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죄송하지만, 은퇴합니다2022.02.05.
“……아.”
무언가 떠오른 듯 수희가 나지막하게 감탄사를 흘렸다. 뒤이어 나올 말을 기다리던 승조는 저도 모르게 우산을 붙잡은 손에 서서히 힘이 실렸다. 긴 시간이 흘렀다 하더라도 자신을 기억하고 있던 걸까. 승조가 옅게 미소 지을 틈도 없이 수희가 툭 하고 말을 뱉어 냈다.
“제 팬이시구나.”
일순 승조의 짙은 색을 띤 눈동자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수희는 그를 단순히 자신을 알아보고 말을 걸어 오는 일반인이라 판단했다. 물론, 외모는 전혀 일반적으로 생기지 않아 함께 일한 적이 있는 배우인지도 잠시 고민했지만 말이다. 손목시계를 확인한 수희가 조급한 손길로 핸드백을 열었다.
“사인해 드릴게요.”
핸드백 구석진 곳에 있는 펜을 꺼내 제 앞에 서 있는 승조에게 물었다.
“혹시 종이 없으세요?”
승조는 수희의 말에 이끌리듯 지갑을 열고 안에 있던 명함을 꺼냈다. 굳이 이름이 박힌 앞면으로 내밀었건만, 수희는 당연하게 뒷면으로 뒤집었다. 그리고 중심에 박힌 FL그룹 로고를 피해 흰 여백이 드러난 부분에 사인을 남겼다.
“여기.”
수희는 사인을 한 명함을 다시금 건네고는 살포시 미소 지었다. 자신의 손으로 돌아온 명함을 내려다보던 승조가 입을 열었다.
“오수희 씨는 제가 전혀 기억이 안 나나 봅니다.”
아차 싶었던 수희가 제 두 손을 맞대 입가 쪽으로 가져다 댔다.
“사인회에도 오신 적 있으신가 봐요.”
……사인회. 찾아갈까 한 적은 있었지만 실제로 수희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완전히, 깨끗이 잊었구나, 너는. 기억 못 한다 해도 아무렇지 않을 거라 여겼는데, 나는 또 실망 같은 걸 하고 있었다. 유치하게.
“같이 사진 찍어 드리고 싶은데 제가 지금 좀 바빠서요. 죄송해요.”
정중히 사과한 수희는 잦아든 빗줄기 속으로 뛰어들었다. 멀지 않은 곳에 회식 장소가 보였기에 수희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회식 장소에 도착하고 나서야 수희는 빗방울이 떨어진 어깨를 털어 냈다. 안으로 들어가려던 수희는 불현듯 자신의 앞에 나타났던 남자가 떠올랐다. 묘하게 낯설지 않은 건 자신의 팬이어서일까. 하이힐을 신었는데도 올려다볼 정도로 큰 키에 화려하다 싶을 정도로 뚜렷한 이목구비. 그 정도 얼굴이라면 뇌리에 깊게 남아 있어야 하지 않나.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건가.”
왜 이렇게 익숙하지. 혹시 사인회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만난 적이 있나.
“수희 씨, 왜 이제 왔어요!”
케케묵은 기억을 꺼내려는데 수희의 곁으로 조연출이 다가왔다.
“차가 좀 밀려서요.”
“다들 기다려요. 어서 들어가요.”
승조에 관한 생각은 금세 지워 버린 수희가 닫혀 있던 식당 문을 열었다. 그러자 봇물이 터져 나오듯 왁자지껄한 소리가 한가득 쏟아져 나왔다. 수희의 뒤에 서 있던 조연출이 앞으로 튀어나오며 큰 소리로 사람들에게 알렸다.
“수희 씨 왔어요!”
순식간에 식당 안에 있는 사람들의 눈이 수희에게로 옮겨 갔다.
“우리 영화의 주역 오수희 씨 드디어 등장했네!”
“수희 씨, 어서 와요. 우리 엄청나게 기다리고 있었어요.”
“못 본 사이에 더 예뻐진 것 같아, 수희 씨.”
사람들이 한마디씩 얹은 것뿐인데 다시 귀가 아플 만큼 소란스러워졌다. 회식 장소 안에는 다른 배우들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전부 수희에게 집중했다. 오수희의 존재가 그랬다. 어디에 있으나 빛이 나고, 어딜 가나 이야기의 중심이었다. 함께 촬영했던 스태프들과 인사를 마친 수희는 겨우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김 감독이 새 잔에 맥주와 소주를 적절히 섞어 수희의 앞에 놓아 주었다.
“수희 씨 한 잔 쭉 해.”
잔을 받아 들긴 했지만, 수희는 차마 마시지 못했다. 정신과에서 받아 온 약이 있었기에 금주가 필요한 상태였다.
