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은 어제, 내일은 오늘-222화 (222/450)

8년 12화

흰 눈

여기까지 들어간 것은 처음이다. 일어선 채로 하는 것도 처음이기 때문이겠지. 아픈지 물어보니 배가 꽉 찼다며 고개를 가로로 털었다. 밥이라도 먹은 듯한 말투가 재미있다. 이 부분까지, 하고 손으로 알려 준다. 아쉽게도 내 손으로 실감할 수는 없었다. 양손을 떼면 체중이 걸리니 꽉 차는 정도로 끝나지 않으니까.

발이 땅에 닿지 않기 때문이겠지. 그녀가 안절부절못한 느낌으로 다리를 흔든다. 꼭 붙잡고 자세를 바꾸며 엉덩이에 힘을 넣을 때마다 조임이 강해진다. 특히 입구 쪽이 심해서, 마침 장대에서 주머니로 바뀌는 주변에 고무줄이라도 감아놓은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안에 넣어서 기분 좋은 건 나뿐이다. 온탕에 잠긴 듯한 기분 좋은 탈력감이 하반신을 뒤덮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그녀는 히죽거리며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콧구멍을 부풀린 얼굴이 싫지는 않지만, 별로 남에게 보이지 않는 편이 좋을 듯한 나쁜 심보가 느껴진다.

몇 번인가 키스를 나누고, 몇 번인가 허리를 흔들자 눈 깜빡할 사이에 끝나있었다. 나이 탓이라고 생각하기는 싫다. 어디서 누가 볼지도 모를 야외라 초조하기도 하고 흥분도 된다. 그녀도 시원한 표정을 짓고는 있어도 심장은 쿵쿵대며 울고 있었다.

그녀의 안에서 물건을 뽑아내자 하얀 액체가 뚝뚝 흘러내렸다. 위화감이 느껴졌다. 몇 초가 지나서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다. 콘돔을 끼지 않았다. 온몸의 핏기가 가시는 게 느껴진다.

그녀는 내게 엉덩이를 향한 채로 속옷에 다리를 통하고 있다. 티슈로 쓱 닦기는 했어도 여기서는 씻을 수도 없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니 식었던 물건이 경도를 되찾아간다. 마음은 실수로 침울해졌는데 몸은 아무래도 좋단다.

말이 없어진 탓인가, 그녀가 이제 알았느냐며 돌아본다. 콘돔 같은 건 가져오지도 않았고, 오늘은 괜찮은 날이라고 웃고 있다. 그리고 딱히 생겨도 상관없잖아, 하고 맘 편한 소리를 한다. 그렇다. 이 얘기에 관해서는 그녀를 믿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날도 저물고 있었다. 곧장 집에 돌아가면 늦은 저녁이 될 시간이다. 도중에 먹고 돌아가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하며 아침에 걸었던 길을 돌아간다. 상점가에는 매력적인 음식이 얼마든지 있었고, 짐이 늘어난다고 곤란하지도 않다.

코로케에 교자, 샐러드나 조림 같은 것까지 갖추고 있다. 드물게도 그녀가 적극적이라서 저녁으로 먹기로 정해졌다. 평소엔 *총채를 싫어하면서 이상한 일이다. 물어봐도 오늘은 둘이서 사니까 괜찮다는 알 수 없는 말을 할 뿐이다. 괜찮다면 됐다만.

양손에 비닐봉지를 한 아름 들고 전철을 타자, 운이 좋게도 좌석이 비어있었다. 휴일의 귀가 러쉬보다 조금 이른 덕분인가. 자리에 앉는데 그녀가 움찔거린다. 안색을 살펴보니 새빨갛게 물들었다. 무슨 일 있나. 물어보니 내 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흘러나와, 하고.

말의 의미보다도 그녀의 몸짓으로 금방 알아챘다. 안에 내버렸으니까. 지금 시작된 게 아니라 계속 흘러나오기는 했다. 앉은 탓에 옷이 엉덩이에 닿았고, 그 차가움으로 상황을 깨달은 모양이다. 빠른 어조로 변명했지만 그걸 듣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우리 역까지 한 시간은 남았으니 침착하게 앉아있는 수밖에 없다. 태연하게 기다리자, 하고 말한들 남 일이긴 하다. 당사자는 수업 중에 배가 고픈 학생처럼 등을 구부리며 배를 붙잡고 있는데, 어쩌면 부끄러워서 얼굴을 숨기고 싶을 뿐일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수치심에 휩싸여있지만 나는 임신의 공포에 떨고 있다. 이제 와서 생각한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무서운 건 무섭다. 아무렇지 않게 앉아있기조차 어렵다. 얘기라도 하며 마음을 달래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그녀도 바빠 보인다. 조용히 책이라도 읽는 수밖에.

그런데, 페이지를 열 장 정도 넘긴 시점에서 그녀가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자신만의 세상에 빠진 건 그녀가 먼저인데, 신경 써주지 않으면 외로운 모양이다. 책의 세상에 몰입하려는 순간에 방해받는 건 달갑지 않다.

어쩔 수 없지, 하고 책을 닫았더니 그녀는 원래 자세로 돌아가버렸다. 다시 책을 펼치자 슬쩍슬쩍 손등이나 무릎을 긁어댄다. 어린애냐, 하고 말하고 싶지만 아직은 어린애다. 아이 취급하지 말라고 화내는 주제에 역시 어린애인 거다.

복수라는 양 빈틈을 봐서 그녀의 목덜미를 간지럽히자 유난히 과장스러운 리액션으로 몸부림쳤다. 멈췄더니 또다시 장난을 시작한다. 더 해달라는 신호인가. 내가 놀아주고 있는 건지, 아니면 같이 놀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몇 번인가 계속하던 중에 무척 요염한 소리가 울렸다. 그렇게 혼잡하지도 않은 차량이지만 잡다한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 한순간만은 무척이나 조용해서, 오직 기성만이 귀를 울렸다. 기분 탓인지 주변의 시선이 아플 정도로 느껴졌다. 오늘은 액일이다.

*반찬이나 간편 식품 등 주식과 함께 먹는 음식들. 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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