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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이 아빠가 누굽니까 (5/118)

5. 아이 아빠가 누굽니까2022.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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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도적인 높이를 자랑하는 건물을 올려다보던 수희가 뒤를 돌아보았다.

16551836576659.jpg“촬영장이 같은 건물에 있는 거지?”

막 운전석에서 내린 철용이 자신의 죄를 아는 건지 우물쭈물했다.

16551836576663.jpg“그게, 수희야.”

16551836576659.jpg“나 오늘 스튜디오 그린이랑 미팅 진행하는 거 아니지?”

당장 바른대로 고하라는 듯 수희의 눈이 냉정한 빛을 띠었다.

16551836576663.jpg“사장님한테 미팅은 다음으로 미루자고 했는데, 너 억지로라도 미팅 데려가라고 하셔서…….”

잡지 촬영은 그저 수희를 불러내기 위한 미끼였다. 말끝을 흐리는 철용이 잘못한 게 뭐가 있나 싶었다. 매니저로서의 본분을 다했을 뿐이고, 갑이 수희가 아니라 최 사장일 뿐이었다. 여기서 수희가 펄펄 뛰며 폭주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몇 번이고 최 사장은 수희의 복귀를 위해 승조 앞에 앉히려 할 게 분명했다.

16551836576659.jpg“대본 마음에 안 들면 바로 나올 거야.”

결국 백기를 든 수희가 건물로 향했다. 우중충했던 얼굴을 한순간에 밝힌 철용이 후다닥 수희의 옆에 붙었다. 수희가 건물 입구에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모였다. 몇몇은 휴대폰을 들어 사진을 찍기도 했고, 몇몇은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며 좋아했다. 수희는 기다리고 있던 안내 데스크 직원이 나타나자 그 뒤를 따랐다.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제 앞을 지나가는 수희의 한 곳만 쳐다봤다. 원피스를 입고 있는 수희의 배였다.

16551836576679.jpg“배 봐봐. 임신한 거 같진 않은데?”

16551836576679.jpg“요새 복대 얼마나 잘 나오는데. 감출 수도 있지.”

그들은 못 들을 거라 여겼지만 작은 속삭임조차 수희의 귀에 낱낱이 박혔다. 동요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 수희는 팔짱을 끼며 여유로워 보이려 노력했다. 직원이 엘리베이터 앞까지 안내해 주자 수희가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수희가 다물고 있던 입술을 떼어 냈다.

16551836576659.jpg“내 임신 스캔들이 그렇게 심각해?”

수희는 이틀 동안 휴대폰을 꺼둔 터라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고 있었다. 사실대로 말할까 말까 고심하던 철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16551836576663.jpg“유튜브 말고도 익명 카페에 목격담이 올라와서 더 시끄러워졌어.”

16551836576659.jpg“목격담?”

16551836576663.jpg“응. 네가 산부인과에서 어떤 남자랑 있는 걸 봤다나 봐.”

금방 잠잠해질 것 같던 소문은 손쓸 틈 없이 범위를 넓혀만 가고 있는 듯했다. 성가신 일에 휘말린 수희는 머리까지 지끈거렸다.

16551836576659.jpg“유튜브 영상은? 내려갔어?”

16551836576663.jpg“생방송으로도 계속 내보내고 있어서 완전히 막는 건 어려울 것 같아.”

조회 수에 따라 수익을 창출할 테니 쉽사리 놓아줄 리 없었다. 살점이 다 뜯기고 나서 뼈만 남아야 비로소 버릴 것이다.

16551836576663.jpg“너무 신경 쓰지 마. 곧 잠잠해질 거야.”

16551836576659.jpg“그렇겠지. ……곧 조용해지겠지.”

말도 안 되는 뜬소문에 당해 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평소 같았다면 별 타격감 없이 지나갔을 것이다. 하나 정신적으로 힘든 지금 시점에서는 작은 돌멩이 하나가 큰 파동을 불러왔다. 대표실이 있는 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직원의 연락을 받은 건지 차 비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16551836605389.jpg“대표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손등을 바닥으로 눕힌 차 비서가 먼저 앞장서 갔다. 긴 복도의 끝에 대표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두어 번 노크를 한 차 비서가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알렸다.

16551836605389.jpg“오수희 씨 오셨습니다.”

차 비서가 옆으로 비켜서자 수희가 대표실로 발을 들여놓았다. 사방이 통유리여서인지 탁 트인 대표실 안으로 햇살이 고스란히 쏟아졌다. 일주일 하고도 이틀 만에 다시 보는 승조는 전과 다를 바 없었다.

16551836605404.jpg“다시 봐서 반갑습니다, 오수희 씨.”

멀리서도 눈에 띌 만큼 깊고 진한 눈매도, 남자치고 결점 없이 깨끗한 피부도. 따끔따끔. 그의 시선이 오랫동안 닿아 있다는 걸 깨닫고 목소리를 냈다.

16551836576659.jpg“반갑습니다.”

16551836605404.jpg“앉죠.”

수희는 승조가 눈짓한 기다란 초록빛 소파에 앉았다. 대각선 자리에 있는 1인용 소파에 앉은 승조가 안부를 물었다.

