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1화
점수표
처음 중학교에 얼굴을 내밀고 집에 돌아와서 그녀가 처음으로 한 일은 B4용지 한 장을 책상 위에 내리치는 것이었다. 본인에게 내리칠 생각은 없었겠지. 콧김이 거세고, 흥분하고 있는 것 같으니 아마도 조절할 수 없었으리라.
처음은 화를 내는 줄 알았으나, 그런 것 치고는 눈이 반짝이고 있다. 고양이가 아니니까 정말 빛을 내지는 않지만, 활기가 돈다는 뜻이다. 눈에 띄는 곳에 두었으니 봐주기를 원하는 거겠지. 러브레터를 자랑하는 것 치고는 접은 자국도 없는 깔끔한 종이였다.
손에 들어보자, 거기엔 익숙한 글자가 적혀있었다. 점수표다. 익숙하다고는 했으나, 극히 한정된 짧은 시간만 보았던, 실은 내게는 친근감이 옅은 물건이다. 그걸 보며 지낸 것은 주로 그녀 쪽이다.
포맷이 올바르다면 뒷면에도 기술이 있을 터였다. 뒤집어보니 기억 그대로의 기재가 있었다. 내가 만들었을 때는 엑셀을 사용하여 컴퓨터로 인쇄했었는데, 이건 그녀가 손으로 만든 모양이다. 각진 글자는 그녀의 버릇이다.
이전에 내가 넘긴 것과는 내용이 다르다. 그야 그렇겠지. 같은 것을 굳이 손수 만들 필요도 없고, 있다고 해도 그걸 내게 건네서 보여줄 의미도 없다. 만들고 싶었으니 만들었을 것이고, 보여줄 필요가 있으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내용 그 자체는 같다. 취지가 같다는 뜻이지만. 단, 주객이 전도되어있다. 앞면에 적힌 것은 그녀가 해주기를 원하는 것이고, 한 켠에 있는 건 그녀가 지불할 보수겠지. 많이 달라 보이기는 하지만, 주고받는다는 원리는 같으니 내실은 변함이 없다고도 할 수 있다.
문서를 읽는 내 모습을, 그녀가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바라봐도 구멍이 나지야 않겠지만. 시선을 떼자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설명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내 추측에 자신이 없었던 건 아니나, 조금 낯간지럽기도 했다.
보수로 적혀있는 것은 내 상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입으로 하거나, 끌어안거나 하는 일이다. 혹시나 해서 적어두지만, 이건 그녀의 표현이다. 펠라티오나 섹스 같은 단어를 모르는 건 아니겠지만, 그녀는 직접적인 단어를 선호하지 않는다. 내 영향이겠지.
예상 밖이었던 건 내가 지불하는 쪽이다. 키스나 애무는 이쪽에 나열되어있다. 그녀에게는 해주면 기쁜 일이라는 모양이다. 헷갈리니 직접적으로 적어놨는데, 이쪽도 그녀가 적기를, 쪽이나 배를 쓰다듬는다는 말투였다.
나에게 그 네 가지는 모두 같은 선상에 있다. 여기까지는 그녀를 위해서고, 거기서부터는 나를 위해서라는 인식은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모두 나를 위한 일이겠지. 이걸 직접 만들 때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이건 취향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마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그러나, 어색한 기분을 느끼는 건 나밖에 없는 모양이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럼 오늘부터 잘 부탁해, 하고 말하고는 방을 나가버렸다. 처음 소매를 통한 교복인 그대로였으니, 사복이라도 갈아입으러 간 거겠지.
일단, 손에 들어온 자료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막상 구체적으로 검토해보니 점수표②라고 적힌 이 종이는 내가 만든 구판 점수표와는 크게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주종이 역전했다는 것은 방향성도 반대라는 의미기도 하다.
지금까지는 그녀가 지불할 대가를 정하고, 실행하여, 보수를 받았다. 나는 수긍할 뿐 결정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 점수표를 따른다면 내가 정하고, 실행하여, 보수를 받을 수가 있다. 주도권이 내 쪽으로 옮겨온다는 뜻이다.
그녀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것을 만들었을까. 중학교에 올라가니 입장을 좋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라도 한 걸까. 잘 모르겠지만, 이건 내게도 좋은 일이었다. 상대가 요구하기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고, 더 자유롭게 제안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걸 활용한다고 해도 아직 검토할만한 사항은 남아있다. 내가 지불하는 데에 적혀있지 않은 항목이 다수 있다는 점이다. 그녀가 하는 가사는 장보기와 취사뿐이고, 나머지는 해봐야 자기 속옷을 씻는 정도다. 나머지 청소도 세탁도 욕실 청소도 내가 분담하고 있다.
내 즐거움을 그녀가 주는 보수로 삼고 싶다면, 나로서도 포함해주기를 바라는 일이 잔뜩 있다. 어디까지나 보수라고 한다면 상관없지만, 그럼 이제 중학생도 되니 쉬는 날에 청소기라도 한 번 돌려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