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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당신이 책임을 왜 져요 (6/118)

6. 당신이 책임을 왜 져요2022.02.19.

16551836808723.jpg“아이 아빠가 누굽니까.”

헛구역질 한 번에 이 남자의 오해의 벽은 더 단단해지고 견고해졌다. 배우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 순순히 사실을 밝히지 않는 거라 짐작하는 게 분명했다. 드러난 정황들이 임신만을 가리키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갑자기 피곤이 몰려온 수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이나 임신이 아니라고 밝혀도 승조는 믿지 않을 것 같았다.

16551836808728.jpg“거짓말이 아니라 몸이 안 좋아져서 헛구역질한 거예요.”

진실을 말하고 있는데도 승조의 눈에 설핏 안쓰러움이 깃든다. 역시나 승조는 조금도 믿지 않았다.

16551836808728.jpg“정말 아니라니까요?”

목소리를 높이니 오히려 비밀을 들켜 발끈하는 걸로 보였다.

16551836808723.jpg“오수희 씨를 책임질 수 없는 사람이라서 숨기는 겁니까?”

미치고 팔짝 뛰겠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였구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수희는 그냥 이대로 오해하게 놔둘까 했다. 그러나 항간에 떠돌고 있다는 목격담이 수희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혹시나 승조가 연예계 관계자들에게 오늘 일을 흘린다면……. 상상만으로 아찔했다.

16551836808728.jpg“전혀 아니에요. 지금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고 계세요.”

진정하고 승조를 설득해 보려 했지만, 이미 그는 오해의 강을 건넌 후였다. 완강한 수희의 부정에도 승조는 아주 깊은 고민의 늪에 빠져 있었다.

16551836808728.jpg“저기요, 대표님.”

사람을 앞에다 두고 무슨 생각을 저렇게 하나 싶어 수희가 손을 들어 올렸다. 시야 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이는데, 승조가 수희의 손을 붙잡아 내렸다. 그리고 진지함이 한 스푼 더 얹어진 음성이 승조의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16551836808723.jpg“내가 책임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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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끗했던 수희의 눈썹 사이에 점차 진한 주름이 새겨졌다.

16551836808728.jpg“뭐…… 뭐요?”

16551836808723.jpg“내가 오수희 씨 책임지겠다고 했습니다.”

두 귀는 멀쩡하기에 잘못 들어서 묻는 말이 아니었다. 단지 뜻을 이해하지 못해 물은 말이었다. 수희는 승조의 손끝이 떨어진 손을 제 가슴팍 위에 얹었다.

16551836808728.jpg“당신이 책임을 왜 져요.”

수희의 얼굴 위에 여러 가지 감정이 다채롭게 뒤섞였다. 당황스럽고, 놀랍고, 황당한. 그에 비해 승조의 말투와 표정은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16551836808723.jpg“오수희 씨가 출산 후에도 무사히 복귀할 수 있게 도와주겠습니다.”

그러니까 책임지겠다는 건 수희 아이가 아니라 수희의 복귀를 말하는 거였다. 수희는 그제야 자신이 착각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16551836808723.jpg“배우들 출산 후에 작품 복귀 어려워지는 거 압니다.”

16551836808728.jpg“…….”

16551836808723.jpg“하지만 오수희 씨라면 연기 폭이 더 넓어졌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이 남자는 철저히 수희에게 비즈니스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짜고짜 자신을 책임진다고 했을 땐, 자신에게 사심이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안에 숨어 있던 건 순수한 의도였다. 잠자코 승조의 말을 듣고 있던 수희가 입술을 뗐다.

16551836808728.jpg“궁금한 게 있어요.”

16551836808723.jpg“뭡니까.”

이렇게 자신을 높이 평가해 주는 제작사는 없었다. 전부 자신을 돈과 인기로 평가하던 사람들뿐이었다. 껍데기로 사랑받는 직업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승조는 달랐다. 그 당연한 순리를 거스르며 수희의 불확실한 미래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16551836808728.jpg“대표님은 제가 뭐라고 이런 제안을 하세요?”

어쩌면 승조는 과거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옛 기억에 사무쳐 위기에 허우적대는 수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상대방이 기억도 못 하는 그 옛날 일이 뭐라고 이리 얽매이냐고. 네가 그 사람 인생에서 중요하지 않기에 잊은 거 아니겠냐고. 그런데 내가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다. 너무나 생생해 아직도 그녀가 자신에게 한 말을 전부 기억하고 있을 만큼. 수희에게 모든 걸 말할 수 있었지만, 때가 있다면 오늘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니 지금은.

16551836808723.jpg“오수희 씨 팬이라서라고 해 두죠.”