“제가 오늘 술은 못 마실 것 같아요.”
어렵사리 꺼낸 말에 김 감독은 냉정하게 대꾸했다.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 이렇게 좋은 날에 한잔해야지.”
제 편인 철용이라도 있으면 좋았겠지만, 아직 도로 위인 건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옆에 앉은 스태프들의 시선까지 더해지자 수희는 어쩔 수 없이 잔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제야 김 감독이 만족스럽게 너털웃음을 지으며 잔을 머리 위로 올렸다.
“<침수> 500만 명 달성해 봅시다!”
스태프를 비롯해 배우들이 잔을 부딪치며 술을 입에 들이부어 댔다. 들뜬 분위기에 맞춰 수희도 잔을 비울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 한 잔을 다 마셨을 때쯤, 철용이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철용이 깍듯하게 허리를 굽히자 김 감독이 친근하게 두터운 등을 두드렸다.
“운전하느라 고생했네. 어서 앉아.”
수희의 옆자리에 철용이 앉자, 김 감독이 식당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분도 올 때가 됐는데 늦으시네.”
“아직 안 온 분이 더 계세요?”
수희의 물음이 끝나자마자였다. 식당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는 이에게 시선을 사로잡혔다. 식당 안에 있는 사람들은 수희가 등장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반응을 보였다. 수희에겐 즉각 환호가 쏟아졌다면, 승조를 발견한 사람들은 조용히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안면이 없는 걸 보면 배우는 아닌데, 과할 정도로 잘난 얼굴에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덕지덕지 달라붙는 관심을 뒤로 하고 남자가 수희가 있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긴 다리로 시원스레 걸어오는 남자를 보고 수희의 눈이 점차 커졌다.
“조금 늦었습니다.”
이런 우연이 있을까. 김 감독이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길가에서 마주쳤던 자신의 팬이었다.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김 감독이 악수를 청했다.
“아이고, 한 대표님 오셨습니까?”
김 감독과 악수를 마친 승조가 이번에는 수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얼결에 자리에서 일어선 수희는 승조의 손을 맞잡았다.
“스튜디오 그린 대표, 한승조입니다.”
철용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FL그룹에서 스튜디오 그린을 인수했다고. 아마 바뀐 대표가 자신의 팬인 이 남자인 듯했다.
“오수……희라고 합니다.”
모를 리 없는 자신의 이름을 입에 담자 승조가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렸다.
“알고 있습니다, 오수희 씨인 거.”
꽤 오래 손을 잡고 있던 탓인지 손바닥에 승조의 체온이 고스란히 옮겨졌다.
“어서 앉으세요.”
김 감독이 비어 있는 자신의 옆자리를 눈짓하자 승조가 그제야 손을 놓았다. 하지만 승조의 열기는 새겨 놓은 것처럼 여전히 손에 달라붙어 있었다. 승조가 자리에 앉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철용이 자신의 명함을 두 손으로 건넸다.
“오수희 배우 매니저 강철용이라고 합니다.”
명함을 받은 승조에게 철용은 열정적으로 영업을 해 댔다.
“우리 수희가 아직 복귀 작품을 결정 못 했거든요. 좋은 작품 있으면 꼭 좀 저희 쪽으로 보내 주세요.”
영화 촬영 이후 공백기를 가지고 있는 수희 역시 하루빨리 복귀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몸 상태로는 대사 한 마디 뱉을 수 없었다. 나오려는 한숨을 삼킨 수희가 딱딱해지는 입매를 말아 물었다. 어차피 작품이 기획사 쪽으로 넘어온다고 하더라도 수희가 거절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그럴 필요 없이 미팅 날짜 잡도록 하죠.”
갑자기 승조가 예상치 못한 전개를 이어 나갔다. 어두워진 수희의 표정과 달리 철용의 얼굴은 전등보다 더 환히 빛났다.
“바로 미팅 날짜를요?”
“다음 주까지 가지고 있는 극본 중에 오수희 씨랑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들로만 추려서 보여 드리겠습니다.”
의욕이 과잉된 철용을 말릴 틈도 없었다.
“저희야 좋죠.”
철용은 냅다 승조의 제안을 물었다.
“시간대는 차후에 조율하는 걸로 하죠.”
“대표님께서 시간 잡아 주시면 맞춰서 찾아뵙겠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산불처럼 일사천리에 일이 진행되자 수희가 급하게 철용의 옷을 붙잡았다. 옷자락을 아래로 당겨 보지만 철용은 귀찮다는 듯 손을 밀어냈다. 절로 눈썹 사이가 좁아 드는데 하필이면 그 순간 승조와 눈이 마주쳤다.
“다음 주에 또 뵙게 되겠네요, 오수희 씨.”