16551836605404.jpg“그동안 잘 지냈습니까?”

잘 지낼 리가 없다는 걸 안다. 저번에 만났을 때와 달리 눈동자는 그림자가 진 것처럼 어둡기만 했다. 꾸역꾸역 입꼬리를 들어 올리는 것도 승조의 눈엔 전부 보였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 이 자리에 끌려 나왔다는 걸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16551836576659.jpg“잘 지냈어요, 덕분에.”

소리 없이 웃는 수희에게서 눈길을 뗀 승조가 차 비서에게 지시했다.

16551836605404.jpg“준비한 대본 가져와.”

대본이라는 말에 수희는 남몰래 입술 안쪽의 여린 살점을 깨물었다. 곧 테이블 위에 세 개의 대본이 놓였다.

16551836605404.jpg“오수희 씨한테 어울릴 만한 역할들로 뽑아 봤습니다.”

잠자코 있는 수희의 옆에서 철용이 호들갑을 떨었다.

16551836576663.jpg“김시운 작가님 작품도 있네요.”

극본상이란 상은 전부 다 휩쓸며 흥행성과 작품성 모두 인정받는 작가 중 한 명이었다. 수희 역시 기회만 된다면 김시운 작가의 작품을 해 보고 싶었다. 8개월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16551836605404.jpg“나머지 두 작품 역시 완성도가 높습니다.”

승조의 손끝이 대본을 수희 쪽으로 밀어냈다. 대본이 시야 안쪽을 점령해 오자 찰나에 동공이 흔들렸다. 대본 앞면에 적힌 제목을 봤을 뿐인데 물결치듯 눈앞이 일렁거렸다. 지문과 대사 한 줄 읽지도 않았는데 글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질했다. 한동안 이렇게 심각하게 반응했던 적이 없기에 더욱 혼란스러웠다.

16551836576659.jpg‘이틀 동안 약을 안 먹어서 그런 건가.’

정신과에서 받아 온 일주일 치 약은 전부 먹은 상태였다. 다시 약을 받기 위해 병원에 들러야 했지만 사람들의 눈이 신경 쓰여 가지 못했다. 약에 의지하지 않으니 몸은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16551836576663.jpg“수희야, 대본 보기만 해 봐.”

승조가 직접 대본까지 골라 주었으니, 철용은 그에 상응하는 태도를 보여야 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대본을 집어 들어 수희의 눈앞에 펼쳤다. 그러자 수희는 아주 잠깐인데도 불구하고 빽빽이 박힌 글자들이 자신을 덮치는 듯했다. 울렁울렁. 마치 배를 탄 것처럼 세상이 빙빙 도는 것만 같았다. 눈을 질끈 감은 수희가 이마를 붙잡으며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대본을 피하는 수희를 보며 철용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16551836605404.jpg“오수희 씨랑 둘이 있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고개를 숙인 수희의 머리 위로 승조의 말이 내려앉았다. 철용은 삽시간에 바뀌어 버린 분위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16551836576659.jpg“그래, 오빠. 대표님이랑 나랑 둘이서 이야기하고 싶으니까 나가 있어 줘.”

등에 식은땀이 날 만큼 몸에 힘이 풀린 수희는 일어설 수도 없었다. 차라리 철용을 밖에 내보내고 속을 진정시키는 게 낫겠다 싶었다. 차 비서는 어느새 문을 열고 철용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6551836576663.jpg“나, 그럼 밖에 있을게.”

수희까지 둘이 있겠다고 하니 더 자리에 붙어 있을 이유가 없었다. 차 비서와 철용이 대표실을 나가자 마침내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한참 두 눈을 감고 있던 수희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16551836576659.jpg“죄송해요. 오늘은 제가 몸이 안 좋네요.”

16551836605404.jpg“병원은 다녀왔습니까?”

단순히 걱정하는 말투에 수희가 눈꺼풀만 깜박였다.

16551836605404.jpg“저번보다 얼굴이 좋지 않아 보여서 하는 말입니다.”

16551836576659.jpg“갑자기 몸살 기운이 돌아서 그래요.”

거짓말을 능숙히 입에 담으면서 수희는 대본 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아직도 창백하기만 한 수희의 뺨을 보며 승조가 말문을 열었다.

16551836605404.jpg“은퇴할 거라던 이유.”

16551836576659.jpg“…….”

16551836605404.jpg“임신 때문이었습니까?”

명명백백한 거짓 영상을 모두 진실이라 믿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숨겨진 진실보다는 재밌는 볼거리에 관심을 가지는 법이니까. 하지만 승조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라는 걸 깨닫자 비아냥조로 말이 나오고 말았다.

16551836576659.jpg“유튜브 영상에, 목격담에. 홑몸인 사람을 임산부로 만드는 거 쉽네요.”

하지만 승조는 단지 뜬소문만으로 의구심을 가진 게 아니었다. 아주 잠깐의 미팅도 버겁다는 듯 수희는 어깨를 떨고 있었다. 단순히 몸살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얼굴은 백지장보다 하얬다. 몸 상태와 일련의 상황들을 종합해 봤을 때, 은퇴의 개인적 사유가 임신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16551836605404.jpg“나한테는 사실대로 말해도 됩니다.”

