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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은퇴의 이유 (4/118)

4. 은퇴의 이유2022.02.12.

16551836330983.jpg[여러분은 오수희 씨가 임신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의미심장하게 꺼낸 유튜버의 말에 최 사장과 철용의 눈이 수희를 향했다. 어처구니가 없는 수희는 입을 벌린 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16551836330983.jpg[저희는 제보자로부터 오수희 씨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됐습니다.]

한순간에 영상 화면이 바뀌더니 한 카페에 제보자가 나타났다. 간단하게 유튜버와 인사를 주고받은 제보자가 빈자리에 앉았다. 흐리게 처리된 터라 제보자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16551836330983.jpg[일주일 전쯤 우연히 오수희 씨를 만났다고 하셨는데, 어디서 만나게 되신 건가요?]

유튜버의 질문에 제보자가 입을 열었다.

16551836330983.jpg[거기가 병원 상가예요. 제가 치과 치료 끝내고 엘리베이터로 내려가는데 오수희 씨를 보게 됐어요.]

철저하게 기계로 변조된 목소리였다.

16551836330983.jpg[오수희 씨가 어디서 엘리베이터를 타던가요?]

유튜버가 제보자에게 소형 마이크를 가까이 들이밀었다.

16551836330983.jpg[산부인과가 있는 층이었습니다.]

일주일 전, 산부인과. 수희는 태엽을 감듯 일주일 전으로 기억을 되돌렸다. 정신과를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던 중, 산부인과에서 잘못 내린 적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 1층으로 가기 위해 탄 엘리베이터 안에는 사람이 있었다. 골치가 아파진 수희가 중지로 눈썹을 밀어냈다. 제보자는 그때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던 그 사람이 틀림없었다.

16551836330983.jpg[산부인과라고 하더라도 치료 차원에서 들를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중립된 유튜버의 의견에 제보자가 반박했다.

16551836330983.jpg[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통화 내용을 들어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고요.]

16551836330983.jpg[통화 내용을 들으셨어요?]

제보자가 당당하게 엿들은 내용을 밝혔다.

16551836330983.jpg[네. 전화 통화 상대한테 오빠라고 불렀고, 병원은 혼자 가도 괜찮다고 했어요.]

16551836330983.jpg[아, 사람들 눈 때문에 병원은 혼자 가도 괜찮다.]

좀 더 설득력이 느껴지도록 유튜버가 교묘하게 말을 덧붙였다.

16551836330983.jpg[그리고 오수희 씨가 속이 안 좋았던 게 많이 나아졌다고도 했어요.]

16551836330983.jpg[그냥 속이 안 좋았다면 산부인과가 아니라 내과를 갔겠죠? 설마, 입덧 때문인 걸까요.]

16551836330983.jpg[그런 것 같아요. 전화 끊을 때는 나중에 보자고 하더라고요.]

16551836330983.jpg[연인 사이가 확실해 보이네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남성과 그저 우연히 눈이 마주친 거라 여겼었다. 철용과 나눈 대화를 퍼트릴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16551836330983.jpg[손에 뭔가를 들고 있지는 않던가요? 보통 산모 수첩 같은 걸 가지고 가던데요.]

잠시 제보자가 입을 다물었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16551836330983.jpg[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손에 뭔가를 들고 있긴 했어요.]

16551836330983.jpg[그게 산모 수첩이었나 보네요.]

손에 들고 있던 건 휴대폰뿐이었다. 과연 그걸 산모 수첩으로 볼 수 있었을까. 이슈를 위해 거짓을 더한 것뿐이었다. 점차 심각해지는 수희의 표정에 최 사장은 입이 바짝 말랐다. 제보자와의 인터뷰가 끝나고 하얀 배경 앞에 유튜버가 앉았다.

16551836330983.jpg[알아보니 해당 산부인과 건물은 오수희 씨의 자택과는 거리가 꽤 먼 곳에 있었습니다. 오수희 씨는 굳이 왜 자택과 동떨어진 작은 산부인과를 택했을까요.]

영상이 끝나 가자 유튜버가 쐐기를 박아 넣었다.

16551836330983.jpg[그간 활발히 작품 활동을 하던 오수희 씨가 긴 공백기를 가지는 이유가 뭘까요.]

이미 그는 답을 내리고 사람들에게 묻고 있었다.

16551836330983.jpg[새 생명이 찾아와 복귀할 수 없었던 게 아닐까요?]

유튜버는 사람들을 자극하기 위해 개인적인 감정을 호소했다.

16551836330983.jpg[오수희 씨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건 그동안 그녀가 보여 온 행보 때문입니다.]

강조에 강조를 더하듯 강하게 쏘아붙였다.

16551836330983.jpg[선한 영향력, 미담 제조기라고 불릴 만큼 온 국민의 사랑을 듬뿍 받고 계신 오수희 씨. 당당하다면 사람들 앞에서 이 의혹을 밝힐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말을 마친 유튜버 아래에 메일 주소가 띄워졌다.

16551836330983.jpg[오수희 씨와 관련된 추가 제보를 받고 있습니다. 아래로 많은 메일 부탁드립니다.]