“아……. 네.”
불안 때문인지 방금만은 여유롭게 표정을 고칠 수가 없었다. 유리처럼 정교하고 예리한 눈빛이 찰나에 수희를 훑었다. 이내 닿아 있던 승조의 눈길은 떨어졌지만, 이미 모든 걸 간파당한 기분이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속내를 감추려 하지만 언젠가는 자신의 비밀이 드러날 것만 같았다. 따끔따끔, 심장이 쑤셔 왔다. 타는 속을 잠재워 보려 수희는 술을 밀어 넣었다.
***
“수희야, 숙취 해소제 사 왔어.”
거창했던 회식이 끝나고 난 후, 철용이 비닐봉지를 가지고 밴에 올라탔다.
“속은 좀 어때. 괜찮아?”
편의점에서 숙취 해소제를 사 온 철용이 뒷좌석에 앉은 수희에게 내밀었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붙잡고 있던 수희가 숙취 해소제를 들이켰다.
“이거 마셨으니까 좀 나아지겠지.”
눈앞이 빙글 돌 만큼 어지러웠던 수희가 좌석에 머리를 기댔다. 오랜만에 마신 술이 자신을 이렇게도 괴롭힐 줄은 몰랐다. 빈 병을 수희의 손에서 가져간 철용이 조잘거렸다.
“그래도 오늘 큰 수확이 있었잖아. FL그룹에서 빵빵하게 받쳐 주고 있으니까 투자 쪽에는 문제가 없을 거고, 유명 각본가들 대본도 많이 들어올 거야.”
대본, 이 한 단어만으로 수희는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입을 손으로 틀어막은 수희가 상체를 숙였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미팅 취소해 줘.”
철용은 잘못 들은 줄 알고 고개를 갸웃했다.
“미팅을 미루라고?”
“아니, 취소하라고.”
“미팅을 왜.”
수희가 갈색의 긴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쓸어 올리며 허리를 세웠다.
“나 안 해.”
“왜 안 해.”
답답하다는 듯 철용이 목소리를 높이자 수희가 입술을 벌렸다.
‘안 하는 게 아니라 할 수가 없는 거야.’
울컥 터져 나오려는 말을 안으로 눌러 덮어 버렸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수희의 분위기에 철용의 눈빛에 걱정이 번졌다.
“수희 너, 무슨 일 있어?”
똑똑. 철용이 한 마디를 더 보내기도 전에 누군가 운전석 창문을 두드렸다. 선팅이 짙은 창문을 내리자 운전석 앞에 서 있는 승조의 모습이 드러났다.
“잠시 오수희 씨랑 대화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수희의 의사를 묻기 위해 철용이 뒷좌석으로 몸을 돌렸다. 끄덕이는 고갯짓에 철용이 운전석에서 내려 자리를 비켜 주었다. 닫혀 있던 뒷좌석 문이 열리고 수희의 옆자리에 승조가 올라탔다. 소음 하나 허용되지 않는 밴 안에는 숨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침묵이 이어지던 차 안, 승조가 고요히 입술을 떼어 냈다.
“오수희 씨는 저희 제작사와 함께 일하고 싶지 않은가 봅니다.”
“…….”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수희 씨 표정이.”
좋은 극본에, 좋은 제작사까지. 마다할 게 없었다. 그런데도 거절해야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연기를 할 수 없었다. 하고 싶어도, 노력해도 되지 않았다.
“함께 일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닙니다.”
“그럼 눈앞에 놓인 제안이 놓쳐야 할 기회가 아니라 잡아야 할 기회라는 걸 알 텐데요.”
불완전한 연기를 보여 줄 바에는, 완전한 배우로 남은 지금 끝맺음 짓고 싶었다. 끊임없이 노력해 왔던 지난날들 위에 얼룩을 남기고 싶지 않은 거다.
“다시는 연기하지 마. 네 엄마 마지막 소원이야.”
그토록 원하던 엄마의 바람이 이루어졌다. 결국에 스스로 연기를 포기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저…….”
핑, 눈물이 솟구칠 것 같아 잠시 입을 다물었다. 바르르 떨리는 아랫입술을 깨문 수희가 익숙하게 눈물을 참아 냈다. 머금고 있던 뜨거운 숨과 함께 정리된 말이 빠져나왔다.
“죄송하지만, 은퇴할 거예요.”
“…….”
“그러니까, 미팅 참석 못 합니다.”
잠정 은퇴 선언. 그걸 처음 만난 한승조 앞에서 해 버렸다.
*** 그 시각, 셀럽들의 이슈를 다루는 한 유튜버 커뮤니티에 새 글이 올라왔다. [다음 주 화요일, 대배우 오수희 씨의 뒷모습을 밝히겠습니다.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