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평생 보답하면서 살게2022.02.22.
수희는 멍한 눈으로 세면대 앞에 서서 기계적으로 이를 닦고 있었다. 어린 자신의 모습은 익숙했지만, 남자아이가 누구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수희가 기억하고 있는 과거의 시작은 열세 살, 그쯤부터였다. 그 이전의 기억들은 되짚어가 봐도 떠오르는 것들이 없었다. 그건 아마 자신의 어머니인 고애란 때문일 것이다.
“다 잊어. 너한테 필요 없는 것들이잖아.”
명령조로 세뇌를 일삼던 애란의 목소리에 수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입에 머금고 있던 하얀 거품을 뱉은 수희가 찬물로 입안을 씻어 냈다. 세면대 레버를 내리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린 듯 선명했더라도 그저 꿈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머릿속에 맴도는 건, 그간 중요한 것을 잊고 산 것처럼 느껴져서였다. 한승조, 어쩌면 내 잃어버린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사람은 아닐까. Rrrrr― 생각에 잠겨 있던 수희는 휴대폰 벨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수건으로 대충 손을 닦아 내곤 세면대 위에 있는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철용인 걸 확인하고 수희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오빠.”
[수희야. 나 밑에 도착했어.]
“30분 안에 내려갈게.”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원래 있던 자리에 내려 두었다. 그리고 박혀 있던 상념을 떨쳐 내려 수희가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잊자, 잊어.”
수희는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릿속에 과거인지 확실치도 않은 꿈이 자리 잡게 두지 않았다. *** 수희가 인천 국제공항에 나타나자 공항 안은 인파로 넘실거렸다. 기자들은 출국장으로 수희가 발을 뗄 때마다 셔터를 연이어 눌러 댔다. 번쩍이는 카메라 조명에도 수희는 익숙하다는 듯 눈꺼풀 한번 깜박이지 않았다. 임신 스캔들로 여론이 뜨거워서인지 공항을 찾은 기자들이 많았다.
“오수희 씨, 유튜브에 오수희 씨와 관련된 영상이 올라와 있는데 보셨나요?”
기자 한 명이 호기롭게 질문을 건네 왔지만 미리 고용한 경호원이 수희를 에워쌌다. 기자가 주춤대며 물러서자 철용이 그 틈을 타 수희를 데리고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수희의 뒷모습까지 놓치지 않고 찍는 기자들을 보며 철용이 한숨을 쉬었다.
“생각보다 기자들이 빨리 안 떨어져 나가네.”
“그러게. 아직도 집 앞에 기자들 있더라.”
피곤이 앉은 수희의 얼굴을 보며 철용이 들고 있던 여권과 파리행 표를 건넸다.
“그래서 어제도 잘 못 잔 거야? 파리 가는 동안에라도 푹 자.”
사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건 따라다니는 기자들보다는 은퇴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수희는 차마 아니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만 끄덕였다. 긴 시간에 걸쳐 파리로 날아온 수희는 사흘 동안 묵게 될 호텔에 도착했다. 철용은 두 손에 캐리어 손잡이를 쥐고 프런트로 몸을 틀었다.
“체크인하고 올게. 여기 조금만 있어.”
“응, 갔다 와.”
수희는 로비의 한 벽면을 차지한 수족관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대한 수족관에 시선을 빼앗겨 눈길을 떼지 못한 채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탁 트인 수족관을 보고 있자니 예민하게 곤두서 있던 신경도 누그러지는 듯했다. 부지런히 두 발을 옮기던 수희의 시야 끝에 누군가가 걸렸다. 느릿하게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수희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정말 뜬금없이 파리의 한 호텔에 나타난 사람은 한승조였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헛것을 보나 싶었다. ‘어떻게 꿈에서도 한승조, 환영도 한승조지.’ 머무는 시선을 느낀 건지 승조의 고개 역시 수희에게로 돌아갔다. 허깨비라도 보는 건 줄 알았는데 너무나 또렷한 형상을 보니 환상 같은 게 아니었다.
“한승조 대표님이 왜 여기에 있어요?”
“내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이곳에 먼저 서 있던 사람은 승조이니, 당황스러운 건 오히려 그일 것이다.
“전 일이 있어서 왔어요.”
“나도 마찬가집니다.”
“세상 참 좁네요. 서울도 아니고 파리에서 마주치고.”
“여기서 묵습니까?”
수희가 고개를 주억거리려는데 멀리서 들뜬 철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안녕하세요!”
