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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랑, 사심, 덕질 (1/118)

1. 사랑, 사심, 덕질2022.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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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 끝, 가장 구석진 자리에 있는 5번 상담실. 편안한 상담실 분위기와 상반되게 소파에 앉은 수희는 내내 굳은 표정이었다.

16551835571132.jpg“오수희 씨, 심할 땐 어떤 증상이 있나요?”

맞은편에 앉은 의사의 질문에 수희가 초조한 듯 손톱 끝을 만지작거렸다.

16551835571145.jpg“한 번씩 일어서기 어려울 만큼 어지럽고 구토가 날 때도 있어요.”

환자 차트를 들고 있던 의사의 펜이 빠르게 움직였다.

16551835571132.jpg“지난주부터 잠을 못 잔다고 했는데 좀 나아졌나요?”

16551835571145.jpg“아뇨, 여전히 똑같아요. 복용량을 늘려야 할까요?”

16551835571132.jpg“일단 이번 주까지는 지켜보는 걸로 하죠. 지금 먹는 약들도 있으니까.”

상담 내용을 써 내려가던 의사가 차트를 덮었다.

16551835571132.jpg“오수희 씨, 조금씩이지만 호전을 보이고 있어요.”

의사가 수희의 긴장을 풀어 주려 미소를 띠어 보였다. 수희가 희망을 품고 정신과 의원을 찾은 지도 8개월째였다. 증세가 나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큰 변화를 느끼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게다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없던 불면증까지 찾아와 수희를 괴롭혔다.

16551835571145.jpg“선생님, 저한테는 현실적인 조언이 필요해요.”

금방이라도 빛을 잃을 것처럼 두 눈의 초점이 힘없이 흔들렸다.

16551835571145.jpg“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나요?”

자신의 몸이기에 잘 알고 있었다. 쉽사리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는 걸. 그런데도 의사에게 질문을 한 건 불안을 조금이라도 잠재워 보려는 이유에서였다.

16551835571132.jpg“솔직히 말하면.”

16551835571145.jpg“…….”

16551835571132.jpg“완벽하게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어요.”

사망 선고를 받기라도 한 것처럼 심장이 덜컥 멈추는 것만 같았다. 예상하던 일임에도 충격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16551835571132.jpg“배우인 오수희 씨한테는 지금 증세가 치명적인 거 알아요. 그래도 여기서 포기하지 마요.”

곧장 희망적인 말들이 붙었지만 이미 수희의 마음은 텅 비어 버렸다.

16551835571132.jpg“오수희 씨가 연기했던 주인공들처럼 분명 잘 이겨 낼 수 있을 거예요.”

용기를 북돋아 주려는 의도가 다분한 말이 그저 흘러만 지나갔다. 언제까지 이 상태인 채로 연기를 계속 이어 간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미래가 기대되는 떠오르는 아역 배우.’ ‘김태이 아역 오수희, 소름 돋는 연기.’ ‘연기 천재라 극찬받던 오수희. 성숙한 연기로 자리매김.’ 열세 살 때부터 시작해 온 연기였다. 자그마치 14년 동안 대본을 끼고 살았고, 카메라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했다. 할 수만 있다면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연기를 하고만 싶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부터 연기를 하는 게 불가능했다.

16551835571132.jpg“오수희 씨, 우리 조금만 더 힘내 봐요.”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의사를 향해 수희는 미소 한 번 보이지 못했다. 검은색 모자를 쓴 수희가 수납을 마치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등 뒤로 사람들이 지나가자 수희가 챙을 붙잡고 모자를 더욱 깊게 눌러썼다. Rrrrr―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수희가 매니저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16551835571145.jpg“응, 오빠.”

16551835604932.jpg[수희야, 지금 어디야?]

수희가 정신과를 다닌다는 사실을 모르는 철용의 목소리는 밝기만 했다.

16551835571145.jpg“밖에 잠시 나와 있어.”

16551835604932.jpg[혼자서 어디 갔어. 나한테 말했으면 같이 움직였을 텐데.]

