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방으로 들어와요2022.02.26.
수희가 저녁을 먹기 위해 상가를 걷고 있을 때 승조도 그곳에 함께였다. 호텔에 들르기 전에 차 비서와 이른 저녁을 먹은 터라 바람이라도 쐴 겸 밖으로 나왔다. 잠시 오르골 상점 앞에 멈춰 선 승조의 옆으로 백인 남자와 동양인 남자가 지나쳐 갔다.
「아까 그 여자 괜찮지 않았어? 얼굴도 예쁘고, 가방도 명품이던데. 어때?」
백인 남자의 물음에 동양인 남자가 슬쩍 웃어 보였다.
「돈도 좀 될 것 같고, 같이 놀기도 좋을 것 같네. 오늘은 그 여자로 하자.」
「오케이, 좋아.」
정확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기분 나쁜 대화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승조는 두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발끝을 돌린 승조가 두 사람의 뒤를 밟는데, 돌연 골목에서 자전거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걸음을 멈춰야 했다.
「죄송합니다.」
자전거를 탄 사람이 짤막한 사과를 남기고 지나가자 거짓말처럼 두 사람이 사라졌다. 승조의 걸음은 빨라졌고, 얼마 가지 않아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목격했다. 동양인 남자가 수희와 함께 있는 걸 보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불길한 기운에 승조가 끼어들려는데 수희가 갑자기 동양인 남자와 어디론가 뛰어갔다. 바닥에 붙어 있던 승조의 발이 즉각 떨어졌다. 교차하는 두 다리가 점차 빨라지고, 눈은 수희를 놓치지 않으려 애를 썼다. 하나 인파로 가득한 거리 속에 섞인 수희는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하아, 제발.”
가쁜 숨을 몰아쉰 승조가 휴대폰을 꺼내 저장되어 있는 수희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삐 소리 후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휴대폰 밖으로 수희의 목소리 대신 기계적인 여성의 멘트가 흘러나왔다. 불안감을 숨기지 못하고 휴대폰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승조가 주변을 바삐 둘러보았다. 여기서 포기하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어디 있어, 오수희.”
만약 그녀에게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다면 스스로를 용서하기 힘들 것 같았다. 상상만으로도 으드득하고 어금니가 갈렸다. 잠깐 멈춰 있던 걸음이 다시 빨라졌다. 파리를 전부 뒤져서라도 수희를 찾아낼 생각이었다. 멈추지 않고 뛰고 또 뛰었다. 시야에 다시 수희가 잡히길 바라며. 이마에서 주룩 타고 내려온 땀방울이 턱 끝에 맺혔을 때쯤. 그토록 찾아다니던 수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동양인 남자가 수희의 팔을 붙잡은 걸 보자 눈이 돌아갔던 것 같다. 주먹 쥔 손가락이 어그러질 정도로 힘이 들어갔고, 그대로 남자에게 달려가 주먹을 날렸다.
“도와줄 사람은 있지. 이 변수는 생각 안 해 봤나 봐.”
이성의 끈을 놓았기에 힘 조절은 불가했다. 남자가 나가떨어지자마자 얼른 제 앞에 있는 수희를 품에 끌어당겼다. 두려움이 덮쳤던 수희의 어깨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괜찮다고 말해 주듯 승조가 수희의 어깨를 더욱 꽉 감싸 안았다. 그제야 수희의 떨림은 가셨고, 미친 듯 뛰어 대던 승조의 심장도 잠잠해졌다.
“괜찮아? 다친 곳은.”
품에서 수희를 떼어 내고 제 쪽을 보도록 몸을 틀게 했다. 수희의 팔을 감싸 잡는 승조의 손이 뜨거웠다. 늘 정돈되어 있던 머리카락은 바람에 흩날려 흐트러진 상태였다. 두 눈꺼풀을 느리게 깜박이던 수희의 눈썹 사이가 서서히 좁혀졌다.
‘그런데 방금 한승조 씨가 나한테…… 반말한 건가?’
수희가 입술을 떼어 내려는데, 바닥에 볼을 비비고 있던 남자가 쿨럭댔다.
“너희, 내가 가만히 안 둬.”
주먹 한 번에 기력도 못 쓰고 나둥그러진 주제에 입만 살아 있는 남자를 보자 열이 차올랐다. 한마디로 빡 돌았던 것 같다. 수희는 일어서려 무릎을 세운 남자의 솟아 있는 엉덩이를 힘껏 차 버렸다. 퍼억― 엄청난 소리와 함께 남자가 데굴 굴렀고, 그사이 수희는 옆에 있던 승조의 손을 붙잡았다.
“빨리 가요!”
