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은 어제, 내일은 오늘-254화 (254/450)

9년 14화

피처

외로우니까, 하고 귀여운 소릴 한다. 술자리 이야기다. 몇 년 만인지 친구에게서 권유가 있었다. 이전에 참여했을 때는 결국 귀찮은 일이 됐다. 그녀도 있으니 당분간은 가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고. 아니, 그때는 두 번 다시 갈까 보냐 하는 생각까지 했을지도 모른다.

경박하다고 해야 할까. 몇 년 정도 지나면 감정이 마모된다. 시간은 만인에게 평등하다고 하는데, 다듬으면 평평해진다는 것과 비슷한 논리다. 척 보기엔 깔끔해도 그만큼 확실하게 얄팍해져 간다. 굳이 그런 밉살스러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이 나이가 되면 몇 년 만에 만난다 해도 별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이십사절기 말고는 기회를 만들 수 없으니 자연스럽게 간격이 생긴다. 두세 번 기회를 놓치면 금방 일 년이 지나버리고, 한편으로는 학생 시절처럼 눈 바쁘게 변하지 않으니 몇 년 만에 만나더라도 크게 바뀌지 않는다.

처음엔 그녀를 집에 남겨두고 혼자 갈 생각이었다. 그 시절엔 초등학생이었다. 어린아이를 홀로 남겨둘 수 있을 리가 없다. 중학생이라면 괜찮은가 하는 이야기기는 하지만. 그래도 저녁을 만드는 건 그녀니까 하루 정도는 참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러이러한 사정으로 집을 비우려고 한다고 이야기했다. 도저히 거절하기 어려운 회식 자리나 송년회, 환송영회 같은 건 참여한다. 그럴 때는 솔직하게 수긍하는데 이번에 한해서는 자신도 가고 싶다는 것이다. 사적인 일이니 조금 억지가 통할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통하는지 아닌지로 말하자면 통하겠지. 하지만 이쪽도 나이가 나이다. 초등학생은 불안하다고 데려와도 반대하지 않겠지만 중학생은 미묘하다. 숨어서 담배나 술을 마시는 나이대니까.

가족끼리 저녁 식사를 하는데 선술집을 골랐다면 이해할 수 없지는 않다. 하지만 어른들끼리 모여서 술을 주고받는 자리에 중학생은 어떨는지. 내가 간사였다면 난색을 표하리라.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책임을 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담 삼아 외로워서 그러느냐고 물어봤다. 그녀의 성격상 이렇게 놀리면 열을 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소리칠지도 모른다. 내심 준비하고 있었지만 의외로 그녀는 쉽게 수긍했다. 외로우니까 같이 가고 싶다면서.

그런 말을 들으면 나로서도 거절하기 힘들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무척 기쁘다. 쉽게 다뤄지는 느낌도 들기는 하다만. 연인 혹은 딸, 내지는 아내임을 자부하는 그녀가 기대오면 나도 모르게 뺨도 느슨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안되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연락을 해본다. 몇 년이고 계속 거절하는 상대에게 끈기를 갖고 매번 연락해주는 친구다. 조금은 미안한 마음도 있다. 그저 만나고 싶을 뿐이라면 여럿이서 모일 필요도 없으니까.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할 뿐이라면 어딘가에서 차를 마실 기회를 만들어도 좋다.

생각대로 망설이기는 했지만, 보호자인 내가 잘 감독한다는 조건으로 이해해주었다. 불건전한 일은 시키지 않도록 다짐을 받았다. 그 점에 대해서 그녀에게는 믿음이 있다. 기관이 약한지 지나가는 담배 연기만으로도 기침을 하고, 술이라고 해도 내가 마시는 것까지 타박하는 수준이다. 굳이 불건전하다면 불순 이성 교제 정도겠지.

내일 갈 수 있게 허가를 받았다고 하자 기쁘게 웃어주었다. 뭘 입고갈지 지금부터 생각해본다고.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게 옷인가. 조금 이해하기 어렵다. 중년끼리 모이는 술자리니 뭘 입고 가도 상관없을 것을.

홈 파티라도 상상하는 걸까. 혹은 호텔 일실을 빌린 식전 같은 건가. 혹시 몰라서 물어보자 큰소리로 웃어넘겼다. 그럴 리 없잖아, 하고 잘라버린다. 그렇다면 특별한 옷 같은 건 필요 없을 텐데.

물론 더 이상 파고들면 무엇을 입고 가는가, 하는 늪에 빠져버린다. 귀를 틀어막고 멀리하자. 뭐든 상관없다고 했다가는 더욱 화를 낸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뭘 입어도 귀엽다는 사탕발림도 통하지 않게 되었다. 자리를 피하는 것이 제일이다.

당일이 되어보자 그녀는 귀여운 시크 원피스에 검은 타이츠를 입고 있다. 조금 어른스러운 이미지를 꾸며봤습니다, 라는 평소의 스타일이다. 이것저것 생각한 결과가 결국 익숙한 모습이니 역시 자리를 피한 게 정답이었다.

저번에는 나와 그녀가 따로 앉아서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었지만, 이번엔 그것도 귀찮으니 둘이 함께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벽 쪽에 그녀를 앉히면 멀리서는 있는지도 잘 모르게 된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몇 명뿐이니 그걸로 충분하다.

허리를 털썩 내리자 맥주가 피처로 옮겨졌다. 어차피 건배는 맥주로 하고, 그 이후에도 대부분 맥주를 마실 테니 각각의 테이블에 나누어준 모양이다. 곧바로 조끼에 부었더니 그녀가 그렇게 마시고 싶냐면서 흰 눈으로 노려본다. 아가씨는 사회의 관습이란 걸 잘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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