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은 어제, 내일은 오늘-269화 (269/450)

9년 29화

선고

이제 이런 건 그만하자, 하고 그녀가 말했다. 이 기분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많은 일이 있었다. 그녀를 데려와서 마음이 내키는 대로 했던 적도 있었다. 서서히 사이를 줄이고, 결실을 보았던 순간도 있었다. 역린을 건드려서 띠가 두 번은 차이나는 소녀에게 진심으로 혼난 적도 있었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던 끝에, 지금 이곳에 있다. 그런 그녀가 말하는 것이다. 두 번 다시 다가오지 말라고. 알 리가 없다. 충격을 받느니 마느니 하는 얘기가 아니다. 머리가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컴퓨터가 프리징하는 것과 같이, 표면적으로는 무엇 하나 변하지 않았는데 아무런 조작도 먹히지 않는다.

그녀가 무언가 말하는 듯한 느낌도 들지만, 그대로 이를 닦고 잠자리에 들었다. 천장이 도는 것처럼 보인다. 이건 환각이다, 하고 자신에게 타이른다. 천장이 회전할 리가 없지 않은가. 돌 리가 없다는 걸 아는데도 돌고 있으니 이상하다.

아침에 일어나봐도 그녀는 여전히 존재했다. 존재하지 않을 리는 없다만. 완전히 평소와 다름없이 지내고 있어서, 앉아있으니 아침 식사까지 준비해주었다. 여우였다면 이 식사는 진흙이나 잎 중 하나겠지만. 아니, 그녀의 뱃살로 생각건대 여우보다는 너구리 같은데.

흰쌀밥을 한 손에 들고 국물을 마시며, 쉬엄쉬엄 절임을 손대고 있으니 문득 다시 떠올랐다. 어젯밤 그녀의 한마디가 머릿속에 울린다. 난 별로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하루가 지난 정도로 기억이 흐려지는 성질도 아니다. 차라리 잊어버리는 편이 행복할 텐데.

잊으려고 노력하자. 젓가락을 뻗는다. 그녀의 얼굴을 볼 때마다 떠오른다. 마주 앉아있으니 보지 않을 수는 없다. 자세가 좋은 것만이 유일한 쓸모인데, 이제는 밥그릇 말고는 볼 것이 없다. 바보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녀는 몇 살이 되었던가. 열넷인가 열다섯인가. 젊다. 너무나도 젊다. 내가 서른일곱이니까. 아직은 젊을 생각이지만, 그럴 리가 없다. 얼버무릴 수 있는 건 자신의 기분뿐이고, 그것마저도 해가 지날수록 어려워진다. 열다섯과 서른일곱, 열다섯과 서른일곱, 그런 문구만이 몇 번이고 뇌리를 지난다.

애초에 백 번을 계산해봐도 대답은 변하지 않는다. 우주인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유일하게 통할 가능성이 있는 언어는 숫자라고 한다. 언어도 물리도 통하지 않을 때마저 숫자만은 전 우주에서 변하지 않는다. 나 따위가 얼마나 시험한들 결과가 변하는 일은 없다.

생각할수록 슬퍼진다.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만을 필사적으로 견디며 아침 식사를 마쳤다. 이 나이가 되어 우는 건 너무 흉하다. 멋을 부린들 우습다는 건 변하지 않으나, 그렇더라도 태연하게 앉아있고 싶은 법이다. 막상 필요할 때 허둥대는 어른이란 꼴사나울 뿐이니까.

어떤 얼굴로 마주하면 좋을까. 한창 일을 하는 도중에도 계속 생각했다.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건 연인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녀가 말하는 아내와 남편도 아니다. 친구나 지인도 아니니, 부모와 아이가 되는 걸까.

부성애를 안았던 적이 없다, 라고는 하지 않는다. 성욕의 대상으로서, 여자로서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이상으로 지켜야 할 아이로서 보고 있었던 부분은 있다. 그녀는 어린애니까.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어린아이를 구하고자 하는 것은 어른의 의무다.

그게 좋지 않다고 한다면 돌려줄 말도 없다. 내가 그녀에게 공부를 가르쳤던 것도, 도덕 관념을 심었던 것도, 하루 세끼를 먹이고 가정 교사 노릇을 해왔던 것도 전부 그랬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사랑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게, 가 아닌 모든 사람에게.

그녀 안에서 남자와 아버지는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분리하고 있을까. 어떤 때는 남자이고, 어떤 때는 아버지다. 항상 같은 하나의 사람이 아니라, 때에 따라 다른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을까. 그 모순을 허용할 수 없어진다면, 어느 쪽인지를 선택할 필요가 생기게 된다.

내가 아버지처럼 행동할수록 나는 아버지가 되어간다. 나로서는 가능한 모든 일을 했을 생각이었지만, 그 가능한 일이란 그저 모순만을 반복하고 확대하는 행위였을 뿐이었나.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무엇인가. 선은 어디에 있었는가.

공부를 가르치는 건 부성인가. 함께 욕실에 들어가는 건 남자로서인가. 키스는 헤맬 것도 없지만, 포옹은 어떤가. 하나하나 이것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만 하게 된 것인가. 앞으로 이 모든 것에 선을 그어야만 하는가.

그녀가 바라는 일만을 하는, 욕구를 채우는 기계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을까. 포옹을 하고, 그다음 일은 자제한다. 머리는 쓰다듬지만, 뺨에는 닿지 않는다. 그런 통제가 과연 가능할까.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쉽겠지만, 그건 집을 나가라는 것과 같은 의미다. 중학생인 아이를 내버려도 좋을 리가 없고, 무엇보다 내가 견딜 수 없다.

암담한 기분을 끌어안은 채 일을 하는 것은 괴롭다. 몇 번인가 미스를 저질러 주변에 걱정을 끼치는 정도였다. 정신면의 일을 사생활 밖으로 꺼내는 것은 룰 위반이라는 걸 알면서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자꾸만 말이 되살아나고, 메아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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