16551835571145.jpg“개인적인 일이라서. 근데 무슨 일 때문에 연락한 거야?”

16551835604932.jpg[저녁에 <침수> 300만 명 기념 회식 갈 거지?]

작년에 수희가 주연으로 촬영했던 재난 영화가 개봉 7일 만에 300만 명을 불러들였다. 오늘 같은 날은 혼자 있고 싶었지만, 전날 감독이 연락해 꼭 참석하라고 일러두었다.

16551835571145.jpg“가야지. 감독님이 무슨 일이 있어도 오라고 하셨는데.”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수희가 본능적으로 밖으로 발을 뻗었다. 하지만 건물을 나가려던 수희의 발걸음은 이내 바닥에 붙어 버렸다. 문이 열리기에 1층인 줄 알았더니 3층인 산부인과 앞이었다. 정신을 다른 곳에 두고 있었더니 층수도 모르고 내린 것이다.

16551835604932.jpg[6시 30분까지 집 앞으로 데리러 갈게.]

수희는 이미 위층으로 올라간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답했다.

16551835571145.jpg“알겠어. 출발할 때 연락해 줘.”

16551835604932.jpg[응. 혹시 어디 아프거나, 무슨 일 생기면 언제든 전화하고.]

함께 10년을 일한 철용은 수희에게 가족과 다름없었다. 상담받은 내용을 털어놓고 싶었지만, 철용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고 있었다. 섬세한 감성을 소유한 철용이라면 그 자리에서 소리 내어 울 게 분명했다. 철용의 눈물을 본다면 8개월 동안 버티고 있던 자신도 그대로 무너질 것만 같았다.

16551835571145.jpg“오빠는 걱정도 많다.”

띵― 얼마 지나지 않아 위층에서 내려온 엘리베이터가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문을 벌렸다. 엘리베이터 문 쪽에 서 있던 마른 체형의 남성이 뒤로 물러서자 수희가 안으로 몸을 실었다.

16551835604932.jpg[너 저번에 머리 어지럽고 속 부대낀다고 해서 걱정돼서 그러지. 병원이라도 같이 갈까?]

16551835571145.jpg“병원은 혼자 갈 수 있어. 그리고 예전보다 속 안 좋은 것도 많이 나아졌어.”

철용이 걱정하는 게 싫어 거짓말로 둘러댔다.

16551835604932.jpg[그럼 다행이고.]

남성은 노골적인 눈초리로 수희의 모자 아래를 빤히 바라봤다. 따가운 시선에 수희가 고개를 돌리자 남성이 얼른 바닥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윽고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수희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16551835571145.jpg“나 끊을게, 오빠. 나중에 봐.”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남성이 문을 붙잡고 나와 수희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16551835571132.jpg“오수희 맞지?”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눈이 마주치고 나서 오수희라고 확신했다. 남성은 뱀 같은 혀로 입술을 축이며 벽에 붙은 층별 안내판을 확인했다.

16551835571132.jpg“3층에서 탔지?”

안내판을 하나하나 짚어 올라가던 남성의 손가락 끝이 한 곳에서 멈췄다.

16551835571132.jpg“산부인과?”

정기적인 검진을 위해 방문했다 치자. 오수희 정도 되는 배우라면 보통 도심에 있는 큰 병원을 찾지 않나. 왜 굳이 이 작은 건물에 딸린 산부인과지. 그리고 오빠라는 사람과 나눈 통화 내용만 들으면 100% 아닌가. 묘하게 남성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16551835571132.jpg“이거 돈 좀 되겠는데?”

정확한 사실 확인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제보만 하면 네티즌들이 다 알아서 파헤쳐 줄 것이다. ***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차 비서의 손에는 결재판이 들려 있었다. 긴 책상 앞에 앉은 승조는 차 비서의 등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TV를 보고 있었다. TV를 눈으로 흘긴 차 비서가 질리지도 않냐는 듯 고개를 잘잘 저었다.

16551835661597.jpg“또 오수희 씨 나오는 영화 보고 계세요? 저 영화만 열 번쨉니다.”

