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임신 스캔들 (3/118)

3. 임신 스캔들2022.02.08.

16551836104955.jpg“죄송하지만, 은퇴할 거예요.”

16551836104965.jpg“…….”

16551836104955.jpg“그러니까, 미팅 참석 못 합니다.”

이제 겨우 스물일곱이었다. 그 누구보다 예쁘게 피어나고 있던 꽃이 스스로 지려 했다.

16551836104965.jpg“내가 지금 잘못 들은 겁니까?”

승조의 음성이 수희의 가슴을 묵직하게 짓눌렀다. 수희라고 쉽게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이겨 내려 병원을 전전하다 정신과까지 가게 됐다. 하지만 8개월 전에 벌어진 사건은 제 삶을 통째로 바꿔 놓기 충분했다.

16551836104955.jpg“당장 은퇴가 아니더라도 활동 중단할 겁니다.”

16551836104965.jpg“갑자기 그러겠다는 이유, 뭐 때문입니까.”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승조의 눈이 답을 갈구하고 있었다.

16551836104955.jpg“개인적인 사정입니다.”

16551836104965.jpg“내가 물으면 안 되는 사정입니까.”

공백 없이 따라붙는 말에 붙어 있던 수희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한승조와 만난 건 따져 봤자 세 시간도 되지 않았다. 회식 장소에서 이렇다 할 친분을 쌓은 것도 아니었다. 단지 팬이라는 이유로 자신에게 목을 매나 싶었다.

16551836104955.jpg“제 개인적인 사정이 대표님한테 중요한가요?”

16551836104965.jpg“왜 자기 인생에 브레이크를 거는 건지 알고 싶을 뿐입니다.”

수희는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아프게 파고들어 온 말을 되뇄다.

16551836104955.jpg‘브레이크.’

고장 난 차를 탄 수희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16551836104955.jpg“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그만두려는 이유.”

아무에게도 밝히지 못한 비밀을 승조에게 알릴 수 있을 리 없었다. 말없이 서로의 시선만이 빽빽하게 오갔다. 눈빛에 담긴 수희의 생각을 읽은 건지 승조가 말문을 열었다.

16551836104965.jpg“내가 쓸데없이 과한 참견을 했나 봅니다.”

16551836104955.jpg“…….”

16551836104965.jpg“실례가 됐다면 미안하군요.”

고저 없는 목소리로 사과를 남긴 승조가 뒷좌석 문고리를 붙잡았다. 승조는 자신이 정도가 지나칠 만큼 반응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른 배우의 은퇴 소식이었다면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수희이기 때문에 달랐다. 자신의 과거 속에 수희가 존재하기에 그녀를 포기할 수 없었다. 밴에서 내릴 듯했던 승조가 다시 수희를 향해 상체를 틀었다.

16551836104965.jpg“오수희 씨도 알 겁니다, 오수희 씨가 가지고 있는 게 뭔지.”

조금 전에 던지던 말과는 달리 승조의 어투는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16551836104965.jpg“오수희 씨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 난 아까웠을 뿐입니다.”

이내 뒷좌석 문을 연 승조가 밴에서 내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울렁거리던 속은 잠잠해졌지만 심장은 터질 것처럼 뛰어 댔다. 지금 당장이라도 연기를 하고 싶었다. 역할에 몰입한 자신을 통해 사람들과 교감하고 싶었다. 잔잔하게 떨리는 손을 동그랗게 말아 쥐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철용이 차 안으로 몸을 실었다.

165518361327.jpg“한 대표님이 미팅 이야기 꺼내시지?”

긴장하고 있던 몸에 힘이 풀리자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16551836104955.jpg“오빠, 나 많이 피곤해.”

165518361327.jpg“그래, 집으로 가자.”

창백해진 수희의 얼굴을 보고 철용은 조용히 차 핸들을 붙잡았다. 차가 출발하자 수희가 아무런 표정 없이 차창에 비친 자신을 바라봤다.

16551836104955.jpg‘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오수희.’

그리고 나약해진 마음을 다잡아 보려 스스로 주문 같은 걸 걸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모습이,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전부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로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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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관에 구두를 벗어 둔 수희가 거실과 연결된 복도로 들어섰다. 대리석 바닥 위에 깔린 한기가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타고 올라왔다. 거실 벽에 붙어 있는 스위치를 누르자 천장에 설치된 조명에 불이 들어왔다. 몸은 지칠 대로 지쳤지만 침실로 가 눈을 붙여도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거실에 우뚝 서 있던 수희가 TV 서랍장 앞으로 걸어갔다. 서랍장 앞에서 망설이던 것도 잠시. 수희가 닫혀 있던 서랍장을 열어젖혔다. 서랍장 안을 가득 채운 건 다름 아닌 수많은 대본이었다. 8개월 동안 기획사 사장이 수희에게 전달한 대본이 빼곡히 들어 있었다. <다시 서른> 수희의 손이 가장 위에 얹어진 대본을 집어 들었다. 대본의 겉면을 넘기는 수희의 손끝이 경직되어 있었다. 흰 종이 위에 박힌 글자들을 보는 순간 눈앞이 흐릿해졌다. 눈꺼풀을 짓눌러 감았다가 뜬 수희가 지문들을 지나쳐 여자 주인공의 대사로 넘어갔다. 여자 주인공 이름 뒤에 붙는 글자를 읽어 보려 입을 열었다.