체크인을 마친 철용이 빠른 걸음으로 승조에게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프런트에서 마주친 건지 철용의 옆에는 차 비서도 함께였다.
“비서분한테 들었어요. 여기서 묵으신다고요. 파리에서 다 만나고, 운명인가 봅니다. 하하하.”
운명은 무슨. 이런 운명이라면 피하고 싶었다. 지금 수희에게 승조는 기피 대상 1위였다. 괜히 승조와 만나게 된다면 다시 미팅 이야기가 나올까 싶어서였다. 수희는 너스레를 떨기 바쁜 철용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빠, 방 키 줘.”
“어, 여기.”
철용이 건네는 키를 받아 들고는 수희가 눈인사만 남기고 자리를 떴다. 쌩하니 사라지는 수희를 보고 철용이 급히 손을 뻗어 보았다.
“수희야, 잠깐 대화 좀 하고 가지!”
그러나 손에 잡히지 않은 수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철용도 수희를 따라 걸음을 떼야 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대표님.”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수희를 놓칠까, 철용은 후다닥 뒤에 따라붙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철용은 수희에게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 정보를 늘어놓았다.
“한 대표님도 회사 업무차 파리에 왔다나 봐. 한 대표님도 사흘 있다가 돌아간다더라.”
이번에 스튜디오 그린을 인수한 승조는 FL 패션몰 대표 이사이기도 했다. 동시에 압구정과 청담에 가장 큰 편집숍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 파리에 온 건 제작사 일 때문이 아닌 패션 회사 쪽 일 때문인 듯했다.
“그래? 제작사 일에 회사 일에, 바쁘겠네.”
별달리 관심 없는 이야기에 수희가 시큰둥하게 굴었다. 철용은 수희의 눈치를 슬쩍 살피며 말을 꺼냈다.
“그때 대표님이 준 대본은 다 읽어 봤어?”
읽을 수가 없는 대본은 TV 서랍장 안에 고이 넣어 두었다.
“읽어 봤어.”
금세 철용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땠어? 하고 싶은 캐릭터 있어? 내가 미팅 일정 잡아 둘까?”
“별로 안 끌렸어.”
“뭐? 한 작품도?”
“응. 한 작품도 하고 싶은 거 없었어.”
전혀 믿을 수 없다는 듯 철용이 입을 벌렸다. 수희는 따갑게 와 닿는 철용의 눈길에도 정면만 바라볼 뿐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피할 수만은 없다는 걸 알지만, 지금 당장 수희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촬영 내일이니까 오늘은 쉴게.”
철용이 말을 붙일 틈도 없이 수희는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 밖으로 발을 뻗었다. 엘리베이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 수희가 묵을 방이었다. 도어 록에 카드 키를 가져다 대자 꽉 다물려 있던 잠금장치가 풀렸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둥근 창밖으로 가장 먼저 보인 건 에펠탑이었다. 수희는 밤이 찾아온 파리를 뒤로하고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선잠이라도 자 보려 몸을 작게 말아 보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떴다. 몸은 너무나 지쳐 있었지만 늘 그래 왔듯이 잠은 오지 않았다.
“저녁이라도 먹어야지.”
비어 있는 배라도 채우면 잠이 올까 싶어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핸드백 안에 휴대폰과 지갑, 카드 키를 챙겨 호텔을 나왔다. 파리 밤거리는 촘촘히 박혀 있는 가로등들이 밝혀 주고 있었다. 모자를 쓸 필요가 없을 만큼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은 수희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개선문을 지나 상가가 즐비한 거리로 들어서자 사람들로 더욱 북적였다. 저녁을 먹을 만한 곳이 있는지 둘러보던 수희가 잠시 걸음을 멈춘 순간이었다. 뒤에서 걸어오던 남자의 어깨와 수희가 부딪쳤다. 다소 강한 힘에 수희의 몸이 휘청이며 옆으로 밀려났다.
“아.”
신음을 들었을 텐데도 남자는 쳐다도 보지 않고 수희를 지나쳐 갔다. 어깨에 걸쳐져 있던 핸드백이 팔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안에 있어야 할 립스틱과 파운데이션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아차 싶었던 수희가 서둘러 허리를 숙이려는데 불쑥 한 남성이 나타났다.
“안에 지갑이랑 휴대폰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갑자기 나타난 한국인이 수희를 대신해 핸드백을 주워 주었다. 그 말에 얼결에 핸드백을 열었는데, 안에 들어 있어야 할 소지품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핸드백 입구를 벌리자 바닥 부분이 일자로 쭉 찢어져 있었다.