사실 차 비서가 발견한 것만 열 번이지, 실제로 횟수를 따지자면 더 될 것이다.

16551835661666.jpg“스튜디오 그린 인수는 끝난 거지.”

용건만 간단히 하라는 듯 승조가 차 비서의 잔소리를 차단했다. 차 비서는 쓰고 있던 안경을 중지로 끌어 올리며 결재판을 내려놓았다.

16551835661597.jpg“어제부로 법적 절차 모두 끝내고, FL그룹으로 인수 완료됐습니다.”

16551835661666.jpg“수고했어.”

결재판을 펼친 승조가 자세한 내용이 적힌 서류를 확인했다. ‘스튜디오 그린’은 7년 전에 설립된 회사로, 드라마와 영화를 기획·제작하는 곳이었다. 개성 넘치는 작품들을 줄줄이 오픈하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회사기도 했다. 승조가 결재판을 덮자 차 비서가 입꼬리를 위로 씰룩대며 물었다.

16551835661597.jpg“대표님, 저 하나만 여쭤 봐도 됩니까?”

16551835661666.jpg“뭔데.”

무심하게 대꾸하는 승조를 향해 차 비서가 음흉한 눈빛을 보냈다.

16551835661597.jpg“갑자기 스튜디오 그린 인수한 거, 오수희 씨 때문이죠?”

16551835661666.jpg“당연하잖아. 아니었으면 내가 왜 이 귀찮은 짓을 해.”

시시하게도 곧바로 나오는 대답에 차 비서가 볼멘소리를 냈다.

16551835661597.jpg“사랑에 빠지셨으면 좀 부끄러워하셔야 하는 겁니다. 좀 수줍은 기색도 보이면서요.”

16551835661666.jpg“사랑?”

난생처음 들어 보는 단어인 것처럼 승조가 미간을 좁혔다.

16551835661597.jpg“오수희 씨 보려고 제작사까지 인수하셨는데 그게 사랑이고, 사심이고, 덕질이죠.”

16551835661666.jpg“그런 거 아냐.”

승조가 단호하게 잘라 내자 이번에는 새로운 의문이 생겨났다.

16551835661597.jpg“그럼 오수희 씨랑 아는 사이십니까?”

단지 오수희라는 여자 때문에 거액을 주고 회사를 사들인 것에 대한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차 비서가 무슨 말을 하든 동요를 일으키지 않던 승조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래된 과거를 회상하던 승조의 입술이 옆으로 길게 펴졌다. 호기롭게 전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전을 맴도는 듯했다.

16551835571132.jpg“오빠 나 잊으면 안 돼. 약속해.”

16551835571132.jpg“안 잊을게. 안 잊고 꼭 기억하고 있을게.”

단 한 순간도 잊은 적 없었다. 오히려 시간이 더해질수록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져만 갔다. 그건 아마 그녀와 나눈 약속보다는, 그 시절 함께한 추억이 너무나 커서일 것이다. 기억의 끝자락을 끄집어내던 승조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감돌았다.

16551835661597.jpg“대표님 지금 살짝 웃고 계신 것 같은데?”

16551835661666.jpg“…….”

16551835661597.jpg“무슨 사이셨는데요. 예전에 맞선이라도 보신 거예요? 아니면 우연히 만나기라도?”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희귀한 미소에 차 비서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16551835661666.jpg“질문은 하나 아니었어? 나가 봐.”

매정한 승조는 금세 표정을 고치며 책상에 올려진 서류로 고개를 돌렸다.

16551835661597.jpg“궁금한데…….”

말꼬리를 흐린 차 비서가 여전히 앞을 지키고 서 있자 승조가 건성으로 나가라 턱짓했다. 영 석연치 않아 하던 차 비서가 결국 떠나고, 승조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자연스레 두 눈은 들릴 듯 말 듯 소리를 줄여 놓은 TV에 고정됐다. 사각형 화면 안에 담긴 수희는 햇살보다 더 해사한 미소를 품고 있었다. 팔꿈치를 책상에 댄 승조가 제 턱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16551835661666.jpg“날 알아볼 리 없겠지.”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었다. 기나긴 시간이 흘렀으니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대도 이상할 거 하나 없었다. 하지만 기대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한다면 거짓일 거다.