마음 같아서는 몇 대 더 흠씬 두들겨 패 주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남자의 패거리들이 나타날지 몰랐다. 수희는 남자가 일어서기 전에 승조와 함께 그곳을 벗어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왔던 길을 다시 되짚어 가며 뛰어갔다. 물론 승조의 손을 붙잡은 채였다. 어둠이 사라지고 불빛으로 가득한 상가가 나오자 달리던 수희의 다리도 점차 느려졌다.
“후우, 하아. 하아.”
귓전을 울리는 심장 박동 소리에 수희는 숨을 정리하려 애썼다. 반면 별다른 노력 없이 수희의 걸음을 따라잡아서인지 승조의 숨소리는 규칙적이었다. 승조는 자신의 손을 감싸 쥔 작은 손에 시선을 내렸다. 굳은살 없이 하얗고 가는 손가락이 제 손에 얹어지자 한없이 작아 보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참 작네, 너는.’
과거에 갇혀 있을 틈도 없이 아쉽게도 수희의 손이 빠져나갔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손에 남은 온기를 뒤로하고 승조가 손을 허공으로 떨어트렸다.
“무작정 알지도 못하는 사람 따라가는 거 아닙니다.”
“소매치기랑 한통속인 줄 알았다면 안 따라갔을 거예요.”
누가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고 싶었을까. 잘못한 건 그놈들인데 자신을 나무라는 것 같아 괜히 야속해졌다.
“매니저는 어디 가고 혼자 다니고 있습니까? 관광지 주변이 아니면 치안 안 좋은 거 몰랐습니까?”
“항상 매니저 오빠랑 다니진 않아요.”
꼬박꼬박 대꾸하던 수희가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근데, 대표님 저한테 화나셨어요?”
“화나다뇨.”
“지금 대표님 말투가 그래요. 꼭 어린애 혼내듯이.”
뒤늦게 승조는 자신답지 않게 감정이 앞섰다는 걸 깨달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알 수 없었다. 원래 의도는 그게 아니었기에, 승조는 머뭇거리며 입술을 열었다.
“화내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 조심하자는 뜻에서 말한 것뿐입니다.”
위험한 상황을 목격까지 하고 자신을 구했으니 주의를 시키는 건 이해한다. 그러나 화가 난 듯 다그치는 그의 언행이 조금은 과하다 싶었다. 나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이 사람은 날 꾸짖고 있는 걸까.
“대표님 눈에 제가 어떻게 보일지 알아요. 다 큰 어른이 모르는 남자한테 끌려간 것도 아니고, 제 발로 따라갔으니까.”
저 스스로 생각해도 소매치기범들의 수작에 넘어갔다는 게 한심하게 느껴졌다. 거기다 자신과 이렇다 할 친분이 없는 승조까지 질책하니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기분이었다.
“그렇게 감정적으로 절 대할 만큼 제가 잘못한 일인가요?”
조곤조곤 뱉어내는 말 속에 상처 받은 마음이 그대로 녹여졌다. 그걸 모르지 않기에 승조가 운을 떼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걱정돼서 그랬습니다.”
“…….”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오수희 씨니까요.”
꺾이지 않을 듯 냉정하기만 하던 그가 가슴이 따스해질 만큼 다정히 말을 꺼냈다. 도대체 한승조라는 남자를 정의할 수가 없었다. 그는 별다른 의미 없이 한 말일 텐데, 저 한마디가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아무 사이도 아닌 우리 사이가 꽤 특별해 보이게 했으니까.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충고 잘 새겨들었어요.”
승조에게는 충고보다는 걱정 어린 관심이었다. 하나 그걸 알아차리기에는 수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승조가 없으니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더라도 아까 도움받은 걸로 끝내고 싶네요.”
엮이지 않으려고 끊어 내면 풀 수 없을 만큼 더 단단히 묶이는 듯했다. 오늘은 여기서 끊어 내지만, 다음에는 또 어떻게 엮일지 모른다.
“그럼.”
고개를 아래로 가볍게 까딱인 수희가 발걸음을 돌려 호텔로 향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저녁은커녕 간단히 끼니도 때울 수 없었다. 승조와 헤어진 지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에 팔짱을 끼는데 콧방울 위로 무언가 툭 내려앉았다. 손끝으로 만져 보자 투명한 물방울이 스며들었다.
“설마 지금 비 오는 거야?”
그 말을 시작으로 어깨 위로 더 많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오늘 이렇게 되는 일이 없어도 되는 거야?”
최악의 날을 만들어 주려는 듯, 검은 하늘이 동그란 물방울들을 흩뿌렸다. 급하게 상가 지붕 아래로 몸을 피해 보았다. 일기 예보에는 비가 온다는 소식이 떴던 건지 사람들이 머리 위로 우산을 팡 펼쳤다.
‘소매치기만 안 당했으면 택시 타고 갔을 텐데. 아니, 하다못해 마트에서 우산이라도 샀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한승조 씨한테 돈이라도 빌리는 건데. 다시 돌아가서 10유로라도 빌려 달라고 해?