16551836104955.jpg“아아.”

하지만 벌어진 입 밖으로 나오는 건 무의미한 소리뿐이었다. 제대로 한 글자를 내뱉기도 전에 글자들이 물 위에 뜬 것처럼 일렁거렸다. 지문을 비롯해 대사들의 모음과 자음이 각각 떨어져 흩어졌다.

16551836104955.jpg“내.”

억지로 말을 끄집어내는 수희의 목울대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16551836104955.jpg“내가 이!”

핏대가 올라선 목이 금방 새빨갛게 변했다. 대사를 한 줄 읊기도 전에 글자가 서서히 흰 여백에 잠겼다. 대본을 붙잡고 있던 수희의 다리가 가녀린 나무처럼 단박에 꺾였다. 바닥에 엎드린 채로도 수희는 포기하지 않으려 대사를 눈으로 찾았다. 하지만 이미 종이 위에 박혀 있던 글자들은 사라진 뒤였다.

16551836104955.jpg“다시.”

수희가 들고 있던 대본을 덮고 서랍장 안에 있던 다른 대본을 꺼냈다. 파란색 대본집을 펼치자마자 대사를 읽을 수 없을 만큼 글자가 시야에서 난잡하게 흩어졌다. 대사를 눈에 넣으려고 하면 할수록 속이 메스꺼워졌다.

16551836104955.jpg“욱.”

결국 헛구역질까지 올라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검은색으로 덮인 눈앞이 룰렛을 돌린 것처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16551836104955.jpg“웁!”

대본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잠잠했던 비위가 고약하리만큼 꼬였다. 여전했다. 똑같았다. 달라진 게 없었다. 8개월째 제자리걸음만 하며 시간을 허비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16551836104955.jpg“하.”

거칠게 숨을 토해 내던 수희의 말간 눈동자에 눈물이 차곡차곡 쌓였다. 대본을 움켜쥐자 손안에서 연약하게 구겨져 버리고 만다.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망가진 종이가 자신을 닮아 있었다.

16551836104965.jpg“왜 자기 인생에 브레이크를 거는 건지 알고 싶을 뿐입니다.”

차 안에서 승조가 남겼던 말이 떨칠 수 없을 만큼 가슴에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어느새 눈가에 가득 찬 눈물이 대본 위로 낙하했다. 저녁에 맞았던 빗방울처럼 눈물이 쉼 없이 대본 위를 적셨다.

16551836104955.jpg“나라고 그만하고 싶은 줄 알아?”

여기서 그만두고 싶지 않아 그 수많은 알약을 삼켰다.

16551836104955.jpg“나라고 다 포기하고 싶은 줄 아냐고!”

포기할 수가 없어서 매일같이 대본을 보고 또 봤다. 노력에 대한 대가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8개월 전까지만 해도 글자란 글자는 모조리 읽을 수 없었다. 길가에 있는 간판, 휴대폰으로 온 메시지, 자신의 이름조차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다 심리 치료를 시작한 이후부터 헝클어져 보이던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대로라면 금방 전처럼 돌아올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대본만은 여전히 읽을 수 없었다.

16551836104965.jpg“오수희 씨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 난 아까웠을 뿐입니다.”

수희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게 얼마나 귀중하고 특별한지. 그래서 처음에는 시간이 해결해 주길 기다렸다. 괜찮아지겠지. 나아지겠지 하며.

16551836104955.jpg“그런데 조금도 달라진 게 없어.”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발목이 넝쿨에 엉켜 밑바닥으로 끌려가는 듯했다. 삐이이, 하고 귓가를 때리는 이명에 수희가 눈가를 찌푸렸다.

16551836191199.jpg“난 네가 연기하는 게 싫어.”

괴롭게 얼굴을 일그러트린 수희가 울리는 귀를 붙잡았다.

16551836191199.jpg“증오스럽고, 경멸스러워!”

환청이 사라지길 바라며 수희가 귀를 틀어막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끊임없이 듣고 싶지 않은 말들이 반복됐다.

16551836104955.jpg“그만, 제발 그만해!”

버티다, 버티다 결국에는 괴로움에 울부짖으며 바닥에 엎드렸다.

16551836104955.jpg“제발 그만해. ……엄마.”