영상이 끝나자 사장실이 정적에 사로잡혔다. 작은 소음조차 예민하게 느껴질 만큼 침묵은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Rrrrr― 적막을 깨트린 건 최 사장의 휴대폰이었다. 통화 거절 버튼을 누르자마자 이어 다른 전화가 들어왔다. 사장실 안을 가득 채우는 벨 소리에 최 사장이 휴대폰을 꺼 버렸다.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던지듯 올려놓은 최 사장이 무거운 숨을 토해 냈다.

16551836330983.jpg“솔직히 말해, 수희야. 몇 주나 됐어.”

최 사장조차 영상을 믿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영상 하나만으로 꾸며진 거짓을 믿을 것이다.

16551836388223.jpg“사장님도 날 안 믿는데 어떻게 사람들이 날 믿어요?”

기가 막힌 수희가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16551836330983.jpg“이게 사실이냐, 거짓이냐에 따라 우리 쪽 대응이 달라져.”

점차 커지는 최 사장의 목소리에 수희도 덩달아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16551836388223.jpg“사실 아니에요. 저 임신 안 했어요.”

16551836330983.jpg“그럼 이 제보자 말이 다 거짓말이라는 거야?”

있는 그대로를 말하려면 자신의 몸 상태부터 설명해야 했다. 8개월 전부터 글을 읽지 못하게 됐고,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아예 대본을 볼 수 없다고. 그래서 정신과에 들렀다가 실수로 산부인과에서 내린 거라고. 아주 간단하고 쉬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꺼내기 쉬운 말인 건 결코 아니었다.

16551836388223.jpg“저 날 <침수> 회식 때문에 철용 오빠랑 통화한 거예요.”

결국 최 사장에게 정신과를 다닌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자신의 가장 나약한 부분을 여러 사람과 나누기 싫었다. 또한 무엇보다 자신에게 모든 기대를 걸고 있는 사람에게 절망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16551836418217.jpg“맞아요, 사장님. 저 사람 통화 내용만 듣고 대충 짐작해서 떠드는 것 같아요.”

억울한 수희를 위해 철용이 한마디 거들고 나섰다.

16551836330983.jpg“그러니까, 수희 네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거지.”

최 사장이 다시 한번 사실 여부를 짚고 넘어가자 수희가 확고하게 뜻을 밝혔다.

16551836388223.jpg“사장님, 증거도 없이 떠드는 말을 믿으세요?”

16551836330983.jpg“그래. 수희 네가 그럴 리가 없지.”

6년 동안 사생활 문제로 속 한 번 썩인 적 없는 수희였다. 그런 수희를 의심했다는 사실에 최 사장은 뒤늦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최 사장은 수희를 전적으로 믿기로 하고 옆에 서 있던 양 비서에게 지시했다.

16551836330983.jpg“양 비서, 유튜브 영상 전부 허위 사실이고, 명예 훼손으로 법적 대응 하겠다고 내보내.”

16551836330983.jpg“알겠습니다.”

양 비서가 나가고 나자 최 사장이 손깍지를 끼며 다부진 목소리를 냈다.

16551836330983.jpg“이럴 때일수록 네가 보란 듯이 복귀하면 조용해질 거야.”

사실 오늘 최 사장을 찾은 건 은퇴를 알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 은퇴하겠다고 한다면, 최 사장은 분명 자신이 임신했다 믿을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꼬이게 되었으니 은퇴한다는 말이 떨어질 리 없었다. 은퇴를 선언한다고 하더라도 잘못된 루머를 바로잡은 뒤여야 했다.

16551836388223.jpg“지금 당장 복귀할 생각 없어요.”

최 사장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16551836330983.jpg“보, 복귀할 생각이 없다니.”

16551836388223.jpg“좀 더 쉬고 싶어요. 작품은 그다음에 할게요.”

담담한 어조와는 달리 수희의 속은 썩어 나가는 중이었다. 최 사장이 자신을 금이야 옥이야 아껴 줬기에 더욱 말하기가 힘들었다.

16551836330983.jpg“네가 그동안 힘들었던 거 알아. 그래서 8개월을 쉬게 놔뒀던 거고.”

어떻게든 최 사장은 수희를 설득하려 노력했다.

16551836330983.jpg“그만큼 쉬었으면 이제 복귀해야지.”

자신이 다시는 연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매번 마주하고 있었다. 대사 하나 읊지 못하는 배우가 작품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지금 당장 작품에 들어간다면 모든 게 들통날 게 뻔했다.

16551836388223.jpg“죄송해요, 사장님. 무슨 말씀을 하셔도 제 마음 안 변해요.”

얼이 빠져 버린 최 사장에게 사과만 남기고 수희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16551836330983.jpg“아직 말 안 끝났는데, 어디 가.”

최 사장이 급히 수희를 붙잡으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16551836388223.jpg“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다 했어요. 가 볼게요.”

16551836330983.jpg“수희야. 오수희!”