네 팬으로 남아야겠다고 판단했다.

16551836808728.jpg“팬이라서……. 단지 그거 때문이라고요?”

16551836808723.jpg“네, 오수희 씨 팬이라서.”

단순히 팬, 그 이유만으로 내게 호의를 베풀어 왔다. 의문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 수희가 다시 말문을 열려던 찰나였다.

16551836865341.jpg“수희야, 괜찮아?”

아무리 기다려도 수희가 오지 않자 철용이 찾아왔다. 대화의 마무리를 짓지 못한 수희가 승조와 철용을 번갈아 바라봤다.

16551836808728.jpg“어, 괜찮아.”

16551836865341.jpg“갑자기 안색이 안 좋길래 놀랐잖아. 병원 갈까?”

16551836808728.jpg“병원 갈 정도는 아냐. 집에서 쉬면 될 것 같아.”

급하게 사무실을 뛰쳐나갔을 때와는 달리 수희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온 뒤였다. 억지로라도 수희를 병원에 데려갈까 했지만, 괜히 사람들 눈에 띄면 논란만 더 가열될 듯했다.

16551836865341.jpg“집에 가서 쉬다가 안 좋아지면 바로 연락해.”

16551836808728.jpg“그럴게.”

16551836865341.jpg“어서 가자.”

철용이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며 앞장서 걸었다. 발길을 돌리려던 수희가 망설이자 승조가 운을 뗐다.

16551836808723.jpg“오늘 못다 한 이야기는 다음에 마저 하죠.”

원한다면 얼마든지 수희를 다시 만날 수 있다. 그럴 명분을 만들려고 거금을 들여 스튜디오 그린을 사들였다.

16551836865341.jpg“수희야, 얼른 와.”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붙잡고 있던 철용의 부름에 수희가 걸음을 떼어 냈다. 등 뒤로 승조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돌아보지 않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철용이 물어 왔다.

16551836865341.jpg“대표님이랑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한 거야?”

16551836808728.jpg“별 이야기 아니었어.”

한승조 대표가 자신을 책임지겠다고 했다고 말하면 철용은 목덜미를 붙잡고 쓰러질 것이다.

16551836865341.jpg“너 요즘 들어 나한테 숨기는 게 많은 것 같아.”

의혹을 품은 눈초리가 수희를 향했지만, 그간 쌓아 놓은 연기 실력으로 무표정을 유지했다.

16551836808728.jpg“내가 뭘 숨기는 게 있다고 그래.”

16551836865341.jpg“없으면 됐어.”

넘겨짚어 봤던 철용은 금방 의심의 촉을 거뒀다. 이후 철용이 주저리주저리 말을 걸어 왔지만, 수희의 귓가에는 한 가지 말만 맴돌았다.

16551836808723.jpg“내가 책임지겠습니다.”

얼마나 오래된 팬이길래 탈덕한다는 말보다 책임진다는 말이 먼저 나와. 책임진다는 말이 쉬운 사람이야, 아니면 날 책임질 만큼 좋아하는 거야. 여기서 좋아한다는 건 팬심.

16551836808723.jpg“내가 오수희 씨 책임지겠다고 했습니다.”

뭐가 됐든.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빙빙. 한참 동안 승조가 했던 말이 수희의 귓전을 떠돌아다녔다. ***

16551836894208.jpg“오수희 씨랑 이야기는 많이 나누셨습니까?”

승조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자 차 비서가 기다렸다는 듯 옆에 붙었다. 대답이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승조는 흔한 끄덕임조차 보이지 않았다. 익숙한 반응이라는 듯 차 비서가 대표실 문을 열어 주자 승조가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대표실 소파에 앉은 승조가 테이블 위에 얹어진 대본을 짚었다.

16551836808723.jpg“이 대본들 오수희 씨 기획사로 보내.”

16551836894208.jpg“알겠습니다.”

16551836808723.jpg“그리고.”

뭔가 지시할 사항이 더 있는 듯 승조가 느리게 말을 덧붙였다.

16551836808723.jpg“전에 차 비서가 말했었지. 유튜버 제보자, 알아볼 수 있다고.”

차 비서는 입가를 비집고 나오려는 미소를 숨겼다.

16551836894208.jpg“당연히 알아볼 수 있습니다.”

16551836808723.jpg“최대한 빨리 제보자 관련된 정보 알아봐 줘.”

이내 흐뭇한 미소가 흘러나온 차 비서가 슬쩍 말을 던졌다.

16551836894208.jpg“역시 오수희 씨가 신경 쓰이시는 거죠?”

16551836808723.jpg“…….”

16551836894208.jpg“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셔서 나서시려는 거죠?”