“소매치기 맞죠?”
“네. ……설마.”
아까 부딪쳤던 사람이. 핸드백에 머물러 있던 시선을 들어 올려 점차 거리를 벌리는 백인 남자를 바라봤다. 백인 남자는 몸을 돌려 수희를 보더니, 주머니에서 지갑 하나를 꺼내 흔들었다.
“내 지갑.”
“Hey!”
수희를 도와준 남성은 백인 남자를 부르며 뛰어갔다. 백인 남자는 자신을 잡아 보라는 듯 제자리 뛰기를 하더니 곧장 뒷걸음질 쳤다.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던 수희도 찢어진 핸드백을 내팽개치고 뒤따라갔다. 하지만 하필이면 구두를 신은 탓에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소매치기를 정신없이 쫓아가다 보니 어느새 복잡한 상가들을 지나 어둑한 길가로 접어들었다. 쉬지 않고 뛰던 수희가 잠시 숨을 고른 틈에 소매치기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앞서가고 있던 남성이 우왕좌왕하더니 뒤처진 수희에게로 다가왔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소매치기범은요?”
남성은 머리를 벅벅 긁더니 도리질을 했다.
“미안해요. 놓쳤어요.”
한숨을 숨길 수 없었던 수희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하아. 아니에요.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그제야 수희는 자신이 왔던 길을 되돌아보았다. 으슥한 길목. 저 끝에 뭐가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가로등 불도 몇 없는 이곳은 마치 파리의 뒷면처럼 보였다. 무슨 일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아무도 알지 못할 것 같았다. 순간 오소소하고 팔뚝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직감적으로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늦었네요. 전 가 볼게요.”
서둘러 몸을 돌리려는데 남성이 덥석, 수희의 팔을 붙들었다. 팔목을 휘감은 손가락은 벗어날 수 없도록 꽉 옭아매고 있었다.
“어디 가려고요. 말로만 고맙다고 할 거예요?”
히죽대는 남성의 미소에 수희는 찬바람을 맞은 것처럼 표정이 굳어졌다.
“당신, 아까 그 사람이랑 한 패지.”
소매치기가 백인 남자였기에 같은 패거리일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타지에서 만난 한국인이었기에 저도 모르게 신뢰가 생겼었다. 하지만 이 남성은 그것을 이용해 수희를 인적이 드문 곳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이제 와서 알아차려 봤자 늦었다는 거 잘 알잖아요?”
수희는 제 팔에 감긴 남성의 손을 붙잡고 떼어 내려 했다. 그러자 남성은 수희를 확 끌어당기며 제멋대로 휘두르려 했다.
“이거 안 놔?”
“놔주면 도망갈 거잖아.”
일순 남성의 두 눈이 사악하게 희번덕거렸다.
“그냥 나랑 좀 놀다 가. 내가 나중에 묵고 있는 호텔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당장 이거 안 놓으면 신고할 거야!”
힘주어 목소리를 내 보지만, 남성은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누구든 구해 주세요. 내가 평생 보답하면서 살게요. 제발, 제발!’
주변을 빠르게 두리번거려 보아도 사람의 형상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지갑도 없고, 휴대폰도 없는데.”
“…….”
“어디로 가고, 어디에 전화할래?”
남성이 몸을 뒤로 빼는 수희를 억지로 안으려던 찰나였다. 뻐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눈앞에 있던 남성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얼굴을 맞은 남성은 바닥에 납작 엎어져서는 끙끙거렸다. 팔을 붙잡고 있던 남성의 손이 떨어지자마자 누군가 수희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머리카락을 흩트려 놓는 거친 숨에 수희가 턱 끝을 들어 올렸다.
“도와줄 사람은 있지.”
한승조. 또 이 남자였다. 꿈에서도, 서울에서도, 파리에서도. 요 며칠 새 자신의 머릿속에서 떠나가는 날이 없던 남자.
“이 변수는 생각 안 해 봤나 봐.”
그런데 나는 왜 이 남자를 보자마자 안도감이 밀려오는 걸까. 얼마나 급하게 뛰어온 건지 수희의 등에 크게 부푼 승조의 가슴이 닿았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괜찮아? 다친 곳은.”
승조는 수희를 자신의 앞에 세워 놓고 손끝 발끝을 샅샅이 훑어 내렸다. 하나 깊은 생각에 잠긴 수희에게는 승조의 물음이 들리지 않았다.
‘아……. 나 방금 구해 주면 평생 보답하면서 산다고 했는데.’
약속 안 지키면 벌받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