등 뒤로 몇 번이나 자신의 이름이 날아왔지만 수희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사장실 앞에 있는 엘리베이터에 타자 허둥지둥 철용이 따라 몸을 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철용은 수희의 눈치만 살폈다. 지하에 세워 둔 밴에 올라탄 수희가 앞에 탄 철용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철용은 안전띠를 매며 일부러 너스레를 떨었다.

16551836418217.jpg“이런 루머는 강경 대응 한다고 하면 쏙 들어갈 거야. 그러니까 걱정할 거 없어.”

16551836388223.jpg“걱정 안 해. 어차피 사실도 아니니까.”

차분하게 대답하던 수희는 룸미러에서 철용의 눈길이 떨어지자마자 눈꺼풀을 닫았다. 말도 안 되는 소문만 정리된다면 예정대로 은퇴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적을 바라고 있었다. 다시 연기할 수 있는 기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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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51836447895.jpg“대표님.”

휴대폰을 손에 든 차 비서가 허겁지겁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차 비서가 꺼낼 말이 무엇인지 안다는 듯 승조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16551836476959.jpg“보고 있어.”

동굴처럼 낮게 울리는 음성에 차 비서는 발뒤꿈치에 힘을 줘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승조의 모니터에는 수희의 임신을 폭로한 유튜버의 동영상이 틀어져 있었다. 조회 수는 이미 세 시간 만에 20만 회를 넘어서고 있었다. 스크롤을 아래로 내린 승조가 줄줄이 엮인 댓글들을 확인했다. [역시 연예인들 이미지 믿는 거 아님. 근데 나는 처음부터 오수희 안 믿었음.] [얼마 전에 오수희 미혼모들도 후원하지 않았나? 헐. 설마 이런 이유로?] [솔직히 이분 동영상 재밌음ㅋㅋㅋ 끝까지 파헤쳐 줘요!] 툭, 툭, 툭. 승조의 마우스가 ‘싫어요’ 버튼을 차례로 눌렀다. 잘못된 소문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중요한 건 진실 공방이 아닐 것이다. 자신들의 흥미를 자극할 수 있는 놀잇거리가 필요할 뿐이었다. 차 비서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는 승조를 살폈다. 그가 수많은 댓글에 일일이 ‘싫어요’를 누르고 있다는 건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16551836447895.jpg“이거 사실일까요.”

끊임없이 이어진 댓글에 결국 승조가 마우스를 놔 버렸다.

16551836476959.jpg“사실이든 아니든,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말과는 달리 삽시간에 퍼지는 수희의 루머에 온 신경이 꽂혀 있었다. 수희의 최측근도, 그렇다고 회사 관계자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수희에게 마음이 쓰이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자신에게 누군가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했을 때 나타났던 사람이 바로 수희였다. 그랬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척, 들리지 않는 척 있을 수가 없었다.

16551836447895.jpg“내일모레 오후 1시에 오수희 씨랑 미팅 있는데 그건 진행할까요?”

16551836476959.jpg“기획사 쪽에서 취소한다고 연락 온 게 아니면 그대로 진행해.”

차 비서는 연신 승조의 표정을 살피기 바빴다.

16551836447895.jpg“대표님 괜찮으시죠?”

16551836476959.jpg“뭐가.”

생각을 읽을 수 없을 만큼 승조의 음성은 무미건조하기만 했다.

16551836447895.jpg“오수희 씨 좋아하지 않으셨습니까.”

16551836476959.jpg“그 이야기 계속할 거야?”

다분히 귀찮다는 기색이 어투에 묻어 나왔지만 차 비서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의욕이 충만하다 못해 넘쳐흘렀다.

16551836447895.jpg“대표님이 원하신다면 제가 유튜버 제보자 상세히 알아보겠습니다.”

16551836476959.jpg“차 비서.”

차 비서가 두 눈에 잔뜩 힘을 실었다.

16551836447895.jpg“네! 말씀만 주세요!”

16551836476959.jpg“나가.”

차갑디차가운 승조의 응대에 차 비서가 조용히 집무실 문을 열고 나갔다. 홀로 남은 승조는 다시 한번 영상을 재생했다. 소리가 스피커를 빠져나오고 있음에도 귓가에 한 글자도 들어오지 않았다. 문득, 일주일 전에 수희가 했던 말이 되살아났다.

16551836388223.jpg“죄송하지만, 은퇴할 거예요.”

네가 은퇴하겠다는 이유. 설마…… 이거 때문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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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틀 후. 밴 뒷좌석에 앉아 있던 수희는 차가 세워지자 좌석에서 등을 떼어 냈다.

16551836388223.jpg“도착했어?”

철용은 죄라도 지은 것처럼 수희와 눈을 맞추지 못했다. 옹졸하게 입술을 오므린 철용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정된 잡지 촬영을 온 건데, 차 안의 공기가 무겁기만 했다. 밴에서 내린 수희는 제 앞에 놓인 높다란 건물에 압도되고 말았다. ‘스튜디오 그린’. 건물 가장 위에 박힌 상호를 보고 수희는 현실을 직감했다. 뭔가 잘못됐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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