 집고 있었다.
마셔보고 싶은지 물어보자,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처음 보는 것이라 흥미가 생겼다고. 그러고 보니, 집에 있을 때 그녀 앞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처음일지도 모르겠다. 대부분 그녀가 방으로 돌아간 이후였다. 아이 앞에서 술을 마시는 것을 꼴사납다고 생각한 것이다.
드라마처럼 극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언제부터인가 허세를 부리지 않을 만큼은 친해졌다고 생각했던 것이겠지. 한 모금만이라면 마셔도 된다고 말하고는 문제를 만들기 시작하자, 시야의 구석에서 캔을 기울이는 모습이 보인다.
이내 동물이 위협하는 듯한 흐린 목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향하자,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다. 나도 비슷한 기억이 있다. 어렸을 때 역시 부모에게 맥주 한 모금을 받아 마셨다. 독특한 쓴맛과 술 냄새가 코를 찔러서, 어른은 왜 도대체 이런 것을 마시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캔을 돌려받고, 단숨에 목으로 흘려 넣는다. 지금은 맥주가 이렇게도 맛있게 느껴진다. 미각이 변하기도 했겠지만, 허세의 상징이나 마찬가지다. 대학을 나온 이후에도 맥주는 잘 마시지 못했지만, 발돋움해서 마셨다. 어른은 다들 좋아하니까, 그걸 아무렇지 않게 마시는 것으로 어른이 되려고 했었다.
달콤한 것을 좋아하는 그녀에게는 아직 이른 일이다. 맥주 대신에 다 만든 문제지를 건네자, 그녀는 쓱 훑어보고 연필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 안에 종이와 연필심이 스치는 소리가 퍼진다. 손에 든 맥주가 없어지기 전에 문제를 다 풀 수 있을까. 그녀의 머리를 바라보기만 해도 심심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