하.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16551836576659.jpg“내가 당신의 뭘 믿고요.”

수희의 말에 틀린 건 없었다. 자신은 수희를 기억할지라도, 수희는 완전히 자신을 잊었다. 오히려 다가서려는 자신에 대한 괜한 경계심만 불러일으키는 걸지도 모른다.

16551836605404.jpg“알고 있습니다, 오수희 씨가 나 못 믿는 거.”

16551836576659.jpg“한승조 대표님.”

어쩌다 보니 승조에게 휘말리는 듯한 기분이 들어 수희가 말을 막았다.

16551836576659.jpg“믿고 못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저 임신 아니에요.”

16551836605404.jpg“…….”

16551836576659.jpg“제가 왜 변명 같은 걸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한껏 목소리를 낮추며 진지하게 구는 승조를 보니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 나갔다. 더는 할 말이 없었던 수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16551836576659.jpg“돌아가 볼게요.”

이대로 미팅이 끝난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힘겹게 버텨 내던 수희가 안심하기도 전이었다.

16551836605404.jpg“대본, 가져가서 읽어 보세요.”

무의식적으로 승조의 손에 들린 대본을 보고 수희는 입을 틀어막았다. 틀림없이 이 정도면 안정됐다고 여겼는데 무언가 속에서 밀고 올라왔다.

16551836576659.jpg“우욱!”

대본 위에 적힌 제목들이 이리저리 뒤엉켰다. 입을 틀어막은 수희의 다리가 힘을 잃자 승조가 본능적으로 팔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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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836605404.jpg“괜찮습니까, 오수희 씨?”

바로 옆에 있는 승조의 음성이 아주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작아졌다. 부축하려 드는 승조의 팔을 밀어내며 수희가 대표실을 뛰쳐나갔다. 아까와는 달리 참을 수 없는 구역질이 올라왔다. 황급히 대표실을 나오는 수희를 보고 사무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철용이 깜짝 놀랐다.

16551836576663.jpg“수희야! 왜 그래!”

입을 막은 채 사무실 밖을 뛰쳐나가는 수희의 뒤를 철용이 따라가려 했다.

16551836605404.jpg“내가 가겠습니다.”

뒤이어 대표실을 나온 승조가 나서려는 철용을 말렸다. 사무실 문이 닫히고 철용은 잠시 망설이다가 발을 떼어 냈다. 그러나 한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차 비서의 손에 붙잡혔다. 차 비서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16551836605389.jpg“대표님께서 가겠다고 하셨으니까 저희는 여기서 기다려 보죠.”

16551836576663.jpg“그래도…….”

16551836605389.jpg“별일 아닐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차 비서의 눈치 하나는 누구보다 빨랐다. 지금 수희와 승조를 방해하면 안 된다는 걸 단숨에 알아차렸다. 이것이 가끔 선을 넘을 듯 말 듯 굴어도 오랫동안 승조 옆에 남을 수 있는 이유였다. 무릎을 꿇은 채 변기를 붙잡은 수희의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 근 며칠 동안 먹은 게 없으니 나오는 게 있을 리 만무했다. 비틀리는 속에 인상을 찌푸린 수희가 무릎을 털고 일어섰다. 변기 레버를 내리고 화장실을 나와 세면대 앞에 섰다.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은 형편없었다. 푸석한 살갗에 빨개진 눈가. 누가 봐도 아픈 사람처럼 보였다.

16551836605404.jpg“은퇴할 거라던 이유, 임신 때문이었습니까?”

임신을 의심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 헛구역질을 하다니. 최악이었다.

16551836576659.jpg“어차피 이제 만날 일도 없잖아.”

헛구역질하며 대표실을 뛰쳐나오긴 했지만, 승조가 자신을 따라 나오진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승조에게 자신은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고 여겼다. 세면대에 물을 틀어 까끌까끌한 입 안부터 씻어 냈다. 핸드 타월로 입가와 손을 닦아 낸 수희가 숨을 골랐다. 비록 최악의 상황까지 오게 됐지만, 더 물러날 곳도 없으니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한승조가 뭐라 생각하든 그건 상관없었다. 더는 엮이지 않으면 되니까.

16551836576659.jpg“후우.”

긴 숨을 몰아쉬고 다 쓴 핸드 타월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화장실 문을 열어 두 발을 밖으로 내딛자마자 뒤로 움찔 물러섰다.

16551836576659.jpg“왜 여기 있어요?”

대표실에 있을 줄 알았던 승조가 화장실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희는 저도 모르게 주변부터 살폈다.

16551836605404.jpg“이 층에 사람들 없습니다.”

수희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직원들을 전부 내보낸 상태였다. 짙게 내려앉는 승조의 눈빛에 수희가 입술을 떼려던 찰나였다. 많은 고민을 더 한 듯 승조가 진중하게 목소리를 냈다.

16551836605404.jpg“아이 아빠가 누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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