16551835661666.jpg“오수희.”

네가 기억해 준다면, 역시나 조금은 기쁘려나. ***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도로는 차들로 꽉 메워져 있었다. 수희가 탄 밴은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물러나지도 못한 채 끼어 있었다. 손목시계를 내려다본 수희가 앞길을 막고 있는 차를 바라봤다. 벌써 예정된 회식 시간보다 30분이 훌쩍 지나 버렸다.

16551835604932.jpg“미안하다, 수희야. 나 때문에 늦어서.”

운전석에 앉은 철용도 마음이 급한 건 마찬가지였다.

16551835571145.jpg“차가 이렇게 밀릴 줄 오빠도 모르고 있었잖아.”

16551835604932.jpg“차로 2분이면 갈 거리를 10분째 이러고 있으니.”

답답한 듯 철용이 핸들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회식 장소에 수희가 나타나지 않자 기다렸다는 듯 휴대폰이 울려왔다. 룸미러를 통해 철용이 통화 버튼을 누르는 수희를 흘깃거렸다.

16551835604932.jpg“누구? 감독님?”

고개를 끄덕인 수희가 귓가에 휴대폰을 가져다 댔다.

16551835571132.jpg[우리의 주인공은 어디쯤이신가?]

한껏 톤이 올라간 김 감독의 목소리가 휴대폰 밖으로 빠져나왔다.

16551835571145.jpg“근처에 다 왔어요, 감독님.”

16551835571132.jpg[아무리 주인공은 늦게 등장한다고 해도 빨리 와 줘. 다들 수희 씨만 찾아.]

시끌벅적한 사람들 소리에 섞여 김 감독의 말이 묻혀 들려왔다.

16551835571145.jpg“금방 갈게요, 감독님.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16551835571132.jpg[대스타 얼굴 어서 보자고. 빨리 와.]

16551835571145.jpg“네, 감독님.”

통화를 끝낸 수희가 핸드백 안에 휴대폰을 넣어 두고 뒷좌석 문고리를 붙잡았다.

16551835571145.jpg“오빠, 나 여기서 내려서 걸어갈게.”

당황한 철용이 수희를 말리려 했다.

16551835604932.jpg“왜, 차 타고 가지.”

16551835571145.jpg“걸어가는 게 더 빠를 것 같아서.”

16551835604932.jpg“감독님이 빨리 오래?”

16551835571145.jpg“김 감독님 시간 약속 늦는 거 싫어하시잖아. 오빠는 천천히 와.”

뒷좌석 문고리를 당긴 수희가 밴 밖으로 나왔다. 서둘러 내리느라 옆에 놔둔 모자를 쓰는 것도 잊어버렸다. 하지만 어차피 걸어가는 데 5분도 걸리지 않기에 필요 없겠다 싶었다. 하필 하이힐을 신고 있어 뛰지는 못하고 부지런히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투둑, 투둑. 그때 어깨를 두드리는 물방울이 하나둘 늘어 갔다. 우뚝 멈춰 선 수희가 고개를 들어 올려 어둑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빗방울이 떨어지나 싶더니 시야가 검은색으로 덮였다. 뒤로 몸이 기울자 등에 낯선 온기가 전해졌다. 턱을 끌어 내린 수희가 발끝을 돌려 뒤돌아섰다. 거리가 꽤 가까웠던 건지 남자의 넓은 가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들어 올리자 검은색 우산을 들고 있는 남자가 수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수희는 따스한 순풍이 불어오는 것같이 느껴졌다.

16551835661666.jpg“반갑습니다.”

16551835571145.jpg“…….”

16551835661666.jpg“오수희 씨.”

단정한 입매 밖으로 나오는 승조의 낮은 음성은 근사했다. 승조의 인사에 입술을 달싹거리던 수희가 목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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