일이라도 못했더라면 승조는 당장 차 비서를 잘랐을 것이다. 눈치 하나로 먹고사는 차 비서가 따가운 승조의 시선에 제 입을 두드렸다.

16551836894208.jpg“제가 말이 너무 많았네요.”

16551836808723.jpg“쓸데없는 말이 많았지.”

16551836894208.jpg“나가 보겠습니다.”

테이블 위에 있는 대본을 주섬주섬 챙긴 차 비서가 대표실을 나갔다. 차 비서가 떠나고 나서야 대표실 안이 고요에 잠겼다. 소파에 등을 기댄 승조는 당혹스러운 얼굴을 감추지 못했던 수희를 떠올렸다.

16551836808728.jpg“당신이 책임을 왜 져요.”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제껏 자신과 아무런 접점이 없던 사람이 책임지겠다고 나섰으니. 승조는 오랜 시간 수희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좀 더 일찍 네 앞에 나타날 걸 그랬다. 네게 남자도, 아이도 있을 줄이야. 무언가를 바라지 않고 네 앞에 나타났던 건데. 사실은 네가 나를 알아봐 주길, 기다리고 있었길 바랐나 보다.

16551836808723.jpg“너무 늦었나.”

공허한 목소리가 대표실 안에 희미하게 퍼졌다. *** 수면 유도제를 먹고 느지막이 침대에 누운 수희는 억지로 잠자리에 들었다. 뜬눈으로 뒤척거리던 수희는 새벽이 찾아오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했던 어둠이 걷히더니 학교 운동장이 펼쳐졌다. 덩그러니 운동장에 떨어진 수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16551836949544.jpg“꺄하하하.”

쾌활한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여자아이가 미끄럼틀을 타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온 여자아이는 다름 아닌 수희, 자신이었다. 현재가 아닌 과거의 자신은 열세 살, 아니 그것보다 더 어려 보였다. 미끄럼틀에서 내려온 어린 수희는 그네가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그네에는 중학생으로 보이는 한 남자아이가 교복을 입고 앉아 있었다. 좀 더 자세히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흐릿한 안개가 뒤덮인 것처럼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끼익, 끼익. 쇳소리가 나는 그네를 멈추고 남자아이가 수희에게 무어라 말했다. 어린 수희는 볼에 바람을 빵빵하게 넣고 툴툴거렸다. 둘의 대화를 더 자세히 듣고 싶어 꿈속에서 귀를 기울였다. 그 순간 힘찬 꼬마 수희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16551836949544.jpg“내가 책임지면 되지!”

저 쪼끄마한 게 뭘 책임진다는 거야. 발끈한 수희가 입술을 벙긋거려 보지만 어린 수희에게는 소리가 닿지 않는 듯했다.

16551836949544.jpg“내가 오빠 책임질게.”

두 손을 허리에 떡하니 얹은 어린 수희가 턱 끝을 들어 올렸다. 저 나이에는 객기로 산다지만, 남자애한테 별말을 다 한다 싶었다.

16551836949544.jpg“너는 책임진다는 뜻이 뭔지 알아?”

그래, 잘한다! 수희가 묻고 싶은 말을 교복을 입은 남자아이가 대신 해 주었다. 그러자 당연하다는 듯 어린 수희가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연 저 요망한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수희는 두렵기까지 했다.

16551836949544.jpg“응, 내가 오빠랑 결혼해 주겠다고.”

콰과과광. 꿈속이라서 가능한 건지 머리 위에서 벼락이 떨어진 것 같았다. 당장 저 입을 막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발끝 하나 움직여지지 않았다. 막지 못한 입은 여전히 조잘조잘 떠들어 대고 있었다.

16551836949544.jpg“그러니까 승조 오빠는 걱정하지 마.”

승조 오빠?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에 수희는 얼이 빠져 버렸다. 그 순간, 남자아이의 하얀 교복 왼쪽에 박힌 파란색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 한승조. 띠띠띠띠― 알람 소리가 귓전을 때리자 수희가 등에 용수철을 단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혼란에 사로잡힌 수희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신경 쓸 틈도 없었다. 오히려 손을 들어 올려 제 머리카락 사이에 손가락을 욱여넣었다.

16551836808728.jpg“뭐야.”

꿈이라기에는 너무나 생생해 과거를 회상하고 돌아온 것만 같았다. 머리카락을 쥐어뜯던 수희는 제 입을 손으로 가렸다.

16551836808728.jpg“승조 오빠? 한승조?”

수희가 아는 승조는 딱 한 명이었다. 바로 어제 자신을 책임지겠다고 폭탄선언을 날렸던 한승조. 그런데 그 한승조가 왜 여기서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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