그렇게 오늘 또 한 번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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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아무런 소득 없이 지나갔다. 오히려 늦은 새벽까지도 잠 못 드는 날이 더 늘어났다.

165518361327.jpg“수희야, 요새 컨디션 안 좋은 거 같은데 병원 한번 가자니까.”

기획사 사옥 지하에 차를 세운 철용이 뒷좌석에 앉은 수희를 살폈다. 안전띠를 푼 수희가 억지로 입술 끝을 끌어 올리며 미소 지었다.

16551836104955.jpg“요새 밤낮이 바뀌어서 그래.”

165518361327.jpg“넌 꼭 일 쉬면 밤낮이 바뀌더라. 그거 고쳐야 한다니까.”

이어지는 철용의 잔소리가 익숙한 듯 수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밴에서 내린 수희는 철용과 함께 사장실이 있는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원래라면 예약해 둔 정신과에 들러야 했지만, 최 사장의 호출을 받아 기획사로 오게 됐다.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온 수희가 비서 데스크를 지나쳐 사장실로 들어갔다. 수희를 기다리고 있던 최 사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환대했다.

16551836219016.jpg“수희야, 오랜만에 보니까 좋다.”

벌써 최 사장과 함께 일한 지도 6년이 지나고 있었다. 친밀한 사이기에 최 사장이 수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16551836219016.jpg“너는 어떻게 내가 불러야만 찾아와.”

16551836104955.jpg“회사 사장님을 누가 자주 뵙고 싶어 하겠어요.”

솔직한 수희의 답변이 마음에 든 건지 최 사장이 호탕하게 웃었다.

16551836219016.jpg“여전해, 수희는.”

최 사장이 수희의 어깨를 다독이며 사무실 중심에 있는 소파로 걸어갔다.

16551836219016.jpg“앉아. 앉아서 이야기하자.”

따라 발걸음을 옮기던 수희가 소파 근처에 가서 멈춰 섰다. 유리 테이블 위에 놓인 건 대본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많은 양의 대본에 수희는 바닥에 발이 묶여 버렸다.

16551836219016.jpg“어서 안 앉고 뭐 해?”

이미 자리를 잡고 앉은 최 사장이 대각선에 있는 소파를 두드렸다. 수희의 뒤에 서 있던 철용이 살짝 등을 떠밀자 붙어 있던 다리가 떨어졌다. 수희가 자리에 앉자마자 최 사장이 본론을 꺼냈다.

16551836219016.jpg“일단 이 대본들부터 보고 내일모레 스튜디오 그린 쪽이랑 미팅하는 걸로 해.”

최 사장이 산처럼 높이 쌓아 둔 대본을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렸다.

16551836219016.jpg“이제 복귀해야지.”

누군가 입을 막은 것처럼 수희는 말 한 마디 할 수가 없었다. 몇 번이고 입술을 닫았다가 열던 수희가 목에 걸려 있던 말을 토해 내려던 때였다.

16551836219016.jpg“사장님.”

비상 상황인지 비서가 노크도 없이 사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비서는 들고 있던 태블릿을 최 사장에게 내밀었다.

16551836219016.jpg“이것부터 보셔야겠어요.”

16551836219016.jpg“뭔데 그래.”

대화를 끊은 비서가 귀찮다는 듯, 최 사장이 건성으로 태블릿을 받아 들었다. 비서가 직접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동영상이 재생됐다.

16551836219016.jpg[드라마, 영화, CF 할 것 없이 종횡무진 중인 오수희 씨.]

스피커 밖으로 나오는 신랄한 목소리에 수희와 철용의 고개도 돌아갔다.

16551836219016.jpg[버는 만큼 쓴다고 기부도 참 많이 하시죠. 덕분에 이미지도 좋고.]

새까만 안경에 검은색 모자를 쓴 남자의 옆으로 수희의 화보 사진이 떠 있었다. 앞부분만 듣는다면 수희에 관한 칭찬 일색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수희에 대한 칭송이었다면 비서가 대화 중에 끼어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16551836219016.jpg[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 다들 아실 겁니다.]

16551836219016.jpg“얘 뭐 하는 애야?”

결코 좋은 의도로 촬영된 영상이 아니라는 걸 알아채고 최 사장이 날카롭게 반응했다.

16551836219016.jpg[그 착하고, 여리고, 깨끗할 것 같던 사람이 그동안 팬들을 속이고 있었습니다.]

도무지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 알 수 없어 수희는 잠자코 있었다. 4개월 전에 보육원 봉사 활동 때 찍힌 수희의 사진이 화면을 꽉 채웠다. 아이들과 즐겁게 웃는 사진, 함께 밥을 먹는 사진, 아이를 안고 있는 사진이 차례로 지나갔다. 그리고 뒤이어 화살과도 같은 날카로운 말이 날아들었다.

16551836219016.jpg[여러분은 오수희 씨가 임신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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