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4화
산발
문을 열자 낯선 소년이 서 있었다. 그녀다. 베리 숏은커녕 베리베리 숏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짧아졌다. 길었을 때는 몰랐는데 곱슬머리였는지도 모르겠다. 머리끝이 둥글게 말려있다. 병아리 같은 머리다.
이렇게 보니 긴 검은 머리가 얼마나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어른스럽고 차분하지만 어딘가 어두운 곳이 있는 느낌. 그게 머리를 짧게 했을 뿐인데 상당히 밝아졌다. 타고난 침착함은 사라지지 않아도 나이에 걸맞은 홀가분함이 느껴지게 되었다.
이건 이거대로 무척 사랑스럽다. 아아, 난 이제 정말 뭐든 좋구나, 하고 깨달았다. 스님처럼 변해도 그건 그거대로 괜찮다고 생각할 것 같다. 한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것은 그녀 나름대로 불안해서였을까.
가방을 두고 그녀를 안아 올린다. 부끄러운지 아등바등 날뛴다. 그만두게 돼서 삐졌던 건 그녀인데 지금은 부끄러운 걸까. 말보다 행동으로 나타내라던가. 분홍빛 입술에 혀를 집어넣는다. 그녀의 손이 내 머리를 엉망으로 헝클어트린다.
일 분인가 이 분인가. 한숨 돌리고 그녀를 내리자 복도 구석에 머리가 엿보인다. 누나, 치고는 머리 위치가 높다. 무엇보다 누나였다면 곧바로 사이에 들어와 우리를 멈추겠지. 여전히 그 사람은 우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적어도 모르는 척을 하고 싶은 모양이다.
누구, 하고 그녀에게 시선으로 묻는다. 그녀는 겸연쩍은 느낌으로 동급생이라고 알려주었다. 같이 미용실에 다녀와서 저녁도 같이 먹기로 했다고 한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친구를 초대하는 건 어떤가 싶었지만, 지금은 무언가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누나에게 들켰을 때도 이런 패턴이었다. 여하튼 이 집에 우리 이외의 사람이 있는 일이 없으니까. 평범하게 지내는 어느 장면을 떼어내도 이렇게 된다. 일찍 말하지 않는 그녀가 나쁘다고 하지 못할 건 없지만, 책임이 어떻다고 해도 지금은 소용이 없다.
인사하며 말을 건다. 저녁 이야기는 들었지만, 너무 늦게까지 돌아가지 않는 건 좋지 않다. 밖에서 식사한다고 부모님에게 연락은 했는가, 하고. 형식적인 일이지만 일단은 들어 둘 필요가 있다.
아무래도 부모님은 맞벌이라 아홉 시나 열 시까지는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모양이다.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거나 패밀리 레스토랑이라도 가는 수밖에 없다고 들어서 그녀가 집으로 데려왔다고. 버려진 고양이를 줍는 어린애 같은 행동이다. 동정하고 싶기야 하겠지만.
서둘러 저녁을 차려서 밤이 늦기 전에 돌려보내야 한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에 들어가자, 벽 너머로 그녀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녀라면 알아서 잘할 거라고 설명을 포기했으니 그렇게도 되겠지. 당사자의 눈앞에서 하지 않는 정도의 분별력은 있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집안에 소리가 다 들린다는 건 알 수 있는 것을.
저 사람은 누구인가, 저런 아저씨라도 괜찮은가, 하고 좋을 대로 말하고 있다. 교복은 풀어헤치고 갈색 머리는 복잡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TV에 나오는 요즘 젊은이를 미니어처한 듯한 여자아이였다. 무서운 얼굴의 중년 남자가 사라졌으니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처럼 나오겠지.
그녀는 그녀대로 보호자 같은 사람이고 남친 같은 사람이다, 하고 대답하고 있다. 같은, 이라고 붙이면 뭐든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저씨지만 상냥하니까 괜찮으려나, 라는 말도 석연치 않다. 아니, 그렇게 말해준다면 고맙다고 이성으로는 생각하지만.
그런데, 큰소리로 촌평하고 있으니 나가기가 불편하다. 자기 집인데도 있을 자리가 없다. 중학교의 교실에 혼자 남겨진 듯한 착각마저 든다. 주저하고 있으니 그녀가 커다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녀는 벽이 얇은 걸 알고 있으니 신경 써주었을지도 모른다.
식탁에 앉아도 친구분이 슬쩍슬쩍 쳐다보는 바람에 편안하지 않다. 요리는 어떤가, 하고 물어봐도 당황하는 수준이다. 요즘 중학생이라면 남녀 관계도 흔한 일 아닌가. 새삼 이 정도로 놀랄만한 일이었나. 이건 확실하게 입을 막아두지 않으면 위험하지 않을까.
조금 전 일은 그냥 스킨십이고, 조금 사이좋은 부녀 사이라고 할 수는 없을까. 농담 삼아 키스해봤을 뿐이지 평소에는 저런 짓을 하지 않는다거나. 하지만 그녀는 조금도 도와줄 생각 없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저녁을 먹어치우고 있다. 평소와 다름없이 냠냠하고 잘도 먹는다.
그렇게 어색한 채로 식사를 마치고 분위기도 어느 정도 부드러워졌다. 그녀가 화장실로 자리를 떴을 때 말을 걸어보았다. 좋은 기회라고도 생각했고, 침묵인 채로 앉아있기도 괴롭다. 무엇부터 물어보면 좋을까. 그래서, 조금 전의 떠오른 의문 남자친구는 없는가, 하고 물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