“그렇더라도 아까 도움받은 걸로 끝내고 싶네요.”
10분도 안 돼서 돈 빌려 달라고 하기에는 그에게 한 말이 입을 막게 했다.
“아, 괜한 자존심을 부려서는.”
뛰어다녀서인지 뒤꿈치가 욱신댔지만, 언제까지고 지붕 아래에서 비를 피할 수는 없었다. 결국 수희는 하늘이 많은 비를 쏟아 내기 전에 속도를 내 호텔로 뛰어갔다. *** 보슬보슬 내리던 비는 수희가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억수같이 퍼부었다. 머리카락 위에 앉은 빗물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는데, 등 뒤로 나직한 목소리가 와 닿았다.
“비 맞고 다니는 걸 좋아하나 봅니다.”
“…….”
“저번에도 길에서 비 맞고 다니던데.”
고개를 틀자 여유롭게 검은색 우산을 접는 승조가 보였다. 축축이 젖은 수희와 상반되는, 보송보송한 한승조였다. 이럴 거면 좀 일찍 나타나지. 그랬으면 좀 좋은가. 이쯤 되니 비에 쫄딱 젖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닌지 의심이 됐다.
“그때도 지금도 우산이 없었을 뿐이에요.”
흰 블라우스 위에 떨어진 물기를 떨어낸 수희가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저녁이고 뭐고 호텔 방으로 돌아가 따끈한 물줄기를 한껏 맞고 싶었다.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수희의 옆으로 승조가 섰다. 승조는 재킷 안에 있던 카드 키를 엘리베이터 버튼 아래에 가져다 댔다. 28층, 수희의 호텔 방이 있는 곳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가장 전망이 좋고, 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층수였으니까. 대화 없이 고요한 엘리베이터가 28층에 도착하고 수희가 먼저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왔다. 어서 호텔 방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걸으면서 주머니 안을 뒤적였다. 그런데 청바지 안을 아무리 뒤져도 호텔 키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자신의 방 문 앞에 우뚝 멈춰 선 수희의 눈앞에 장면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핸드백 안에 소지품과 함께 호텔 키를 밀어 넣었었다. 그러니 호텔 키는 찢어져 내팽개친 가방 안에 있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 가방을 찾는다고 해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고 반겨 줄 것 같지 않았다. 언제부터 찢어져 있었는지 모르니 어쩌면 구멍 사이로 흘렀을 수도 있었다. 고로, 수희는 이 호텔 방 안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설마 아까 호텔 키도 잃어버렸습니까?”
우두커니 문과 눈싸움을 하는 수희에게 승조가 물음을 건넸다.
“여권이나 예약했을 때 카드 가지고 있으면 여분 키 줄 겁니다.”
여권도 카드도 전부 철용이 들고 있었다.
“없다면 유감이지만요.”
유감? 나는 아주 난감이다. 철용은 수희가 묵는 호텔과 5분 정도 떨어진 3성급 호텔에 묵고 있었다. 중요한 건 그 호텔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전화할 휴대폰도 없다는 거다. 수희는 승조가 멀어지기 전에 불러 세웠다.
“한승조 대표님.”
자리에 멈춰 선 승조가 뒤를 돌아보았다.
“휴대폰 좀 빌려주실 수 있나요? 통화 한 통만 하고 끝낼게요.”
“제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아까 도움받은 걸로 끝내고 싶다고 했던 것 같은데.”
하하. 속도 좁아라.
“크게 의미 부여하고 한 말 아닌데, 그것 때문에 기분 상하신 건 아니죠?”
“기분 상했습니다. 내가 속이 많이 좁아서.”
저렇게 직설적으로 나올 줄이야. 난처함을 숨기지 못한 수희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찰나에 수희의 표정을 읽은 승조는 흘러나오려는 미소를 감추며 등을 보였다. 그대로 복도 끝 쪽에 있는 방으로 걸어간 승조가 문고리를 당겨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열린 방문을 발끝으로 밀어내 붙잡은 채 호텔 방 안쪽을 눈짓했다.
“오수희 씨, 이쪽으로 와요.”
“…….”
“휴대폰, 방 안에 있습니다.”
붙어 있던 수희의 입술이 사리살짝 떨어졌다. 하마터면 수희는 오해할 뻔했다. 굳이 자신의 방에서 통화하라는 줄 알았다.
‘그럴 리가 없지.’
헛웃음을 지은 수희가 승조의 방 앞으로 걸어갔다. 승조가 휴대폰을 들고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그는 어째서인지 다시 방 안을 가리켰다.
“들어와요.”
어딜 들어가. 여기 들어갈 곳은 당신 방밖에 없는데.
“제가 잘못 들었나요? 지금 대표님 방으로 들어가라고요?”
“아뇨, 제대로 들은 거 맞습니다.”
“…….”
“방으로 들어와요.”